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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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을 대충 훑어 읽었다. 물론 대충 훑어 읽을 가벼운 글은 아니지만 기타 다른 사회과학 책이나 여러 글들에서 혹은 개론서 등 이곳저곳에서 인용되고 설명된 것들이 많았기에 대충 어떤 주장인가만 확인하듯 읽었다. 무엇보다도 역시 맑스란 생각이 든다. 명쾌하고 특유의 비판 능력이 돋보였다.

특히 임노동에 관한 주장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칼 맑스의 임노동과 자본이란 소책자 역시 차후에 읽을 계획을 세웠다.

읽는 동안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부담스러웠다. 역시나 음밀한 곳에서 읽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맑스의 주장이 옳고 틀리고는 떠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맑스를 공부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구구단을 외지 않고 미적분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인한 기형적 학문 발전에 의해 맑스에 대한 공부란 금기사항이었고 따라서 현재 인문사회과학의 붕괴는 그 군사정권의 탄압에 기인한다.

어쨌든 맑스의 주장은 부분적이나마 오류가 있음은 틀림없으나 큰 주장의 틀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혹자는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를 맑스의 주장이 잘못됨을 밝히는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한낱 보수주의 또는 신자본주의자들의 음해에 불과하다. 실상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 내에서도 부분적으로 맑스가 제안한 공산주의적 제도를 수용하고도 있지만 이미 몰락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맑스가 예견했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맑스가 예견했던 공산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그 발전의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발전은 어렵고 그 속에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점이 점점 커져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아직도 자본주의 체제는 성장 중에 있음이 분명하고 따라서 기존에 나타났던 공산주의 국가는 맑스가 예견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결국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가 맑스의 논리가 잘못됨을 밝힐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붕괴 후 나타날 체제가 공산주의라는 맑스의 주장이 옳은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사실 난 아직도 맑스의 주장이 옳은지 또는 신맑시즘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안 선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와 견고해지는 지구화는 많은 문제점이 있고 또한 그 문제점으로 인하여 정의나 인권과 같은 것들의 실현과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확실시된다.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일부는 포스트모디즘이라는 하나의 사유현상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또는 거버넌스라는 공치 내지는 네트워크 통치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NGO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맑시즘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어떠한 해결이 가장 좋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학문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전반적이고 포괄적이며 논리적으로 탄탄히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맑시즘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듯 싶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사회과학을 한다는 사람에게 있어서 맑스는 꼭 한 번 넘어야할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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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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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었던 <우리 도시 예찬>은 도시로의 지향에 관한 책이었다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도시를 떠난 삶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니어링 부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그 니어링 부부 중 남편 스코트 니어링이 죽은 후 아내 헬렌 니어링이 스코트 니어링에 대한 기억을 적은 에세이다.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스코트 니어링을 제도권 교육에서는 배척했지만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 평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진리를 향한 끝없는 열정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또한 우리 삶의 모습들이 그동안 소비 문화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있었던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진정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자기의 삶에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고 그 소비 역시 자신의 땀흘림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과격한 사회주의라고 배격하는 이들도 있으나 사회주의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 혹은 지위가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가 우리 삶에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다. 만일 그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일지라도 -실제로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라고 하는 편이 옳은듯 싶다.- 그의 사상이 사회주의라고 배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사회주의가 우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보다 정의로운 것이라면 그 사회주의란 마땅히 환영될 사상이다. 그런 뜻에서 난 니어링의 사상에 동의를 한다.

