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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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 오래된 아파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낡고 허름한 회색 건물의 이름은 '호텔 선인장'. 읽는 것은 질색이고 몸을 단련하는데 관심이 많으며 가족과 친구를 배려하는 '오이', 관청에 근무하며 딱부러지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추구하는 소심한 숫자 '2', 거북이와 함께 살며 하드보일드한 삶을 동경하는 '모자'. 이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처음엔 어색하게 쭈뼛거렸지만 곧 친해진 이들은 위스키와 맥주, 그리고 자몽주스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경마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즐거운 시기는 '호텔 선인장'이 헐리기로 결정됨에 따라 잠시 중단된다.


오이와 모자, 숫자 2라는 다소 엉뚱한 등장 인물들은 서로에게 열광하거나 다른이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마치 오이는 원래 오이니까, 모자는 원래 모자니까 하는 식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속에 관계를 발전시킨다. 담백한 태도 속에 서로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관계라고 하면 될까?

 

** 아름다운 무늬가 들어간 철제 난간과 계단, 벽 등을 소재로 그려진 사사키 아츠코의 삽화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야기들과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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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2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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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페드로는 암의 원인이 유전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를 밝히기 위해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쥐를 수입해다가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왠일인지 쥐들이 연구실에서는 번식을 잘 하지 못해 매번 죽어나갔으므로 골머리를 썩였다.

조수 아마도르가 페드로에게 무에카스라는 사람이 연구실의 쥐를 훔쳐다가 번식시켰다는 말을 전하자 페드로는 곧 무에카스의 집을 방문해 쥐를 얻고자 한다.

무에카스의 집은 빈민굴에 있었는데 두 딸과 아내,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이 쓰레기장을 방불케하는 방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무에카스는 쥐들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는 열을 가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쥐들을 딸들의 목에 메달아 발정기를 유도한다고 했다. 두 딸은 매우 예뻤는데 큰 딸은 쥐에게 가슴 윗부분을 물리기까지 했건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드로에게 무에카스가 찾아와 자신의 딸이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말한다. 페드로가 무에카스의 집을 가보니 큰 딸이 임신한 상태에서 무언가 잘 못 되었는지 피를 쏟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주술사의 수상쩍은 처방으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 페드로는 자신이 의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파 수술을 시도한다. 하지만 큰 딸은 페드로가 손을 쓰기 시작한 그 순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페드로는 자신이 큰 딸을 죽인건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빠져 친구 마티아스와 함께 창녀굴에 몸을 의탁했다가 경찰에 잡혀간다.

페드로가 경찰에 잡혀가자 마티아스는 집안 연줄을 이용해 페드로를 도우려 하고 페드로가 하숙집 모녀의 간계로 손을 댄 도리타는 매일같이 페드로를 면회하러 간다. 하지만 경찰은 교묘한 유도심문을 통해 페드로를 범인으로 확정지으려 한다.

이 때 무에카스의 아내 리카르다가 딸이 페드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진술을 하고 덕분에 페드로는 무사히 풀려난다. 하지만 페드로가 사랑하게 된 하숙집 딸 도리타가 질투심에 눈이 먼 사내에 의해 살해당하고 - 그는 페드로가 무에카스의 딸을 죽였다고 오인한다 - 페드로는 연구실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시골 의사가 되기 위해 떠난다.


1924년에 스페인의 보호령 모로코에서 태어난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1946년에 살라망카 의대를 최우등으로 졸업, 박사 과정 수료 후에는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1951년 산세바스티안 정신병원의 원장을 지낸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경력을 쌓은 그였지만 스페인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사회노동당 활동을 한 이유로 세 차례 투옥된다.


