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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소설로 분류된 장혜령 작가의 <진주>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이다. 시와 산문이 혼재되어 있어 운율감이 도드라지고, 실제 자료들을 삽입함으로써 사실성과 생생함을 배가되었다.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서술하는 자가 객관적으로 사건을 관찰하는 타자였다가,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한다. 이전이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생경하게만 느껴졌을 테다. 그러나 같은 명분 아래에서 벌어진 촛불 혁명의 시간을 통과해왔으므로, 국가의 더 나은 미래를 바라던 윗세대의 마음이 내게도 와닿았다. 물론 내가 겪은 것은 평화적이고 차분한 나날들이었으므로, 아버지들을, 어머니들을 이해한다는 말이 그들의 귀로 가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스스로 독재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운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감각하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그들의 상실감, 무력함, 또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장혜령 작가의 아버지는 실제로도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써 내려간 글은 이전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작가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숨겨야 할 것들 투성이였고, 쫓기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아버지가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그걸 알 듯하면서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참아내기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므로 억울함마저 느껴졌을 것 같다. 소설 <진주>에서는 대의를 위해 가족의 희생을 요구한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자신의 아버지 한 사람이라기보다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 안에 그 세대 전체의 남성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밀문서나 편지 등에 적힌 아버지의 존재는 언제든 지워질 수 있었고, 위태로웠다. 장혜령 작가는 민주화를 위해 분투한 투사들을 치켜세우기보다, 담담하게 그들이 가졌을 슬픔과 불안을 묘사한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전부인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고, 개인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기쁨이 아닌, 또 다른 힘겨운 싸움이었다. 공동의 목표가 사라졌고, 그에 대해 함께 가지고 있던 열정은 분해되었다. 이전처럼 불의를 참지 못하고, 권력에 맞서려는 그들에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다들 싸움에서 지쳤고, 웬만한 트러블은 적당히 눈 감은 채 평화롭게 세상을 유지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응당 세상을 주도해야 할 패기 있는 엘리트들이 밖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정의를 위한 긴긴 싸움을 주도하던 이들은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잊어야만 한다는 말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처럼 떠돌이가 되었다. 2020년에 이른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을 잊었으나, 장혜령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더 늦기 전에/이미 늦었다 해도/ 모든 것이 사라져, 다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아버지들이 자신의 야망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논하면서 역시 어머니들의 역할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녀들은 꿈을 좇는 남편을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세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왜 꼭 그게 자신의 남편이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드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온몸을 내던져서 얻을 수 있는 게 결국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어떻게 남편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어머니들은 끝까지 인내하고, 자신의 아이를 지켜냈으며, 때로는 갖은 이유로 잡혀가는 남편을 위해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고통을 버티는 것으로, 자식들과 어머니들은 아버지들의 미래를 향한 열망에 보탬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에 관하여
민주주의는 완전하다,라는 믿음이 강요되던 때에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어야 하고, 전부 평등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조종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때였다. 하나의 이념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신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초래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쪽으로 나뉘었고, 다른 한쪽은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단되었다. 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공산주의 진영 사람으로 몰려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자들은 모두 사이비로 여기고 징벌 이행을 서슴지 않았던 종교재판을 연상하게 한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불분명한 근거를 대면서 어느 한 쪽이 나쁘다고 선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권력자들의 선동에 기꺼이 휩쓸렸다. 믿음은 종종 권력의 도구가 되었고, 처벌의 이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각기 다른 형태의 믿음들이 스러져갔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가진 의견 전부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 세대에서도 뚜렷한 이유 없이 어느 한 쪽이 묵살되고,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장혜령 작가는 믿음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 "믿음은 어떻게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바꿔놓는 걸까. 믿음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지금 아무렇지 않게 맞는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정말 옳은 일일까. 우리의 확고한 믿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느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만을 중시하고, 다른 한쪽을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질 기회를 거부하고, 믿음에 짓눌려 살아가고자 하는가. 상황에 따라 믿고 따라야만 하는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고,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이 각각의 장점을 골라내 더 좋은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믿음들도 존재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은 한 권력자의 선동에서 비롯되었고, 사람들은 진실을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채 흐름을 따라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이 세상을 어떻게 지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지, 우리는 목격해오지 않았던가. 소설 <진주>는 맹목적으로 믿는 행위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나의 부모도 또 다른 아버지들이자 어머니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의를 참고 견디는 방향을 택했다.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울 때마다 운동가들을 깊이 존경했다. 누군가의 용기에 현재의 삶을 빚졌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현실을 회피했던 부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존재다. 당연히 나서야 하는 때에 물러날 선택을 한 부모를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위 권력에 대항하면 견뎌야 할 공포심을 이제는 알고 있다. 게다가 개인의 변화에 대한 열의로 사회를 단번에 전복시킬 확률은 희박하다는 사실도 인지할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세상이 불의에 저항할 누군가를 원할 때, 주저 없이 저항자의 무리에 끼어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길 희망해본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한 구절을 이용해 아버지들, 어머니들, 당시에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어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