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제수 상에 올릴 장을 봤다. 내일은 이십팔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이다. 매년 양력 4월 초이튿날마다 외할머니와 먼 길을 나서는 날. 꽃 한 다발을 들고 가 묘 앞에서 울고 웃다가 오던 날. 할머니와도 대화를 나누고 엄마에게도 말을 붙이는 날. 그럴 때면 가장 아끼는 사진 속 엄마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쉽게도 엄마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은 말을 하지 않더라.)

 

고맙데이. 내 손주! 니 아니면 내 혼자는 여기 엄두도 못 낸다.” 선산에 올라 한참 딸의 묘에 머물다 내려올 때 할머니가 어김없이 하시는 말씀이다. 자식으로서 지당한 일을 치켜세우시니 할 말을 잃는다. 당신께선 올해 아흔이 되셨고 중증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소하신 지 이태가 지났다. 이제 기일이 되어도 혼자 성묫길을 나선다. 26년 동안 함께 다니던 추억의 길이라 공허함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한두 달 전이었다. 어머니 기일을 좀 더 정성스럽게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떠오른 책,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 7~8년 전에 읽었는데 서너 대목들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의식 속에 깃든 격몽요결의 영향으로 기일 준비에 정성을 쏟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선후야 어떻든, 올해부터는 기제사를 드리자고 생각했다. 혼자 드리는 제사고 제수가 조촐하더라도 정성만은 특별하게 준비해야지! 마음을 정화하고자 율곡 선생의 말씀을 읽었다.

 

기제사를 지낼 때에는 산재(散齋)를 이틀 동안 하고 치재(致齋)를 하루 동안 한다. 산재란 무엇인가? () 술을 마셔 어지러운 데 이르지 않고, 모든 흉하고 더러운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치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난잡한 음악을 듣지 않고, 출입하지 않으며, 마음을 오직 제사 지낼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직 그분이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즐기시던 것을 생각함을 말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제사 때 그분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듯하며, 그분의 목소리를 귓가에 듣는 듯하여 정성이 나타나고 신이 와서 흠향하게 된다.” - 격몽요결, 제례장

 

제수를 준비하러 차를 타고 마트로 향하는 동안, 늘 듣던 음악 대신 어머니가 곧잘 들으시던 찬송 두 곡을 감상했다. 매주 예배를 드리신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끔 엄마랑 여동생이랑 셋이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때 불렀던 찬송가 중 기억하는 두 곡이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네.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실까? 이 물음에 가슴이 먹먹했다.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엄마가 무엇을 즐겨 드시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다. 언젠가 엄마 묘 앞에서 할머니께 여쭈었지만, 뜻밖의 답변에 할머니와 함께 웃었던 기억뿐이다. “니 어마이? 좋아하는 음식? 글쎄, 난도 잘 모르겠다.” 마트에서 과일을 이것저것 골라 담았다. 집에 돌아오고서야 단골 마트의 과일 맛이 별로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달리 아는 과일 가게도 없지만, 왠지 아쉬웠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기타를 챙겨 가야겠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찬송가를 불러 드려야지! 엄마 일기장도 가져가야겠다. 묘 앞에다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지! 왜 이제야 이런 생각들이 나는 걸까. 할머니와 함께했을 때도 한 번쯤 가져가서 당신이 좋아하시는 문주란 노래를 부르면 좋아하셨을 텐데. 어쩌면 내일은 두 몫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 그 엄마의 엄마가 없는 빈자리를 만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오늘에 걸쳐 손택의 에세이 <스타일에 대해>(1965)를 읽었다. 예술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임을 지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글이다. 형식이란 예술 장르마다의 고유한 표현양식을 말한다. 작가가 형식적 기술을 연마하여 자신만의 표현양식을 개척한다면 스타일을 갖게 된다. 스타일이 예술의 진정한 가치다. 손택은 말한다. 스타일이 없는 예술 작품은 있을 수 없다고. 예술작품에서 내용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예술이 아닌 진술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해석에 반대한다>(1964)에서 제기했던 통찰이다.

 

<스타일에 대해>는 예술의 본질을 더욱 파고든다. 스타일과 '스타일화'를 대조하여 분석하는가 하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비평가들의 착각을 일갈한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한다. 이에 해당되는 손택의 문장을 옮겨 둔다. 먼저 스타일화에 대하여.

 

"스타일화는 예술가가 작품 속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려 들 필요가 없는데 굳이 구분하려 드는 순간에 나타난다." 스타일화로 "야기되는 결과는 그 예술작품이 지나치게 편협하고 반복적이 되거나, 작품 곳곳에서 삐걱거리다가 작품 자체가 분열되거나, 둘 중 하나다. 오손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 후자의 본보기가 되겠다."

 

스타일화는 예술이 되지 못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흔적이다. 스타일화됐을 때에는 작품은 흥미로운 것이 된다. 여기서 흥미란 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의 개념이 아니다. 비꼬는 표현이다. 손택은 스타일의 예로 입체주의와 자코메티를 들면서 이유도 덧붙였다. "인간의 얼굴과 몸을 아무리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해도 그것은 얼굴과 몸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엔 예술작품을 진술문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그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예술작품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든 '현실'이지 예술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끌여들여 어느 정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느냐가 아닌 것이다."

 

손택은 거듭 강조한다. 예술 작품의 본질과 우리가 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예술작품의 고유한 특징은 개념적 지식을 창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p.46)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난다는 것은 특정한 경험을 얻는 것이지 어떤 문제의 해답을 듣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무언가이기도 하다."(p.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대체 이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청설모가 네 다리의 발톱으로 담벼락을 걸어 다니는 소리를 듣고 보았지만 문장으로 옮길 재간이 없다. 사각사각, 뿌지직뿌지직, 이 둘을 합한 어떤 표현이 있으려나?

