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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 피플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평점 :
<노멀 피플>의 홍보 과정에서 '밀레니얼 세대'라는 단어가 유독 강조되었다. 이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랑은 밀레니얼 세대를 뛰어넘어 정형화된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독자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함께하면서도 끝끝내 연인으로 규정되지 않는 이들의 관계는 '밀레니얼 세대'만이 지향하는 종류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누군가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이어져 왔다. 작가 샐리 루니는 독자들의 이런 움직임을 알맞은 시기에 끄집어 낸 것이다. '메리앤'과 '코넬'의 서사는 종잡을 수 없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명히 매혹적이다. 여태껏 유지해온 신념과 관계없이 나 자신을 무력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사랑처럼 그들의 이야기에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로 한없이 귀를 기울이고 싶어진다. 이전의 나를 떠올려 본다면, 그들에게 끝없이 설교를 늘어놓고 싶어 안달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나, 나는 고지식하고 어른들이 내게 주입한 방식 이외의 사랑은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울면서 내게 하소연을 하다가도 자신의 사랑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메리앤'과 '코넬'의 불가해하고, 때로는 부도덕한 사랑을 비난하기보다 방임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노멀 피플>이 몇몇 독자의 신경을 거스를지도 모르지만, 일일이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지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전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행복과 다른 한 사람의 행복을 희생해 지켰던 비밀이 줄곧 시시하고 가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메리앤은 손을 맞잡고 학교 복도를 따라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런다고 어떤 무서운 결과가 뒤따랐을까? 설마. 아무도 관심 없었다.(99면)"
나는 끈질긴 고통 속에 이뤄지는 사랑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과하는 청소년기에 관한 묘사가 더욱 흥미로웠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터무니없이 큰 의미를 지니"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그 시기를 떠올리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내가 또래의 시선을 의식하며 저질러야만 했던 일들을 되새기다 보면 그 시절을 통째로 삭제하고 싶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할까 봐 두려워 메리앤을 밀쳐내고야 마는 코넬의 행동이 못마땅하면서도 나는 그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을 놓치는 일보다도 또래 집단 속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게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내가 어울릴 만한 친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때가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이의 어린 시절에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해대던 과거의 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면에서는, 어차피 금세 잃어버리게 될 삶을 평생 함께해야 할 전부인 것처럼 여기던 시절에 대한 반성이 있기에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메리앤'은 그녀 자신에 대해서 가학적이고, 또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어머니와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에게서 비롯된 절망적인 일면이다. 자신의 지적인 모습과 유별남을 중시하면서도, 급작스럽게 자기혐오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코넬의 우울감과 메리앤의 집착적인 자기혐오는 오로지 서로를 통해서만 극복된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면서도, 찰나의 연대와 유대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실은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 이성과의 사랑으로 치부되는 것에 불만을 느끼기도 했다. 관계라는 것은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혼자만의 힘으로 강인하고 온전해질 수는 없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를 여태껏 버티게 했던 것은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었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관심을 끌고 잘 보이기 위해서 했던 선택들이 내 삶의 진보를 이끌어낸 적도 꽤 많았다. 그들의 간접적인 도움을 부정하는 내 모습은 마치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의 힘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완벽하게 관계를 이루어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워서 나는 메리앤이나 코넬과 다르게 홀로 지금까지의 시련을 이겨낸 굳센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이성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인간관계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삶을 극복해내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을 빌려 나의 '코넬'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 듯하다.
서로를 위해 태어난 듯 꼭 들어맞는 메리앤과 코넬 사이에도 간극이 존재한다.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계급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후 상황이 역변되지만, 학창시절 메리앤은 비정상적인 인물의 대표격이었고, 코넬은 정상으로서 어디서든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구분이 예전에 큰 사랑을 받았던 <상속자들>이나 <꽃보다 남자>와 같은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철 지난 TV 프로그램으로만 여겼는데, 내가 사는 현재에 아직도 이런 소재가 사용되는 것을 보니 계급 상의 차이에 따라 조성되는 집단 구성은 유효한 모양이다. '에이, 진짜 유치해. 내가 어릴 때는 왜 저런 드라마를 재밌다고 생각했지?' 싶었는데, 그런 불평등의 잔재와 함께 존속하고 있는 현실을 감각하고 나니 지울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사랑 앞에서는 급의 차이가 무너져 내리는 순수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어쩐지 나는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