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자신의 당숙에게 강간을 당했다.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부당한 일을 겪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차고 넘친다. 누군가는 여자들이 당하는 모습은 이제 지겹다고, 그만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가슴은 아프고, 그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하지만, 이런 소재를 다룬 책들이 싫지는 않다. 같은 여성으로서 누군가가 힘겹게 꺼내 놓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82년생 김지영>은 단번에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이라고들 했다. 책장을 덮고 자꾸만 숨을 골라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몇 시간만에 다 읽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도 분명 분노가 일었다. 내가 차별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살아왔던 것을 저자가 콕콕 집어냈다. 소설 속 '김지영' 씨가 겪는 일들은 내가 흔하게 맞닥뜨린 사건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여성이 받아온 시련들에 무감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당혹감으로, 또는 너무도 당연하게 잘못된 생각들을 수용해온 내 자신에게 절망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김지영'씨에 대한 동정보다는 새로운 시각의 획득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단숨에 완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언니에게>는 어른같지도 않은 어른들의 모습에 화를 내다가, 점점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는 '제야'로 인해 책상을 내리치며 울다가 몇 번이나 책을 덮어 버렸다. 아직도 아이를 보호하는 데 이토록 서툰 세상이라니. 게다가 내가 그런 무력한 어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니. 책을 읽는 내내 오래도록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주변에서 '제야'를 본 일이 없다. 아마 '제야'와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털어놓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들었다고 해도 무슨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당사자가 직접 증명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 나는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 '제야'는 강간을 당한 이후에도 부모에게 혼날 일을 먼저 걱정하는 아이였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의 친척들은 어느 누구도 '제야'의 입장에 서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침묵을 강요했다. 아니 이게 2019년에 일어날 법한 일이란 말인가? 이 소설은 2019년 9월에 출판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그 말인 즉슨, <이제야 언니에게>가 현실과 무척 가깝다는 소리다. 내가 사는 세상이 나아지지를 못하고 자꾸 뒤로 물러난다. 또한, 피해자가 사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해야 하는 사법 체계에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일들을 기록하라니. 공포스럽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항을 해야 한다니. 여성들은 약하니까 이런 힘든 일들은 못할 거라고, 그러니 물러나 있으라고, 남자 어른들은 말했다. 살면서 남자들에게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중요한 순간이 되면, 여성들이 강해져야 한다고 태도를 바꾼다. '육아와 가사 노동'이라는 육체노동을 24시간 내내 해낼 만큼의 힘이 있지 않느냐고, 나를 덮치려는 남자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만큼 강하지 않냐고, 사회는 마치 늘 그렇게 여성들을 대접했던 것처럼 말을 바꾼다.
'제야'뿐만 아니라 그녀의 친구인 '은비'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사람들은 지나치게 입방아를 찧고, 루머를 확대 재생산했다. 이 과정 속에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피해자인 '은비'와 '제야'가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간다.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확인되지도 않은 말들이 퍼져나가고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입게 되는 건 강간 사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일이 터지면 침묵해야 할 사람들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문을 퍼뜨려야 자신들의 잘못이 지워지는 것처럼 마구 말을 해댄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피해자를 구해내지 못했던 자신의 무력함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