<침묵의 시간>은 1986년에 비센떼 아란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국내에서는 개봉도 되지 않았고 찾아 보기도 힘들다. 종종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견주어 평가 받기도 하는 이 소설은 줄거리의 흐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한 편이다. 의식의 흐름에 맞추어 줄거리가 무시되기도 하고 대화가 엇나가는 느낌이 들어 다시 읽어보면 상대편의 대화는 생략되고 한 사람의 대화만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여러사람의 의식이 순서대로 적혀 있어 끝까지 읽고 나서 누구의 생각인지 간추려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매일 밤 조금씩 읽다가 눈을 감고 내용을 곱씹어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1964년 1월 24일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이 많지 않다. <침묵의 시간>, 속편 격인 미완의 유작 <파괴의 시간>, 단편 모음과 정신분석 이론서, 처녀시 모음집 각 한 권씩이 전부이다.

소설 속에서 '사회를 분석하기만 할 뿐 변혁하는데는 무능력한' 철학자로 등장하는,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의 스승이며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독자들의 실제 삶이 소설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이며 더 빠르게 변하고 있어 언어를 매개로 현실을 재현하고 상상하는 작가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것이 곧 소설의 죽음 이라는 위기 의식을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술(description)'이 '줄거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소설 형식의 실험에 있어 대단히 큰 업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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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이윤 옮김 / 호미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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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한 밤, 담배가게 할머니가 살해된다. 그날 밤 순찰을 돌던 순경과 작사가 지츠소우지가 고글 쓴 남자를 목격했는데 고글 안쪽이 새빨갛게 보였다. 눈이 짓무른 것인지, 아니면 렌즈가 빨간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경찰이 담배가게를 조사하는 사이에도 고글 쓴 남자는 현장 주변에서 목격 되었다. 담배가게 할머니는 대리석 재질의 탁상 시계로 두부를 가격당했고 이 충격으로 심장마비가 와서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특이한 것은 담배 50개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포장용기인 깡통은 사라졌다는 점과 금고 속의 5천엔 짜리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경찰은 담배가게 할머니가 평소 은행을 믿지 못해 장롱에 현찰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누군가가 돈을 노리고 결행한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한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다른 담배가게 두 군데에서 표시된 5천엔짜리가 발견된다. 경찰은 표시된 5천엔짜리와 범행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파악하려 했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한편 용의자가 고글을 쓴 이유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경찰의 가설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데 고글 쓴 남자가 보란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고글 쓴 남자가 또다른 범행을 저지른다. 에노키 미츠코라는 여자를 야쿠자풍의 남자가 팔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가려는데 갑자기 고글 쓴 남자가 나타나 야쿠자풍의 사내를 차도쪽으로 밀친 후 칼을 꺼내들고 행인을 위협한 것이다. 사내는 마침 달려오던 차에 받혀 크게 다치고 고글 쓴 남자는 유유히 사라진다. 경찰은 병원에 입원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생김새와는 달리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경영자였다. 에노키 미츠코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려 했기 때문에 경찰서로 데려가려던 것이었다는 말만 간신히 내뱉은 남자는 고통에 겨워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에노키 미츠코를 조사한 경찰은 그녀가 작사가 지츠소우지에게 노래를 배워 가수로 데뷔할 꿈을 갖고 있고, 윗집에 사는 대학생과 연인 관계인 동시에, 슈퍼마켓 경영자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최근 그녀 주변에 스토커가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도 파악한다.

