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코담배케이스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9
존 딕슨 카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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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닐은 네드 애트우드와 소송 끝에 이혼한다. 소송 이유는 네드가 어떤 유명한 여자 테니스 선수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이브 닐은 은행원 토비 로스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로스 일가는 이브 닐이 살고 있는 저택 맞은 편에 살았는데, 모두 온화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네드 애트우드가 이브 닐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네드는 이브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는데, 최근 그녀가 토비 로스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몰래 보관하고 있떤 이브의 집 열쇠를 이용해 그녀의 방에 침입했고, 어떻게든 그녀의 몸을 다시 차지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이브는 길 건너편의 로스 일가에서 네드의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자신이 추문에 휩싸이게 되리라 생각하여 곤란해 한다. 게다가 로스의 아버지 모리스 경이 코담배케이스를 들여다보며 깨어 있다고 네드가 이야기하자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둘은 옥신각신 '나가라', '싫다' 해가며 다퉜는데 시끄럽게 싸울 수도 없었던 것이, 이베트라는 음흉한 하녀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 함부로 입을 놀려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브는 네드에게 겁탈 당하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때, 토비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이브가 전화를 받자 네드 역시 조금 진정이 되었다. 게다가 토비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브의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건너편 창으로 모리스 경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광경이 보인다. 그는 죽은 것 같았다. 네드가 놀라는 사이 이브도 건녀편 창을 보게 된다. 그녀는 불을 끄고 나가는 가죽 장갑만을 본다. 살인이 일어난 것 같았다.

네드가 부랴부랴 집 밖으로 나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 과정에서 뇌진탕을 입고 코피를 흘린다. 이브의 잠옷 허리띠에 피가 묻는다. 뒷문으로 네드를 쫓아버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던 이브는 문이 잠겼음을 알게 된다. 이베트 짓이 분명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네드에게서 돌려받은 열쇠를 이용해 앞문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피가 묻은 허리띠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얼마 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출동한다. 이브 닐의 허리띠를 경찰이 발견하여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코담배케이스가 깨지면서 생긴 보석 파편이 그녀의 허리띠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밀실살인의 대가 존 딕슨 카의 또 다른 필명은 카터 딕슨이다. 로저 페어반이라는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영국인 아내와 결혼해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국 작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데뷔작은 <밤에 걷다 It Walks by Night,1930>인데 평이 대단히 좋아서 초판 5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 뒤로 존경하는 GK.체스터튼의 가르침을 받으며 밀실살인을 주제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고, 때로 신비주의와 괴기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들도 발표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브의 잠옷 허리띠에 코담배케이스가 깨지면서 생긴 보석 파편이 묻어 있었을까?' 이다. 이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해답은 '네드가 묻혀왔기 때문이다'이고, 따라서 당연히 범인도 네드가 될 것이다.

문제는 '네드와 이브는 같이 있었는데 모리스를 살해할 수 있었는가' 이다. 따라서 '암시의 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브는 모리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네드가 이브에게 '모리스씨가 코담배케이스를 조사해보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이 본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네드의 이 완벽한 계획은 킨로스 박사에 의해 파해된다. 코담배케이스가 사실은 시계처럼 생겼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이 물건을 보고 선뜻 코담배케이스라고 말한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즉, 네드는 어디선가 이 물건을 미리 보았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자신의 사전지식 덕분에 '시계'가 아닌 '코담배케이스' 라고 이브에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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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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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망생인 다카미 료이치에게 편집자 후나이 신이 접근하여 기이한 제안을 한다.


자진해서 누명을 쓰고 경찰에 잡혀 들어간 뒤 혹독한 취조를 받고 살인범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재판 직전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하여 무죄방면된 뒤 한편의 훌륭한 논픽션을 써낸다.


다카미 료이치는 존 하워드 그리핀의 <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나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신사협정>과 같은 작품을 자신이 쓸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는다. 게다가 다카미에게는 매스컴에 의해 잔인한게 난도질 당한 경험도 있었다.