지난 한해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우리의 식생활은 물론 주거환경까지 웰빙이라는 단어가 침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새집 증후군과 같이 기존에 익숙해 오던 도시 주거 환경에 대한 협오감까지 나타났는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원주택이라는 것이 많이 부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와 함께 귀농현상과 그에 대한 미디어의 부각은 바로 주거환경에 대한 신웰빙(Neo Well-being)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나타난 니어링 부부의 삶이 우리나라에서 재탄생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미디어에서 부각시키고 있고 또한 마치 유행처럼 일고 있는 전원주택과 귀농현상은 웰빙이라는 생활패턴의 한 양식일뿐 니어링 부부가 제시하는 조화로운 삶(Good Life)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왜냐하면 웰빙은 기본적으로 잘사는 법이라고 직역되는 그래서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삶에 대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즉 웰빙은 삶의 양식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혹은 상류층이 되기 위해 혹은 권력을 잡기 위해라는 기존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고 편하기 위한 기준으로 그 방법에는 역시 자본주의 경제하에 축적된 자본의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Good Life)는 이 웰빙과 다르다. 행복은 조화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으며 조화로운 삶은 생존을 위한 소비는 조화로운 삶을 깨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소비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떠났고 그들의 소비는 자신들이 먹고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먹을거리 대부분을 자신의 텃밭에서 구하고 또한 육식을 포기한다. 옷이나 기타 직접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은 자신의 텃밭에서 기른 갖가지 채소를 장에 팔아 그 돈으로 교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같은 삶은 근본적으로 웰빙과 다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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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 문화마당 4-009 (구) 문지 스펙트럼 9
정과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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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리가 각종 잡지 등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란다. 주로 <씨네21>과 <How PC>에 게재한 글들이어서인지 소재 및 주제들이 문화라던가 컴퓨터 문화에 한정되어 있다.

글이 짧기도 했지만 글 자체가 좋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누가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문 읽기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정과리의 주장들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또한 우월의식에 빠져 있어 자신과 같이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거부감을 준다. 가진 자의 논리 또는 배운 자의 논리 즉, 기득권의 논리가 강하게 배어나온다는 얘기다. 물론 진리란 기득권에게만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득권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말 옳은 소리인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변명인지는 잘 구분해야 할 듯 싶다. 또한 현실을 무시한 채 현학적 말 놀이에 빠져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정과리의 주장들이 현실과 담을 쌓은 채 자신만의 말싸움을 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사실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의 주장은 항상 논쟁의 거리에서 한발짝 물러서 타인의 비판에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 마치 먼 발치에서 불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불 끄는 것에는 팔짱끼고 외면한 채 불끄는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처럼.. 혹 불똥이 튀면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그는 언제나 논쟁의 장에서 멀찌감치 물러선 채 자신의 말을 대변할 사람을 지원 사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혹 한참이 지난 후 그 논쟁과 다른 논쟁에서는 그 전의 논조와 상반되는 그런 논리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정과리는 우리나라 90년대를 대표하는 비평가임엔 틀림없다. 그 비평의 중심에 <문명의 배꼽>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약간은 실망스럽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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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우리도시 예찬 - 그 동네 그 도시의 매력을 찾아서
김진애 지음 / 안그라픽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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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 예찬>이란 책을 읽었다. 건축가의 눈으로 본 우리나라 도시의 여러 모습들을 엮은 책이다. 여행기처럼 해당 도시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도 또 수필처럼 삶에 대한 성찰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잔잔하게 스며든 저자의 우리나라 도시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요즘 귀농이니 전원주택이니 하는 것이 큰 인기를 끌기는 하나 난 아직 도시가 좋다. 우선 도시가 주는 다양성과 살아 있는 생명력이 난 좋다. 내 고향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것이 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만의 특성은 아니겠지만 노인들만 가득하고 어제, 오늘, 내일 똑같은 시골은 나에게 답답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도시의 무질서, 몰인정을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는 도시가 주는 긍정적인 면에 비하면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시에 애정을 갖고 있기에 도시의 부작용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도시인이다. 도시가 주는 자유로움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한술 더 떠 해외의 모범도시가 주는 갑갑함에 질린 반면 우리나라의 도시들에 희망과 애정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쩜 서구 혹은 해외에 대한 막연한 컴플렉스에 빠져 우리를 너무 작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러 문학작품에 아름답게 등장하는 강이나 혹은 다리와 같은 것들을 직접 가보면 아름답기는커녕 흙탕물이거나 강의 크기가 우리네 조그만 개천과 같은 조그만 규모이거나 우리네 동네에서도 흔하게 볼수 있는 정도의 시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히 서구의 작품에 취해 실제보다 크게 보거나 위대하게 보아 우리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 도시 예찬>은 바로 우리네 도시에 대한 성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것을 바라보는 성찰이 국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본 후 매력을 찾아냈을 뿐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좋다란 단순하고 위험한 공식에 빠지지 않는다.