 

이른 아침, 창밖에 청설모가 찾아왔다.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사각 뿌지직 소리가 들려 얼른 진원지로 추측되는 창으로 향했다. 녀석은 수직 절벽이나 다름없는 담벼락을 종횡무진 했다. 발자국 소리는 조용하진 않지만 요란스럽지도 않았다.

잠깐의 관찰에도 어떠한 균형이 느껴졌다. 거침없어 보이는데도 안전에 필요한 조심스러움은 갖춘 모습이랄까.

 

창을 사이에 두고 사뭇 다른 두 존재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청설모는 이내 방향을 돌려 저만치 벽으로 달리듯이 걸어갔다. 곧이어 폴짝 뛰어올랐다. 담벼락에서 나뭇가지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비행하듯 이동했다. 겨울의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비틀어진 고엽 몇 잎이 안쓰럽게 매달려 있었다.

녀석은 알까. 한겨울 추위를 무탈하게 나길 바랐던 내 마음을. 아마도 기우일 테지. 자연의 섭리가 있으니.

 

청설모의 취향을 몰라 나름의 예상으로 견과류를 창가에 놓아두었다. 새들도 곧잘 집어 먹는 반려견 사료도 나란히 놓았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식성이 같을까, 녀석들의 먹이는 어디에서 팔까 하는 유의 호기심도 창가에 함께 두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녀석이 산속으로 들어갔듯이.

 

창문을 열면 들어오려나? 행여 순식간에 잠입이라도 한다면 난리 나겠지? 오늘도 상상 만으로 그쳤지만 머릿속엔 주방과 거실로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큰일이야 나겠어,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리정돈에 대한 번거로움을 걱정한다.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기대감이 속삭였다. 언제 다시 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새해가 하얗게 시작되었다. 해가 바뀐 첫날 아침 눈이 내렸다. 이웃집 개들을 위해 테라스에 놓아둔 사료를 새 몇 마리가 날아와 재잘거리며 집어갔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눈 위에서 첫 끼니를 마친 새들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중에선 잔눈발이 하늘하늘 내려왔다. 곳곳이 하얀 세상이었다. 눈 내린 테라스, 마을에 난 찻길, 가가호호 지붕.

 

겨울나무는 가지마다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낭만적인 풍광이었다. 새들이 하얀색 도화지에 발자국 그림을 찍어놓았다. 이 앙증맞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새해를 맞았다. 내 삶에도 낭만적인 기쁨이 잦기를 소망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말이면 두 가지 일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일과 한 해를 돌아보는 일! 이 단순한 자각이 가슴을 친다. 혼자서는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없으며 나에게는 무엇이 중요한지 일깨운다.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 독서도 즐기고 싶지만 아무래도 연말엔 감사와 성찰의 실천이 절실해진다.

 

며칠 후면 새해를 맞는다. 연말에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졌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마지막 그날까지 정성을 다함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길이 최선이리라. 고마운 분들을 찾아뵈련다. 당신이 내어 주신 시간들을 맛난 음식과 따뜻한 대화로 채우고 싶다. 날마다 홀로 성찰해야지. 시간을 넉넉히 마련하여 한 해의 삶이 어떠했는지 돌아봐야겠다.

 

감사를 실천하면서 얻는 결실은 깊고 넓다. 행복에 젖어들 뿐만 아니라 영혼이 고양된다. 모든 감사가 영혼의 성장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감사는 자기만족적인 기쁨에서 머문다. 철학자 김영민은 감사 자체는 영혼과 별 상관이 없음을 통찰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를 감사로 되돌려 받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 다시 말해 감사의 빈곤을 넉넉히 삼켜서 만들어낸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젖줄이다.

 

성찰은 또 어떤가. 성찰을 통해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의 청사진을 발견하는가 하면 스스로를 엄정하게 성찰하면서 영혼을 살찌운다. 성찰한다고 해서 무조건 배우거나 매번 영혼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성찰은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거나 자기 합리화로 이끌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찰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나는 여기저기서 인생을 성찰하는 방법(역사의식)’을 얘기하곤 했다. 순차적으로 행하면 좋을 세 단계를 적어 둔다. 구체적인 설명은 다른 지면을 기약하면서.

 

첫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기술(記述).

둘째, 원인과 결과를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해석.

셋째, 자신의 바람과 가치관에 견주어 보는 평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하기 십상이고 실수와 불찰은 감추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인과관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다. 변명을 일삼는 K가 떠오른다. 그의 변명을 들으면 화도 나지만 때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신의 과오에 직면하여 성장할 기회를 변명을 늘어놓음으로 놓치는 것 같아서다.

 

저 융숭 깊은 철학자는 변명하는 이들에게 가차 없는 일갈을 날린다. “변명은 해명도 설명도 공명도, 그리고 사람의 숙명도 아니다. 흔한 말처럼 불안이 아니라 변명이 영혼을 갉아먹는다.”(김영민, 자본과 영혼, 글항아리, p.71) 자본주의를 포함한 권력 체제 일반이 변명의 시스템이라는 통찰도 던진다. 덕분에 MB를 비롯한 파렴치한 권력자들의 한 유형을 깨닫는다.

 

선생의 통찰은 절실한 교훈을 안겼다. 나에게 12월이란, 감사를 전하고 성찰을 행하고픈 계절이기에 그렇다. 헤르만 헤세는 어린아이의 특징 중 하나가 감사할 줄 모르거나 감사를 빨리 잊어버리는 모습이라고 썼다. 그가 옳을 것이다. 어른이라면 보답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사하리라. 그런 감사는 드물다. 가끔씩 만나는 어른아이를 넉넉히 이해하는 정신 그리고 자기변명을 삼켜내는 엄정함에서, 영혼이 성장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