다카미의 아버지 미쓰오키는 약간 이름이 알려진 정신과 의사이자 임상심리학자였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미쓰오키가 최면요법을 실행한 젊은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매스컴은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개나 주라는 태도를 취하며 미쓰오키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미쓰오키는 자살하고 만다. 나중에 그의 결백이 밝혀졌지만 매스컴은 미쓰오키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카미 료이치는 자신이 논픽션 작업에 참가해 훌륭한 작품을 써낸다면 아버지의 사건으로 생긴 울분도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뒤, 다카미 료이치는 후나이 신의 시나리오에 따라 가짜 살인범이 되기 위한 작업에 참가한다. 후나이신은 다카미 료이치의 피에 방사선을 조사하고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등의 복잡한 작업을 거쳐 그의 DNA 구조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의 무리들에게 살인 현장으로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도록 유도해 목격자를 확보한 뒤 경찰이 자연스럽게 다카미 료이치를 유력 용의자로 추적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드디어 다카미는 경찰에게 체포된다. 경찰은 다카미를 용의자가 아닌 살인범으로 취급하고, 혹독한 취조가 이어진다. 마침내 다카미의 정신이 서서히 무너지고, 다카미는 후나이 신과 자신의 계획을 발설하며 무죄를 주장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후나이 신은 행방불명이 되고, 가짜 살인 사건 과는 전혀 무관한 과거의 살인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게다가 당시 살해당한 여성의 몸에서 발견된 체액의 DNA가 다카미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결과가 발표된다. 무죄를 증명해줄 장치들이 모두 제거되어 버린 지금, 이제 다카미는 살인범으로 처형받게 되었다.

유일하게 믿을 것은 일본에서 다시 시행되게 된 배심원 제도. 그러나 그 배심원 제도는 과연 다카미를 누명에서 벗겨줄 것인가? 게다가 배심원 제도를 무력화 시키려 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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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다시 배심원 제도가 시행된다는 가정 하에 쓰여진 소설인데 전달하려는 바도 명확하고 사건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검찰들의 부패와 전관 예우와 관련해서 꽤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전관이 벌어들인 수임료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몇백 억원에 달했다'는 놀라운 뉴스가 보도 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관이 변호사가 되어 사건을 맡으면 구속을 불구속으로, 유죄를 무죄로 만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관 예우를 위해 검찰들은 가급적 현직에 있을 때 불구속 수사 보다는 구속 수사를 남발한다고 한다. 자신들의 미래, 즉 전관들이 구속을 불구속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라는 것이다. 

의사나 검사들 처럼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집단도 없다. 의사가 영어로 처방전에 끊임없이 악필로 끄적이는 것은 단지 기침, 콧물, 가래 같은 단순한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방전에 알기 어려운 말을 끄적인다. 검찰들의 공소장에는 언제 통용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는 해괴한 한자 조어들을 가득 사용해 문장을 만들어 낸다. 그 문장들은 뜻이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법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용어를 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어려운 코드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고자 한다.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거짓된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면 자신들이 벌어 들이는 막대한 돈이 정당화 된다고 믿는 듯 하다.

그런데 전문성은 많은 헛점을 갖게 마련이다. 전문성의 영역에서 그들끼리만 교류하다 보면 일반인의 정서와는 무관한 판단을 당연하다고 오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 과학적으로 틀림없어 보이는 사실도 통계의 오류에 불과할 때도 있다.

작가는 이 점을 철저히 파고 들어 DNA 판별법이 과연 '인간지문'과 같은 수식어를 달고 무오류를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또한 배심원 제도를 통해 일반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재판 결과야 말로 보다 오류 없는 판결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배심원 제도는 전혀 다른 양상의 재판장 풍경을 연출한다. 검사는 더 이상 자신들만 아는 알쏭달쏭한 논리와 단어로 대충 재판을 끌어갈 수가 없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들을 설득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유죄임을 입증해 내야 한다. 만약에 '의심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유죄가 아닌 무죄가 될 것이다.


다카미는 결국 유죄가 되어도, 무죄가 되어도 좋은 희생양에 불과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배심원 제도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다카미가 무죄라는 증거를 내놓으며 '배심원 제도가 무고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들었다'고 떠들 작정이었다. 한편, 무죄 판결을 받으면 이번에는 거꾸로 다른 사건에서 유죄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판결 전에 사건 현장을 가보았기 때문에 판결 자체가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써 슬기롭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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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초상
그레이엄 그린 / 동문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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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영국 남부 버크햄스테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이엄 그린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버크햄스테드 스쿨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자퇴사유서를 남긴 채 학교에서 도망친다. 가족들은 그의 일탈 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고 6개월간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데, 그때 그레이엄 그린을 담당한 의사가 글쓰기를 권하였다고 한다.

