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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랑 ㅣ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책의 제목을 살펴보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성가시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성 사이, 혹은 동성 사이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모녀 관계를 내세웠다. 아,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지. 모녀 사이의 감정들만큼 복잡하고 불가해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없다.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어머니와 딸의 '성가신 사랑'은 엇비슷하게 그려졌다. 일방적인 희생정신으로 어머니는 소리도 없이 자아를 잃어갔고, 그녀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우리는 반항을 하다가 결국엔 꽤 그럴듯하게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엘레나 페란테의 글은 다르다. 어머니 '아말리아'는 자신을 원하던 두 남자의 눈동자들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될 자유를 잃었고, 딸 '델리아'는 어머니 '아말리아' 그 자체가 되려는 강렬하고 왜곡된 열망에 휩싸여 있다. 자신보다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딸이 자신의 꿈을 이뤄주기를 바라는 위(어머니)에서 아래(딸)로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딸인 '델리아'는 어머니 '아말리아'와 동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우위를 점하면서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왜곡된 욕망들의 향연
'델리아'는 자신의 어머니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여 진실을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델리아'의 이런 잘못된 사랑 방식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내인 '아말리아'를 집착적으로 사랑하고 또 폭행했다. '아말리아'를 경멸하고 질책하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둬두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방식은 '델리아'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리적인 폭력의 여부에만 차이가 있을 뿐 '델리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아말리아'를 정신적으로 갉아먹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 이외에 '아말리아'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알고지낸 '카세르타'라는 남성이다. 그는 '아말리아'를 향해 오로지 변태적인 욕망만을 소유하고 있다. '델리아'는 어머니가 네 개의 눈동자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다가 죽어버렸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섯 개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거리다가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아말리아'로서는 성가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근거로 '아말리아'의 무대 앞 관객석에서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아말리아'는 죽던 그 순간에 자신의 "무대 앞 관객석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262쪽)"다. 그녀로서는 죽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자유를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향한 예행 연습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델리아'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사랑뿐이었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 '아말리아'의 이야기는 '델리아'의 자아에 내재되고, 끝내 '델리아'는 '아말리아' 자체가 된다.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삶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서야 이해하고 그토록 열망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바로 아말리아였다(286쪽)."는 맨끝 문장에서 처음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사는데, '델리아'는 끈질기게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되돌아 가는구나 싶어서 놀라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얻게 되는 것들-상대에 대한 완전한 이해-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부모에게서 온 것들을 거부하려고 애써도 마지막엔 그들의 얼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뭇내 아쉽고 안타까우면서도, 그들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혹여 절반뿐이라고 해도 완전한 성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