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발행이 시작된 인문 잡지 《한편》은 1호 ‘세대‘부터 시작해 3호 ‘환상‘으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 각 호마다 다양한 필진으로 한 주제를 다각도로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가 흥미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전부 기억에 남지만 이번 호 ‘환상‘은 특히 더 그랬다. 이 잡지가 도착했던 때 ‘펜벗(반디앤루니스 서점에서 진행하는 활동이다. 4개월간 서로 다른 주제에 맞춰 도서를 큐레이션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선보인다.)‘ 큐레이션의 주제가 바로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큐레이션의 주제가 쉽지 않았지만 ‘환상‘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어느 작품에나 그 단어를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상과학 소설을 고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가지고 있는 환상을 서술하고자 하는 책을 큐레이션 할 수도 있었다. ‘환상‘은 실로 광범위한 세계를 포괄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을 해당 큐레이션을 통해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런 단어를 주제로 선정한 이번 호 《한편》도 다양한 분야 -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부터 코로나, 철학, 탈북민 등 -를 자유자재로 가로지른다. 우리는 이번 잡지에서 ‘환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현재, 또 이후에 해야 할 일들을 함께 의논하는 계기를 마련해 볼 수 있다.

「판타지와 함께 살아남기」에서 우리는 ‘환상‘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가 여태 도달하지 못했고 어쩌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 희망,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세계에의 열망(111쪽)˝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가장 집착하는 ‘환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는 역시 코로나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일 테다. 코로나가 이만큼이나 장기화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전에 가진 ‘환상‘은 강렬했다. 하지만 바로 코앞의 상황까지 짐작하기 어려워지면서 ˝이번에야말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전 인류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 변화를 꾀하(43쪽)˝려던 사람들의 열정은 힘을 잃었다. 우리는 ‘환상‘보다 언제 잃어버릴지 알 수 없는 현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그나마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127쪽)˝ 뒤늦게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가 애써 붙잡아 보려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이번 호에서 만나볼 수 있다. 「희망의 물리적 토대」는 ˝지역 사회에서 살며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절망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그 뻔한 현실. 그 일상을 가지고 싶(208쪽)˝어하고, 이를 끝내 가지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권태로운 나의 일상을 ‘어쩌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 ‘환상‘으로 품고 사는 이들을 생각하며 부끄러운 한 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환상‘, ‘가상‘, 그리고 ‘거짓‘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뒤집어 보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여기에서 ‘거짓‘은 ˝현재의 진실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거짓, 현재의 진실을 문제 삼는다는 의미에서의 거짓,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며 그것을 낳는 움직임을 촉진하는 힘을 갖는 것으로서의 거짓이다.(167쪽)˝ 진실을 폄훼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거짓‘은 「가상과 거짓의 철학」 속에서 드디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하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만 치부되었던 ‘거짓‘과 ‘환상‘, ‘가상‘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실재를 목도하고,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발견한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종종 우리를 배신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뒤늦게 ‘환상‘의 존재와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러니 ˝어째서 우리가 관계하는 세계가 허구여서는 안 되는가?(168쪽)˝ 이런 물음으로 우리의 새로운 해가 시작될 것이다.

운동 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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