18세에는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6주만에 탈퇴하고, 옥스퍼드 졸업 후에는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런던 타임즈에서 잠시 근무하다 1929년 <내부의 나>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본격소설과 대중소설로 구분지었는데, 본격소설에서는 신과 종교, 그리고 인간 본성 등의 철학적 주제를 탐구하였고 대중소설에서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스파이 소설류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에 스파이 소설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통찰력이 엿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기억의 초상, 원제 The Captain and the Enemy>은 1988년 10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작가가 1991년 4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 작품이 그레이엄 그린이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다소 기이하다. 열두 살 때 자칭 아버지의 친구가 학교로 '나'를 찾아온다. 그는 아버지와 게임을 해서 이겼기 때문에 '나'를 데리러 왔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나'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모와 살고 있었다. '나'는 당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기꺼이 '아버지의 친구'라는 대위를 따라 나선다. 대위는 철거 직전의 허름한 건물 지하실로 '나'를 데려가서 리자라는 여인에게 소개하며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시킨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대위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리자는 '나'의 아버지가 몸을 버려 놓은 후 차 버린 여자였다. '나'의 아버지는 임신한 리자를 윽박질러 유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때의 후유증으로 리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다. 그 즈음 '대위'가 리자를 만나 한 눈에 반한다. '대위'는 이런저런 사기 행각으로 먹고 살았는데, 리자에게만은 듬직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를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리자에게 데려간 것도 말하자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대위'는 사기를 쳐서 먹고 살았기 때문에 리자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고, 언제 잡혀갈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자는 아이를 무척 원했으므로 '나'를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리자에게 데려 가 아들처럼 키우게 하면 외로움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뒤로 리자와 '나'는 '대위'를 기다리는 생활을 한다. 대위는 이런 저런 사건들을 일으켜 경찰의 추적을 당하면서도 리자와 나에게 비교적 충실히 생활비를 보내온다.

'내'가 성년이 된 후의 어느 날, 대위가 파나마로 건너 갔다면서 큰 액수의 수표를 보내온다. '나'는 이미 성년이 되어 리자를 떠난 지 오래였고, 리자는 최근 교통사고가 나서 사망한 뒤였다. '나'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대위를 만나러 파나마로 떠난다. 한동안은 대위에게 리자가 죽은 사실을 숨길 수 있었지만 결국은 모든 사실이 들통난다. 대위는 리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의 삶도 끝났다는 듯 모든 것을 챙겨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가다가 소모사와 군부에 의해 격추 당한다. '나' 역시 공항으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다. 모든 사고의 뒤에는 CIA와 결탁한 것으로 의심되는 퀴글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하지만 리자와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의지해 온 사람은 바로 이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라고 상상하는 바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대위였다.


이 문구는 왠지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 에 삽입된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77711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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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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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무너지던 1995년 무렵을 일단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 시대의 출발로, 경제적으로는 개발독재가 종언을 고하면서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되는 시기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사회 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의 머릿속에서만 형성되어온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는데, 백화점에 매몰된 박선녀라는 이름의 룸싸롱 마담, 일본군대에 충성을 다하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에 충성을 다하면서 한몫 잡는 김진, 청와대의 강남 개발 계획에 맞춰 모래땅을 몇바퀴씩 돌리며 땅값을 뻥튀기 해 한 몫 챙기는 심남수, 광주에서 주먹으로 일어나 서울 조폭계를 평정해 한 시대를 풍미하는 홍양태와 강은촌, 그리고 지금은 성남이 된 광주 단지에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애를 쓰는 부부와 그들의 딸 임정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느 시점에서인가 서로를 잠깐씩 스쳐 간다. 그들의 에피소드를 담담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마치 한국사회가 파국을 맞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95년도는 묵시록 같은 한 해였다. 그 해, 동아리 신입생 중에 서초동에 사는 친구가 가입을 했다. 게다가 그 친구의 아버지는 국방부 고위간부였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후배는 우리 동아리의 이름을 잘 못 알고 있었다. 역사 동아리인줄로 알고 가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왠일인지 제대로 된 이름을 알고도 탈퇴 하지는 않았다. 

