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창문 - 2019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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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호텔 창문>과 수상 후보작들이 실려 있는 책이다. 수상작이기 때문에 <호텔 창문>을 위주로 편집되었고, 뒤표지에도 <호텔 창문>의 간략한 줄거리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호텔 창문>만이 주인공인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이 작품집에 수록된 후보작들도 전부 훌륭했고, 눈여겨볼 만했다. 애초에 작가들 라인업이 빵빵해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다른 수상작품집과 좀 달랐던 점이 있다면, 심사평이나 수상소감이 수상작보다 앞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해설을 들으려니까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굳이 작품을 모두 읽은 후에 앞으로 돌아와서 심사평을 살폈다. 우선적으로 <호텔 창문>을 읽게 된 건, 며칠 전에 관람했던 영화 <호흡>과 소재-죄-가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호흡>에서는 죄가 있는 가해자가 그 죄를 안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했다면, <호텔 창문>은 띠지에 쓰여있듯이 '죄 없는 죄의식'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이다.

◆작가 편혜영, <호텔 창문>

며칠 전 관람했던 영화 <호흡>처럼 편혜영 작가의 작품도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영화 <호흡>에서 '정주'가 유괴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건 아들의 수술비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 <호흡>의 '정주'와 달리 소설 <호텔 창문>의 '운오'가 한 행동은 죄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운오'가 형의 도움으로 생존한다. 큰어머니는 그것만으로 '운오'에게 죄가 있다고 봤다. 평소 행실이 나쁘고, '운오'를 주기적으로 괴롭히기도 했던 형은 의로운 죽음을 맞은 것처럼 평가되었고, '운오'는 살아남아 큰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며, 자신이 누구 덕에 살았는지를 자꾸만 되새겨야 했다. 삶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운오가 형의 제사에 강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호텔에서 일어난 화재를 목격한다. 가끔 야릇한 상상을 하며 호텔 창문을 바라보기도 했던 곳이다. 그리고 형의 친구들 중 한 명에게서 그의 직장에서 발생했던 화재 사건에 대해 듣는다. 형의 친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정말로 방화를 저지른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공장장이 그를 계속해서 몰아세우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과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범죄자라고 규정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기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편혜영 작가는 죄와 죄의식에 대해 묻는다. 누구의 죄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운오'는 그리고 형의 친구는 큰어머니와 공장 사장을 통해 강압적으로 죄를 떠안는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이 없음에도 깊은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누군가를 책망하면 안 좋은 일이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큰어머니는 공장 사장은 그들을 몰아세웠다. 이 부분에서 의구심이 생겨났다. 정말 자신의 아들이 '운오' 살렸다면, 왜 큰어머니는 아들이 살려낸 생명을 온전히 지켜주지 않고, 자신의 슬픔만을 강요하는 것일까. 자연발화로 판명이 났음에도, 왜 공장 사장은 형의 친구를 몰아세워 책임을 전가했을까. 왜 엉뚱한 사람에게 죄가 성립되고 죄의식을 안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아들을 혹은 공장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들은 누군가를 타겟으로 정해야만 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원망하면 마음은 편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닌 거니까. 그렇다면 죄는 생사람을 잡은 큰어머니와 공장주에게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편혜영 작가의 <호텔 창문>은 얼떨결에 가해자라는 택을 달고, 인생을 살아가게 된 이들의 삶을 고찰하여 죄 없는 죄의식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만드는 책이었다.

◆작가 김금희, <기괴의 탄생>

'기괴의 탄생'은 소설 속 작가 '돈수'의 작품 이름으로 등장한다. '기괴의 탄생'이라는 작품에서 '돈수'는 침까지 흘려가며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우량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괴의 탄생>은 이처럼 불타는 듯한 열정을 쏟아붓지만, 결국엔 알싸한 맛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릴 사랑들에 대해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런 사랑의 과정 속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어 버리는 사랑의 무결함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김금희' 작가의 <기괴의 탄생>은 역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위트 있는 문체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저자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똑같은 상황을 두고 이런 문장들을 떠올릴 수 있는 걸까, 부러운 마음이 솟아난다.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기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기괴'는 소설 속 주축인 '윤령'의 직장 동료인 '리애'씨가 말하는" 참으면 미워하게 돼"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하지 않고 참으면서 누군가의 상황을 열의를 가지고 탐구하다가 만들어 내고야 마는 그 거짓된 진실을 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리애'씨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리애' 씨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추측하는 '윤령'의 모습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억측에서 탄생한 거짓된 진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다 못해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으므로, 충분히 '기괴'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작가가 생각한 '기괴'라는 건, 예측해 보건대, 한 쪽이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균형이 무너져 내려버리는 그 상황을 말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 마치 위에서 언급한 우량아가 손가락을 침을 흘려가며 빨던 그 장면처럼 말이다. 공평한 관계가 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유지되는 사랑은 지속되기가 어렵고, 마침내 그 한 쪽을 무너뜨려버린다. 이런 면에서 작가가 '기괴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윤령'이 존경하던 선생 '진은파'의 사랑이 <기괴의 탄생>에서 중심된 화제인데, '은파'는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 관계는 아주 당연하게도 무너졌고, 애초의 순수함은 사라진 채 '기괴'로 추락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작가 김사과,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이수영'의 삶은 '한비'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자신의 삶에 온통 불만을 품고 있었고, 도통 나아지지 않는 인생을 주변의 탓으로 돌리곤 했었다. 하지만 공강인 줄 모르고 학교에 간 날, 그녀는 우연히 '한비'와 마주친다. 다른 동기들도 멀리하고, '수영'으로서도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타입이었던 '한비'와의 뜻밖의 만남은 '이수영'의 삶을 뒤집어 놓는다. '한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이수영이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이수영'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그녀는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수영'에게 있어서 '한비'는 큰 전환점이었지만, 그녀는 비밀도 많고, '이수영'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신비롭기 짝이 없던 보헤미안 친구('한비')의 비밀과 급작스럽게 마주하게 되면서 예술가 친구('이수영')는 상실감을 경험하고, 이후 '한비'가 없는 삶을 상상하며 절망하게 된다.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친구에게서 깊은 애정을 느끼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라는 건 종국에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야 하니까 헤어짐을 겪을 수밖에 없다. '김사과' 작가의 이번 작품은 친구 사이의 우정과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을 때에 찾아오는 막막함을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김혜진, <자정 무렵>

