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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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를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쇼코의 미소>라는 작품을 읽은 이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단 한 작품일 뿐이었지만, 작가가 보여준 따뜻한 우울감-그런 말이 혹시 존재한다면-과 감정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은 나를 매혹시켰다. 한 작품만 읽고 최은영 작가를 최고로 좋아한다고 꼽는 것은 성급한 결론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감정들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내 자신을 떠오르게 했고, 우울하면서도 따뜻한 문체가 털어놓는 문장들이 내 마음을 자주 대변해주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최은영 작가를 내 마음 속 최고로 꼽는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도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질 못하고, 오히려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왜 나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고 슬퍼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으로 네 옆에 앉아 있을까.˝ 하고 고백하는 <모래로 지은 집>의 ‘선미‘의 고백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을 창피하게 느끼던 지난 날의 나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이 작가는 나와 결이 같은 사람이라고, 마치 내 일기장을 오래도록 훔쳐 보고 있던 사람의 글 같다, 고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최은영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다.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던 내 마음을 세심하게 종이 위에 꺼내놓는 작가.

<내게 무해한 사람>에는 7편의 소설들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이번 소설집은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 여름>의 ‘이경‘과 ˝세상 누군가는 나의 이런 변변찮은 일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저런 관계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돌더라도 괜찮았다는 <모래로 지은 집>의 ‘선미‘의 이야기는 ‘관계‘들이 주는 힘을 설파한다. 어느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세상을 겉돌기만 하던 이들은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최은영 작가의 작품에서는 관계가 쉽사리 이어지질 않는다.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관계들이 그러듯 끝끝내 끊어지고, 그러면서도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되는 현실이 소설들에서 보여진다. 삶을 버티게 만들었던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쇼코의 미소> 때와 다른 점을 언급한다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남자들이 등장한다는 것과 그 반대편에서 묵묵히 고통당하던 여자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남자 선수들에게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는 <그 여름> ‘수이‘에게 코치가 건네는 말은 극도로 분노를 일으킨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남자애들은 원래 다 그런 거고, 짖궃은 장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유치한 일˝이라니. 폭력을 당연한 일처럼 여기며 행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그걸 방관하는 사람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 등장한 ‘공무‘나 <아치디에서>의 ‘랄도‘처럼 피해자가 꼭 여성만은 아니었다.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아들에게 ˝다 네 탓이라고, 네가 여지를 줬다고, 어떻게 네가 내 아들일 수 있냐고. 네 형들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치욕스럽다(284p)˝고 말하던 아버지를 둔 ‘랄도‘를 보면,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은근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601, 602> 속 ‘엄마‘의 고통만이 더 괴로운 종류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작품들에서 드러나던 것은 언어적인 폭력 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모래‘에게 폭력을 가하던 <모래로 지은 집> 속 교사와 ˝문이 닫힌 방 안에서 셀 수도 없이 맞던 <지나가는 밤> 속 ‘효진‘이가 있었다. 이런 물리적인 폭력이 빈번하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던 때가 있었다. 특히 선생님에게 몸이 부서질정도로 맞는 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학교 내 체벌이 금지되기 이전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야구 방망이로, 얇지도 않은 출석부로 온 몸을 얻어맞는 게 ‘체벌‘이란 단어로 용서되던 때가 있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작품집에 드러난 물리적인 폭력들은 내게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고백>에서처럼 귀걸이를 하지 않았는데도 오해받아서 남자 선생님에게 여자 아이가 몸이 나동그라질 정도로 맞는 일도 더러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아주 요원하게 느껴지지만. 나처럼 그런 시절을 겪었던 최은영 작가가 고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그런 폭력들에 그저 겁먹고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방관하던 내 자신을 떠올렸다.

수록된 7편의 작품들 중에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던 것은 <지나가는 밤>이었다. <지나가는 밤>에서는 ‘윤희‘와 ‘주희‘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일로 무척이나 바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로운 자매의 인생은 나와 꼭 닮아 있진 않았지만, ‘자매‘라는 상황 설정이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동생인 ‘주희‘가 ˝또래나 언니들과 놀고 싶은데 자기에게 꼭 붙어 있으려 하고, 떨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이˝ ˝짐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하는 ‘윤희‘의 모습에서 어린 나의 모습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도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외출하는 나에게 엄마는 동생을 자주 함께 외출하게 했다. 어릴 때는 그게 얼마나 부끄럽고, 귀찮았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에게 그런 식으로 상처를 줄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시간을 바라는 ‘윤희‘를, 즉 어린 나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그저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을 동생에게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윤희‘처럼 바라고 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을 알라딘에서 구입했을 때, 굿즈로 작고 예쁜 컵도 받았다. 컵에는 <손길>이라는 작품 중 한 구절이 쓰여 있다.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굿즈를 받았을 때는 책을 읽기 전이었는데도, 그 구절이 내 마음에 와닿아서 한참을 쳐다보고,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컵에 새겨진 한 문구만으로도 최은영 작가가 얼마나 따뜻한 우울함을 지닌 사람인지 느껴졌던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보니까, ‘관계‘의 시작과 끝을 두루 살피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글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눚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그 과학적 사실은 어린 나에게 세상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다정하게 다가왔었다.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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