나 신토불이란 말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신토불이란 말은 어떤 근거도 없는 감정과 직관에 호소한 하나의 싸구려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호는 곧 인간을 단순화시킨다. 또한 막연한 애국심과 거친 민족주의에 빠지게 한다. 심지어는 국수주의에 빠지게 한다. 심하게는 민족우월주의에 빠지게 한다. 우리 도시 예찬이 잘 씌어진 이유는 이런 싸구려 구호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것에 대한 단점을 알지만 또한 잊고 있거나 보이지 않았던 장점을 나열했을 뿐 억지로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간날 때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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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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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레퀴엠>을 읽다. 레퀴엠은 원래 장송곡을 뜻하는 말로 책에서는 전쟁에 대한 부조리와 또한 미군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비판을 포괄적으로 뜻한다. 글을 쓴 형태는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밴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이라는 종교음악의 형식을 빌려 책의 앞과 뒷장을 제외한 가운데 여섯 개의 장은 브리튼이 쓴 곡의 목차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 글의 구성 형식의 특징으로 인해 글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나 진중권식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세심한 문체와 또한 철저하게 독자의 편의를 위한 정성이 느껴지는 글은 진중권의 글이 가지는 매력이리라..

그러나 이 진중권의 글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글의 곳곳에 숨어 있는 위트다. 재미있으나 천박하지 않은 위트는 진중권의 사람됨을 그리고 녹록치 않는 필력을 느끼게 한다.

예 1>

< 이런 참극 앞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이 태연히 "미국의 전쟁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이다. 이 해괴한 감성을 가진 문인은 한때 '영어 공용화론'으로 사회를 시끄럽게 한 후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아직까지 한글로 책을 쓰고 있는 복거일 씨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그의 헛고리를 민족어로 들어야 하나?>

나만 재밌었나? 사실 난 정치나 이런 사회적 담론을 코미디 이상으로 재미있어 한다. 얼마 전 한나라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에게 대정부질문 중 북한 헌법을 아느냐고 묻자 장관이 머뭇거렸다. 다시 재차 북한 헌법을 모르냐 어떻게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우리의 주적인 북한 헌법에 대해 모를 수 있느냐 공세를 취했다. 당황한 그리고 불쌍한 우리 법무부 장관.. 그때 열린 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말한다. <북한 헌법을 공부하면 그거 국보법에 걸려요. 그래서 법무부 장관으로써 공부 못한 거에요. 근데 북한 헌법을 아냐고 물으면 되나요?>

-참고1 :기억으로는 법무부 장관이었는데 정확하진 않다. 통일부 장관이었나?

-참고2 : 한나라당은 국보법폐지를 반대하고 열린우리당은 국보법폐지를 주장함. 따라서 유시민 의원의 말은 한나라당의 이중적 잣대를 비꼰 말.

어쨌든 사실 정치며 이라크 전쟁이며 이러한 논의들은 그 엄청난 진지함에 가슴이 무겁고 때론 두통까지 일으키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하여 그냥 넘어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철저히 고민하고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이런 난감할 때가.. 철저히 고민해야 하는 문제지만 그만큼 무겁고 피하고 싶은 주제라.. 방법은 바로 풍자와 위트다. 풍자와 위트는 이런 진지한 논의를 부드럽게 만들뿐 아니라 많은 대중의 참여를 유발한다. 또한 가장 간결하고 가장 직선적으로 상대의 논리적 오류를 재치 있게 낱낱이 밝히게 한다. 진중권의 <레퀴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란 책이 바로 그러한 책이 아닐까 한다.

이라크 전쟁 그리고 파병, 국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과 자기 위안.. 진중권은 그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에게.. 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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