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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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동양고전 혹은 한국고전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한 동양고전들은 오히려 낯설기만하고 어렵게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능력있는 번역가에, 다양한 번역서가 있는 서양고전에 비해 동양고전 혹은 한국고전은 읽기가 부담스럽게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나 혹은 부실한 번역이 많아 읽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가급적 동양고전을 읽을 생각이다. 몇 권을 읽고 나니 이제는 내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눈이 생겼다.

어쨌든 징비록은 여러 번 읽으려고 항상 보관함 1순위에 올려놓았던 책이다. 교수님의  추천도 있었고 또한 남북전쟁이니 백일전쟁이니 서양전쟁사에는 익숙하면서도 우리의 역사인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났다는 것과 이순신 장군 정도가 정보의 전부인 나 자신이 갑작스레 부끄러워져서 급히 읽게 된 책이다.

읽고 난 소감이라면.. 뭐랄까? 답답함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역사는 돌고 돈다는데 그 말을 실감해야 했다고 하나?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많은 부조리와 어려움 속에서도 정도를 걷고 지금 현재보다 후세를 생각하는 선경지명을 가진 유성룡이라는 위인을 알게 됐다는 감격도 함께 느꼈다.

솔직히 읽을 때는 많은 생각을 하고 느끼기도 했는데 막상 그것을 글로 적으려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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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al (더 골)
엘리 골드렛 외 지음, 김일운 외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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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방학 때 밤을 새면서 읽은 책이다. 과제도서였다거나 시험을 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날 저녁식사 끝날 때쯤 택배로 온 책이었는데 자기 전에 잠깐 훑어 본다는 것이 그만..^^

그만큼 재미있다. 소설책이긴 하지만 미학적, 문학적 가치는 사실 떨어진다. 예민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오탈자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참고로 동양문고에서 나오는 책은 대체로 오탈자가 너무 많다. 뭐 나 역시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책이라는 것은 최소한 오탈자 및 문맥이 어색한 글은 걸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영이론을 쉽게 소설의 형식으로 썼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거기에 추리소설같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책은 폐쇄 위기에 봉착한 한 공장의 공장장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공장을 지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다가 저자를 상징하는 한 교수를 만나 조언을 구하며 저자의 이론인 제약이론을 습득해 뛰어난 공장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골자이다.

사실 해당이론을 자세히 배운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이 들어와서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나 원가관리 교수님께서 강조한 ABC 기법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제약이론이 마치 저자의 독창적인 이론인 듯 이야기하지만 도요타의 TPS와 근본개념은 차이가 없다고 본다. 마치 80년대 일본 기업의 약진으로 인해 미국 기업들이 자신의 체질 개선의 일환으로 lean 생산방식, TQM, 리스트럭처링 등등을 수행했지만 그것 역시 근본은 TPS이고 어떤 면에서 진정한 TPS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혹은 일부만 차용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기업에 맞춘 변형된 TPS였듯이 이 책에 나타난 제약이론 역시 TPS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물론 이것 역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학문의 깊이가 얕아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제약이론에 대한 이해 ABC 또는 ABM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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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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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소설의 대표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이 책을 읽고 사실 어떻게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보다도 제목에서까지 강조한 고독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데 왠지 막상 그 뜻을 설명하려고만 하면 어려운 단어가 있다. 정체성, 고독 등이 그런 단어가 아닐까?

문학적인 가치를 따지자면 흔히들 마술적 사실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런 이론에는 정통하지도 않고 또 별로 관심도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하지만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힌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결정론적 관점에는 한번쯤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고독의 의미는 벗어날 수 없는 결정론적 운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렸다.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비추었듯이 마르케스 역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가문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고독을 또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닐까?

솔직히 이 책을 읽는 내내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보다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호기심과 즐거움과 슬픔으로 가슴이 꽉 차올랐다. 그러나 다 읽은 후 느낀 것은 뭔지 모르겠는 복잡한 생각과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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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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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을 읽고 바로 읽은 중남미 소설이다. <백년의 고독>이 정말 재미있기는 했지만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또 이름도 비슷비슷해 혼란스러웠던 것에 반해 <거미 여인의 키스>는 등장인물이 단 두 명이었다는 점에서 읽기가 편했다.

물론 등장인물이 적었다는 것만이 쉽게 읽었던 이유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서술방식이 다른 소설과는 달랐기 때문인 듯싶다.

<거미 연인의 키스>는 마츠시모 혹은 마치즘으로 대변되는 게릴라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게이가 한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 나눈 대화 이야기다. 게릴라는 정치적으로 맑시즘을 신봉하며 유물론자이고 신념이 투철하며 자기 통제가 철저한 사람이다. 반면 게이는 무척이나 낭만적이며 감정에 충실하다. 이 서로 성격과 성향이 극과 극인 두 인물이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된 이유는 교도소장이 정치범인 게릴라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유아성추행으로 잡힌 게이를 같은 감방에 이감시킨 것이다. 그러나 게이를 통해 게릴라의 정보를 캐려는 교도소장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오히려 게이와 게릴라는 함께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 둘의 대화에서 영화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듯싶다. 게이가 게릴라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시작한 것이 지루한 감방에서의 시간을 때운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예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게릴라에게 해 주는 것이었다. 영화는 게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고 게이와 게릴라의 대화의 수단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상징과 암시의 역할을 한다. 어쨌든 영화 이야기가 주는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할 작품인 것 같다.

중남미 소설 읽기 제2탄 격인 마누엘 푸익.. 1탄 격이었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함께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다. 그래! 이제는 이사벨 아옌데와 보르헤스다~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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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9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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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와 함께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소설기법을 훌륭히 소화했다고 평가받는 칠레의 여류 소설가, 페미니즘 작가이자 최초로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정말 재미있는 배경과 평가를 가진 작가다. 평가가 어떻든지간에 무엇보다 <영혼의 집>이란 소설을 들어 작가가 페미니즘 작가다 혹은 <영혼의 집>은 페미니즘 소설이란 말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다소간 페미니즘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요소를 전체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어쨌든 <영혼의 집>은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흐름이 빨라 지루해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트루에바 가문의 몰락과 함께 칠레의 근현대사를 함께 그리고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아옌데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글재주가 전혀 없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부러울 따름이다.

이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마치 신의 영역이 살아 있던 봉건제도의 시대와 신의 영역을 인간에게 가져온 모더니즘의 세계와 같이 <영혼의 집> 역시 마술과 전설 그리고 환상이 살아 있던 시대와 그러한 것이 사라진 시대로 나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두 세계가 어느 것이 특정하게 좋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설과 환상이 살아 있던 시대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 바로 전설과 환상이 사라진 합리성의 세계가 된 것이고 또한 합리성의 세계 역시 불완전한 시대였기에 불안과 불안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이 두 세계에 대해 진지하고 잔잔하게 그려낸다. 문제는 변증법적 역사와 같이 정과 반의 충돌 후 합의 세계를 그려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정과 반의 충돌까지만 그렸기에 그 후의 합의 세계는 역시 독자에게 남겨 두었다. 실제로 그 합의 세계가 오기는 쉽지 않았다. 칠레는 그 두 세계의 충돌로 한 독재자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입었고 예상컨대 그 상처를 치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치유된다 하더라도 혹 그 아픔의 기억을 잊는다 하더라도 그 흉터는 아마도 오랜 기간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이..

어쨌든 <영혼의 집>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오랜만에 부담감 없이 마냥 소설적 재미에 빠져본 책으로 기억에 남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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