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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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 우연히 너를 만났다.
네가 들고 있던 두 권의 책 사이로 너덜너덜해진 시집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어떤 시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 펼쳤다.
<매화>라는 시가 보였다.
때는 봄, 따뜻한 햇살,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맘이 간절하던 시간.

매화꽃이 피면/그대 오신다고 하기에/매화더러 피지 마라고 했어요/그냥, 지금처럼/피우려고만 하라구요

핫, 이런!
페이지를 넘겼다.

내 안/어느 곳에/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워졌답니다/그 밤/그곳/그대/앞에서 <만화방창>

봄이 시집 속에 들어 있었다.
대뜸 너에게 말했다. 이 시집 나 줘라.
네가 말했지. 어디 시를 한번 읽어 봐!
못할까봐? 읽어주었다. 그리고 시집은 내 것이 되었다.
앞 장엔 "드림"이라는 오래된 도장이 박혀 있었다.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앉아 놀다가 한줄기 바람에 날려 흐르는 물에 떨어져 멀리멀리 흘러가버리든가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오래오래 앉아 놀다가 산에 잎 다 지고 나면 늦가을 햇살 받아 바삭바삭 바스라지든가/그도 저도 아니면/우리 둘이 똑같이 물들어/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버리든가  <환장>

퇴근길,
봄이 왔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괜히 속상한 맘.
인간은 누구나 혼자라는데… 그럼에도 서러움이 울컥.
허나 그것도 잠시, 시집을 펼치니 모든 게 잊힌다.

잎이 필 때 사랑했네/바람 불 때 사랑했네/물들 때 사랑했네/빈 가지, 언 손으로/사랑을 찾아/추운 허공을 헤맸네/내가 죽을 때까지/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그래서 당신>

잊히긴 하는데… 짧은 시들이 자꾸만 내 맘을 콕콕 찔렀다.
내가, 지금, 왜, 갑자기, 이 시들에게 맘을 찔리고 있는 거지?
의문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콕콕.
마치 아프라고 일부러 그러는 듯이 콕콕.

바람이 불면/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  <그리움>

그리움 때문?! 그렇다면,
속절없이 찔릴 수밖에.

그래, 알았어/그래, 그럴게/나도...... 응/그래  <달>

결국 눈앞이 흐릿흐릿,
에잇, 뭐 이딴 시가 다 있어 하면서도 시집을 덮을 수가 없었다.
버스는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과거를 달리고 있었다.

봄비 오는 날 뭐 한다요/책을 보다 밖을 보면 비가 오고/비에 마음을 빼앗겨/넋을 놓고/비를 보다/비 따라가던/마음이 문득 돌아오면 다시 책을 봅니다/그러다가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움직여 도로 그리 간답니다/시방 뭐 하시는지요/나는 오늘 혼자 놉니다/비를 보며, 때로 바람 다라 심란하게 흩날리는 비를 보며/혼자 놉니다/선암사 홍매가 피어나는지/선암사 홍매가 피는지/선암사 홍매가 피어버렸는지/자꾸 선암사 홍매가 궁금합니다/이끼 낀 가지 끝에 붉은 이슬처럼 맺힌/홍매를 생각하며/빗방울을 따라가다보면 빗방울들이 땅에/툭툭 떨어져 부서지며 튀어오릅니다/산이 적막하고/나도 적막하고/물이 고요하고/나도 고요합니다/고요한 마음에 피는 선암사 홍맷빛이 내 마음에 물결처럼/일어납니다/일었답니다/내 마음이 자꾸 그리 갑니다/가는 마음 붙잡아 되돌려 앉혀놓아도/마음은 자꾸 그리 달아납니다/그립고 보고 싶습니다/선암사 홍매는 한 잎 두 잎 꺼져도/내 마음에 일어난 그리운 꽃빛은 언제나 꺼질지/나는 모른답니다/나도 모른답니다 <편지>

모든 지나가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혼자 기억하고 돌아본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 그러니
서러워할 필요도, 눈물 흘릴 이유도, 가슴 아플 까닭은 더더욱 없.다.

봄은
그렇게
지나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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