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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 문화마당 4-009 ㅣ (구) 문지 스펙트럼 9
정과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1월
평점 :
정과리가 각종 잡지 등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란다. 주로 <씨네21>과 <How PC>에 게재한 글들이어서인지 소재 및 주제들이 문화라던가 컴퓨터 문화에 한정되어 있다.
글이 짧기도 했지만 글 자체가 좋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누가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문 읽기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정과리의 주장들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또한 우월의식에 빠져 있어 자신과 같이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거부감을 준다. 가진 자의 논리 또는 배운 자의 논리 즉, 기득권의 논리가 강하게 배어나온다는 얘기다. 물론 진리란 기득권에게만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득권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말 옳은 소리인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변명인지는 잘 구분해야 할 듯 싶다. 또한 현실을 무시한 채 현학적 말 놀이에 빠져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정과리의 주장들이 현실과 담을 쌓은 채 자신만의 말싸움을 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사실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의 주장은 항상 논쟁의 거리에서 한발짝 물러서 타인의 비판에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 마치 먼 발치에서 불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불 끄는 것에는 팔짱끼고 외면한 채 불끄는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처럼.. 혹 불똥이 튀면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그는 언제나 논쟁의 장에서 멀찌감치 물러선 채 자신의 말을 대변할 사람을 지원 사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혹 한참이 지난 후 그 논쟁과 다른 논쟁에서는 그 전의 논조와 상반되는 그런 논리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정과리는 우리나라 90년대를 대표하는 비평가임엔 틀림없다. 그 비평의 중심에 <문명의 배꼽>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약간은 실망스럽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