그즈음 경찰의 용의선상에 또다른 남성이 등장한다. 에노키 미츠코의 대학생 애인에게는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에노키 미츠코의 스토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담배가게 할머니 살해에 쓰인 대리석 시계의 지문과 스토커의 지문이 일치한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백에서 고글까지 나왔으니 그가 범인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스토커가 경찰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고글 쓴 남자에 의한 또다른 살인이 일어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두번째 살인 피해자는 슈퍼마켓 경영자였다. 그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수십차례 칼에 찔려 사망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잠실실내경기장에서 이승환 콘서트가 열리는 날 제1 수영장 휴게실 앞에 차를 대놓고 읽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사건의 범인은 에노키 미츠코이다. 에노키 미츠코는 슈퍼마켓 사장에게 돈을 받고 정부 역할을 하다가 작사가 지츠소우지와의 관계가 들통나 지원이 끊기자 사기를 치기로 결심한다. 사기 방법은 간단하다. 계산중에 주인을 헤깔리게 만드는 수법인데 다음과 같다. 먼저 물건 값을 5천엔짜리로 지불하고 거스름 돈을 받는다. 거스름 돈 4천엔이 건내지는 순간 미안하다면서 천엔을 더 줄테니 5천엔을 달라고 한다. 주인은 오천엔을 상대편에게 건내주고 방금 받은 천엔을 더해 천엔짜리 다섯장은 아직 손에 쥐고 있다. 이 상태에서 잽싸게 다시 말을 바꿔 차라리 오천엔짜리 한장을 더 줄 테니 만엔짜리를 달라고 하며 오천엔을 건낸다. 주인이 다른 손님과의 계산 등으로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자신의 손에 5천엔과 천엔짜리 다섯장이 있으므로 만엔이 맞다고 착각하고 만엔을 건내주게 된다.

에노키 미츠코는 담배가게 할머니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성공했는데 마지막 담배가게에서 할머니가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겁에 질려 탁상시계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하고 만다. 장롱의 돈을 가져가려다 보니 넣을 곳이 없어서 담배 깡통에 돈을 담고 담배는 바닥에 버린 것이다.

한편 평소 에노키 미츠코를 스토킹하던 남자는 신문투함구를 통해 몰래 훔쳐 보다가 마침 문에 빨간색 스프레이가 칠해지던 참이라 눈주위에 빨간 라카칠이 되고 만다. 이를 가리기 위해 고글을 쓴채 돌아다녔는데 그녀가 노파를 살해하던 장면을 목격한다. 방으로 뛰어들어 노파가 진짜 죽었는지 살피다가 대리석 시계를 만지는 바람에 지문이 남게된 것이다. 스토커는 자신이 범행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에노키 미츠코를 협박해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에노키 미츠코는 도리어 이를 이용한다. 고글쓴 남자가 범인이라고 경찰에 알려졌으므로 자신이 고글을 쓰고 슈퍼마켓 사장을 찔러죽인 것이다.


소설은 한 소년이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후 원전 임계사고를 경험하는 내용을 삽입해 범인을 다른이로 추측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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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밑의 욕망 범우희곡선 19
유진 오닐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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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레임 캐봇은 뉴잉글랜드의 농부로 향년 75세이다. 그의 슬하에는 시미언, 피터, 에벤 삼형제가 있는데 시미언과 피터는 첫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이고 에벤은 두번째 부인의 소생이다. 삼형제는 캐봇의 권위에 짓눌려 평생을 농사일만 했다.

어느 날 캐봇이 서부로 여행을 떠나자 에벤이 두 형들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아버지가 감추어둔 돈을 형들에게 건내며 서부로 금을 찾아 떠나라고 권한 것이다. 형들이 에벤의 말을 옳게 여겨 서부로 떠난 직후 캐봇은 서른다섯살의 에비 퍼트남을 새 아내로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에비는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농장을 소유할 욕심을 드러내고 에벤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피땀 흘려 일군 농장을 가로채려는 에비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에비는 에벤에게 욕정을 느꼈기에 그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에벤은 헛되이 저항하지만 곧 에비와 정을 통한다. 둘은 캐봇의 눈을 피해 관계를 지속한다.

얼마 후 에비가 아이를 베고, 캐봇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굳게 믿고 몹시 기뻐한다. 캐봇은 의기양양하게 에벤에게 농장 전부를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물려줄 것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에벤에게는 한자락의 땅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옥신각신 하던 중 캐봇이 내뱉은 한마디가 비극의 씨앗이 된다.

에비가 에벤을 유혹하려 하다가 잘 되지 않았던 시기에 에비가 심술이 나서 캐봇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그녀는 캐봇에게 '에벤이 농장이 탐이 나서 자신에게 집적이지만 아이만 낳게 되면 그를 내쫓아 버리겠다' 고 말했던 것이다.