그 해 어느 날, 뉴스에서 분홍색 백화점이 거짓말처럼 무너지는 장면이 방송 되었다. 그 친구는 다급하게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가끔 가는 백화점이라고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집에 계셨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니까 뉴스 속 백화점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다리도 무너지고 대구에서 가스도 폭발했다. 발전만 외치면서 대충대충 덮어 왔던 것들이 한계에 다달아 여기 저기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재벌들이 형성된 과정이 서양의 역사와 어떻게 다른지 독특한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서양의 부르조아지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얻기 위해 봉건지주 및 왕권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고, 피의 혁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쟁취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에 실천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이 깃들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 재벌들은 일제시대 때 땅부자가 별다른 저항 없이 부패한 정권과 결탁하여 독점 재벌이 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이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봉건지주적 양태를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사회구성체 논쟁이 얼핏 떠오르면서 약간의 반발도 들었지만, 일견 공감가는 대목도 있었다.


교육부 관료가 '민중은 개, 돼지'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그 역시 '개, 돼지' 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도, 상부구조의 수호자를 자처하다 보니 의식은 재벌의 그것을 탑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관료는 발언 직후 자신을 쉴드 쳐주는 자들이 없다는 데에 매우 당혹해 하며 자신 역시 '개, 돼지' 였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착찹한 심사가 한동안 먼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일정 주기가 되면 그의 소설을 찾게 된다. 착찹해 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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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만찬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2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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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의 여배우 제인 윌킨슨이 포와로에게 색다른 의뢰를 하는데, 그 내용은 '남편 에지웨어 경과 이혼할 수 있도록 에지웨어 경을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인 윌킨슨은 머튼 공작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에지웨어 경이 이혼해 주지 않아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포와로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라 생각하여 에지웨어 경을 만나 보기로 한다. 그런데 에지웨어 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이미 6개월 전에 제인 윌킨슨에게 '이혼해주겠다'는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의아해하며 돌아온 포와로는 다음 날, 에지웨어 경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비서와 집사는 제인 윌킨슨 양이 택시를 타고 와서 에지웨어 경을 살해한 뒤 돌아갔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곧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이 나오는데, 제인 윌킨슨은 에지웨어 경이 살해된 시각에 13명의 손님들과 만찬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제인과 비슷하게 생긴 용모로 제인을 흉내내는 칼로타라는 여배우가 용의 선상에 오른다. 하지만 칼로타 역시 베로날 과용으로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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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만찬> 역시 '알고 보니 그랬다더라'와 산만한 구성이 조합되어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크리스티의 작품 중 몇몇 작품은 뛰어나지만, 크리스티가 A급 추리소설가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수수께끼 풀이 게임을 독자와 공정하게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난이 극에 달한 작품이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이다. 원작은 <Lord Edgware Dies>이고, 최근에 출판된 책은 <에지웨어경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사건의 실상은 이렇다. 제인 윌킨슨은 머튼 공작과 결혼하여 부와 명예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머튼 공작은 남편이 죽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매우 보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에지웨어 경이 '이혼해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온다.

제인 윌킨슨은 이미 에지웨어 경을 살해할 궁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지 않은 것으로 한다. 그녀는 에지웨어 경이 이혼해주지 않아 화가 난다는 듯이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다. 그렇게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면 오히려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제인 윌킨슨은 자신을 기가 막히게 잘 흉내내는 여배우 칼로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칼로타가 만찬장에 가서 자신을 완벽히 연기하면 1만 달러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칼로타는 이에 응해 만찬장에 가서 제인 윌킨슨을 연기하고, 제인 윌킨슨은 에지웨어 경을 찾아가 살해한다.

그리고 곧바로 칼로타에게 베로날을 먹여 살해한다. 칼로타가 동생에게 쓴 편지에 '1만 달러가 걸린 장난'에 대해 씌여 있었지만, 편지 한 장을 뜯어 내면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한 것처럼 읽힌다는 것을 깨달은 제인 윌킨슨은 편지를 없애지 않고, 일부를 뜯어내기만 한다. 반듯하게 찢겨지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뜯어진 이유는 she 부분의 s를 뜯어내 he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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