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새해 첫 날에 읽는 작품이 그 한 해를 좌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월 1일에 처음으로 들은 음악이 그 해를 결정짓는다는 말처럼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2021년이 되기 한 달 전부터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겼는데, 나름대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고르게 되었다. 우선은 스스로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재주가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해졌으나, 언젠가는 하고 놓지 못한 꿈이다. 또한, 나혜석 선생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를 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글쓰기를 한 신여성이었다. 연애, 결혼 그리고 이혼, 육아에 관한 나혜석 선생의 주관은 현재의 우리와도 공명할 가능성이 차고 넘친다. 더 나아가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사회의 압박과 관계없이 여성들이 독립되고 자유로운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등불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나혜석 선생의 글이 이렇게 엮여져 한국의 여성 독자로서 뛰어난 페미니즘 고전 한 권을 얻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다. 그녀가 당대의 사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치열하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덕분에 우리는 응당 주어져야 할 것들에 대한 또 하나의 확신을 얻는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은 총 5부로 구성되어 1부에는 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이후에는 각각 ‘결혼‘, ‘이혼‘, ‘육아‘, 그리고 ‘정치와 삶‘에 관한 각종 글이 실려 있다. ‘연애‘, ‘결혼‘, ‘이혼‘, 그리고 ‘육아‘는 여성들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그것들은 여성 개개인의 삶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져 왔고, 각각의 단계에 여성들은 때맞춰 자신을 끼워 넣기를 강요받아 왔다. 진보했다고 평가받는 세상에서도 이혼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낙인처럼 작용하고, 육아는 그것도 여성만을 옥죄는 노동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혜석 선생의 글에서 여성은 이런 보편적인 흐름과 전면적으로 분리된다. 여성은 ‘엄마‘나 ‘아내‘의 위치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자신의 힘을 자각한다. 실력과 권력을 가진 그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유의미하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나혜석 선생은 믿었다. 지금에서야 일정 정도 그럴 만한 자유를 누리고 또 그러도록 종용받고 있지만, 이 글이 쓰인 시점이 20세기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지난 한 세기 동안 뛰어나리만치 개선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나혜석 선생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적인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울림에 화답하는 독자가 있어야 그 작품은 더욱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년 7월에 11쇄를 찍었다. 18년도에 출간된 이래로 꾸준히 관심을 받는 것만 보아도 독자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어떤 열망을 품고 있는지 느껴진다. 이런 간절함이라면 한 개인과 작품 사이의 공명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이어지고, 그런 사람과 사람 간의 연대가 종국에는 현 사회를 개선시키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 책을 읽을 마음을 먹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작은 불꽃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까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도대체 무슨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점점 내가 얼마나 미약한 개인인지를 발견하고야 만다. 시무룩해지다가도 아니지, 부지런히 읽어야지, 또 써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한다.

▶ 또 다른 추천 책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장영은 지음, 민음사 출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장영은, 오혜진 외 공저, 민음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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