이 말에 분개한 에벤이 에비에게 몹시 해대고, 에비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를 살해하고 만다. 에벤은 보안관을 불러 에비와 함께 체포된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의 배경은 1850년으로 당시에도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에벤은 대단히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인 캐봇을 부정하고, 어머니인 에비와 관계를 맺는다. 에벤이 새어머니가 오기 직전 형들에게 돈을 주어 서부로 보내는 행동은 어찌 보면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상대를 주변에서 없애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에벤은 그 후 짐짓 에비의 유혹에 저항하는 듯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에비와 육체 관계를 맺는다.

에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품 속에서 이십대의 에벤과 칠십대의 캐봇이 난투극을 벌이는데 승리자는 노구의 캐봇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머니를 사이에 둔 연적 관계인데 아들은 이미 패자로서 세상에 태어난다. '소유 욕망'의 관점에서만 봤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에게 속해있는 것이다. 이 필패의 운명을 역전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상황은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얻은 새어머니를 아들이 가로채는 경우밖에 없다. 유진 오닐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승리한 아들 에벤과 에비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또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에비가 아이를 살해한 뒤 '죽이고 말았다'고 했을 때 에벤은 '아버지를 죽였느냐'고 묻지만 에비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라고 통탄한다. 에비의 머리가 나빠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에비는 에벤의 경쟁자를 살해하는 것만이 자신의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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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홍신 엘리트 북스 6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최규남 옮김 / 홍신문화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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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마니아의 산골 마을 판타나의 농부 요한 모리츠는 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여자친구 스잔나를 버리고 떠날 수 없어 꿈을 포기하고 고향 마을에 주저앉고 만다. 다행히 코루가 사제, 그리고 사제의 아들이자 소설가인 트라이안이 요한에게 돈을 얼마간 지원해주었고 이 덕택에 요한은 스잔나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둘은 매일같이 열심히 일했고 두 명의 아이를 낳는다. 

스잔나의 아버지 요르그 요르단은 아내와 딸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포악한 자였는데 스잔나가 집을 나가자 아내 요란다를 때리며 화풀이 하다 그만 죽이고 만다. 그는 살인죄로 형을 받고 복역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관심은 '말들을 누가 돌봐줄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2년 뒤 그는 석방되고 나치 돌격대 하사로 복무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다. 


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주변국들을 침략한다. 루마니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모두 헝가리와 인접한 국경에 끌려가게 되었다. 판타나 마을의 헌병대장은 스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요한만 없다면 스잔나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요한이 유대인이라고 거짓 보고를 상부에 올리고 다음 날 요한은 헝가리 국경의 수용소로 끌려간다. 헌병대장은 요한이 끌려간 후 스잔나에게 집적거렸지만 스잔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거짓보고가 들통나면 더 큰일이라고 생각한 헌병대장은 스잔나에게 요한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집을 빼앗겠다고 위협하여 이혼서류에 사인하도록 계략을 꾸민다. 요한은 수용소에서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이혼서류가 불리하게 작용한다.

같은 마을에서 잡혀온 유대인 마르쿠 골덴베르크는 러시아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러시아군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지 못하게 만들 요새를 구축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주장하다가 유대인 동료 렌겔을 살해한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그들과 함께 헝가리로 탈출한다.


헝가리로 건너간 요한은 자신이 곧 자유의 몸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브라모비치의 누이 집에서 율리스카란 하녀의 호의로 얼마간 편안한 생활을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의 검문에 걸려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헝가리 경찰은 요한이 루마니아의 스파이가 분명하다며 매일같이 고문한다. 그는 아브라모비치의 누이와 처남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까봐 요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증언한다.


헝가리가 독일의 압박에 못이겨 수만명의 노동자를 징발해야 할 처지가 되자 요한과 같은 수감자들을 독일로 보낸다. 요한은 이제 독일 군수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처지가 되었다. 요한은 그곳에서 프랑스인 동료 조제프와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조제프는 '살베 스크라베(안녕하시오 노예)' 라는 인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조제프는 자신들이 노예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 인사를 누구에게나 건냈던 것이다.