친한 친구였던 '유리'의 사무실에서 파티가 열린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지껄인다. "점진적으로 그런 사람들도 우리가, 사회가 끌어안아야 한다"거나, 한국은 이런 면에서 발전하려면 아직 멀었다느니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관계도 사실은 아주 보통의 것이라고 말한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계기로 이어져서, 소소한 이야기들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그런 사이 말이다.

소설 속 '너'와 '나'는 동성 연인으로 보였다. 아마 김혜진 작가는 이런 관계도 특별하게 여겨질 것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 같다. 소설 속 사람들처럼 배려한답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대면서, 정작 그들과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들이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정책과 사람들의 시선 변화를 위해 나서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끝없이 자신들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받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서 그들의 관계를 도와야 하는지 들어야 한다면 무척 진이 빠지는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가족,연인 등-의 결합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지 간에, 제3자가 지나치게 개입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말을 얹던 사람들도 사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그들을 위하고 싶은 호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배려나 순수한 걱정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다. '김혜진' 작가의 <자정 무렵>을 통해 또 이렇게 새로운 시선에서 세상을 본다.

◆작가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죽은 언니를 대신해서 '조지영' 씨는 '송이'라는 조카를 돌본다. 가진 게 별로 없는 가족이지만, 서로를 위한 마음만은 가득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였다. '송이'라는 한 사람만을 위해서 마음을 쓰는 할머니와 이모의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져서 울컥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없었으나, 잔잔함과 애틋함이 매력적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소장해 두고 싶은 소설이었다.

◆작가 조남주, <여자아이는 자라서>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여성들의 인권을 수호하고, 도망쳐 온 여성들을 보호해주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성의 딸은 자라서 여성주의 문학을 읽는 독서모임을 대학에 개설한다. 그녀의 딸인 '주하'라는 여자아이는 자라서, 상습적으로 같은 반 여자아이들을 성희롱하던 남자아이들을 처벌할 방안을 마련해 낸다.

더 이상 당하기만 하는 여성들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주목할만하다. 그들은 주도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여성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기도 한다.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어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모를 수 없었던 할머니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놀랍다. 이렇게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자 어른을 보고 자라면, 자연스레 앞으로 여성으로서 맞닥뜨릴 문제들을 해결할 용기와 실질적인 방안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하'의 어머니는 당연하게도 성교육 캠프에 수시로 참가하고, 대학교 때는 여성주의 책 모임을 자발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성장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강해져 '주하'라는 딸은 남자아이들이 처벌받을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려고, 그들을 유인해낼 계획까지 세운다. 이처럼 할머니 엄마 딸로 이어지는 수 세대에 걸친 여성들은 개별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그들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애쓴 일들은 축적되어 강렬한 힘이 되고, 뒤 세대의 여성들의 인권 향상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즉 한 세대의 여자아이의 성장은 다음 세대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여자아이들이 자라서 서로의 삶에 어떻게 보탬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조남주 작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페미니즘 소설이다.

◆작가 최은미, <보내는 이>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의 마음을 묘사하는 소설이다.

아이를 매개체로 친해진 관계는 위험하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들이 개입되면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아' 씨와 '영지'씨는 가깝게 지냈다. 둘 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고 있고, 아이들 이름의 끝자가 윤이라는 것도 같았기 때문에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헛헛함을 '진아'씨와의 관계에서 메꿔 보려던 '영지'씨는 사소한 일들에도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애정을 쏟던 관계이기에 '진아' 씨에게서 자신은 모르는 비밀이 발견될 때 그녀는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종국에 '진아'씨가 떠나고야 말았을 때에 큰 슬픔을 느낀다.

꼭 이성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구 사이에도 이런 깊은 애정이 생겨나곤 한다. 나만큼의 정성을 쏟아붓지 않는 상대에게서 상처를 입는다. 모든 관계에는 바람이 들 만큼의 공간이 남아 있어야 한다, 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선을 긋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밀도 높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을 접하면, 당연히 상실감은 그만큼 깊어진다. 특히 '진아'씨와 '영지'씨는 육아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듦과 외로움을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공통적인 분모를 가진 상대를 찾아내기란 꽤 어려운 일이니까. 소설 <보내는 이>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관계에는 늘 끝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마음을 절제하는 일이 중요한데, '보내는 이'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면서도, 우리는 또 그렇게 어둠이 밀려오지 않을 관계인 것처럼 모든 걸 내주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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