반복적인 노동으로 폐에 병을 얻은 요한이 우연히 독일 친위대 대령 뮐러의 눈에 띄게 된다. 뮐러는 요한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더니 요한이 아리안족 순수 혈통인 영웅족의 일원이 틀림없다며 요한을 독일군에 복무 배치시키고 간호사 힐다와 결혼하게끔 주선한다. 포로에서 감시자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요한은 조제프 등에게 해로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제프가 탈출할 계획을 털어 놓으며 함께 가자고 권한다. 요한은 그들과 함께 탈출한다.

요한의 탈출 직후 러시아군이 독일로 진격한다. 힐다의 집에 독일군 장교가 뛰어들어 힐다에게 씻을 물을 부탁한다. 몸을 정갈히 하고난 직후 장교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힐다는 그 장교에 대한 흠모의 정을 느낀다. 러시아군이 힐다의 집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힐다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아이와 함께 죽고 만다. 자살한 독일군 장교는 요르그 요르단이었다.


프랑스로 건너간 요한은 여전히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다. 독일군이었던 전력 때문에 이번엔 전범자가 된 것이다. 유대인으로 오인받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 일부터 유대인 의사와 함께 탈출한 일, 프랑스인 조제프의 탈출을 도운 일 등을 모두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군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고 개개인의 사정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수용소에서 코루가 사제와 그의 아들 트라이안을 만난 요한은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코루가 사제는 수용소에서 병사한다. 탄원문을 보내고 단식투쟁을 하던 트라이안 역시 절망감에 자살한다.

수용소를 전전하며 9년을 보낸 요한에게 스잔나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스잔나는 요한이 떠나간 뒤 항상 그를 생각하며 지냈다는 것, 어머니가 마르쿠 골덴베르크에게 총살당한 사실, 그리고 러시아군이 그녀를 윤간하여 아이를 낳게된 사연 등을 써서 보낸다.


1938년부터 13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 요한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장성한 두 아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스잔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스잔나는 그 옛날 판타나에서 요한과 만날 때 입었던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겨우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그들에게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미군에게 사정을 설명하던 요한에게 징집관의 여비서가 혹시 트라이안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녀는 트라이안의 아내 엘레오노라 베스트였다. 요한은 간직하고 있던 트라이안의 안경을 그녀에게 건내준다. 징집관은 요한의 가족이 훌륭한 선전물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요한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요한에게 웃으라고 반복적으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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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규(Constant Virgil Gheorghiu)는 1916년 루마니아 태생으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루마니아 외무성의 문화 사절로 근무하던 시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게오르규도 연합군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이 <25시>의 토대가 된다.

소설 속에서 트라이안은 흰 토끼 이야기를 한다. 잠수함에서 흰 토끼는 위기를 나타내는 지표 동물이다. 흰 토끼가 죽고 나면 이제 사람 차례인 것이다. 흰 토끼가 모두 죽은 이후의 시간, 즉 24시 이후의 시간이 바로 25시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요한 모리츠는 상황의 노예가 되어 13년간을 수용소를 전전한다. 그의 이름은 타인에 의해 이온, 요한, 야콥, 양켈, 야노스로 불린다. 요한은 자신이 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13년간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 설명을 요구하고 답변을 듣게 되지만 요한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명을 가진 개인 요한'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특정 카테고리에 속한 요한' 에 대한 기계적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루마니아인, 독일군 등의 카테고리는 요한이 어디에 속하는지 나타낼 뿐, 요한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개념적 범주일 뿐이다. 

<25시>는 이미 기계화 되어버린 유럽 문명과, 대안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별다를 것 없는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서 개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과연 있는지 묻는 묵시록적인 소설이다. 흰 토끼는 이미 죽어버려 유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류 역시 <25시>의 주인공 요한과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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