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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ㅣ 홍신 엘리트 북스 6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최규남 옮김 / 홍신문화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루마니아의 산골 마을 판타나의 농부 요한 모리츠는 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여자친구 스잔나를 버리고 떠날 수 없어 꿈을 포기하고 고향 마을에 주저앉고 만다. 다행히 코루가 사제, 그리고 사제의 아들이자 소설가인 트라이안이 요한에게 돈을 얼마간 지원해주었고 이 덕택에 요한은 스잔나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둘은 매일같이 열심히 일했고 두 명의 아이를 낳는다.
스잔나의 아버지 요르그 요르단은 아내와 딸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포악한 자였는데 스잔나가 집을 나가자 아내 요란다를 때리며 화풀이 하다 그만 죽이고 만다. 그는 살인죄로 형을 받고 복역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관심은 '말들을 누가 돌봐줄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2년 뒤 그는 석방되고 나치 돌격대 하사로 복무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다.
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주변국들을 침략한다. 루마니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모두 헝가리와 인접한 국경에 끌려가게 되었다. 판타나 마을의 헌병대장은 스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요한만 없다면 스잔나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요한이 유대인이라고 거짓 보고를 상부에 올리고 다음 날 요한은 헝가리 국경의 수용소로 끌려간다. 헌병대장은 요한이 끌려간 후 스잔나에게 집적거렸지만 스잔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거짓보고가 들통나면 더 큰일이라고 생각한 헌병대장은 스잔나에게 요한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집을 빼앗겠다고 위협하여 이혼서류에 사인하도록 계략을 꾸민다. 요한은 수용소에서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이혼서류가 불리하게 작용한다.
같은 마을에서 잡혀온 유대인 마르쿠 골덴베르크는 러시아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러시아군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지 못하게 만들 요새를 구축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주장하다가 유대인 동료 렌겔을 살해한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그들과 함께 헝가리로 탈출한다.
헝가리로 건너간 요한은 자신이 곧 자유의 몸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브라모비치의 누이 집에서 율리스카란 하녀의 호의로 얼마간 편안한 생활을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의 검문에 걸려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헝가리 경찰은 요한이 루마니아의 스파이가 분명하다며 매일같이 고문한다. 그는 아브라모비치의 누이와 처남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까봐 요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증언한다.
헝가리가 독일의 압박에 못이겨 수만명의 노동자를 징발해야 할 처지가 되자 요한과 같은 수감자들을 독일로 보낸다. 요한은 이제 독일 군수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처지가 되었다. 요한은 그곳에서 프랑스인 동료 조제프와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조제프는 '살베 스크라베(안녕하시오 노예)' 라는 인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조제프는 자신들이 노예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 인사를 누구에게나 건냈던 것이다.
반복적인 노동으로 폐에 병을 얻은 요한이 우연히 독일 친위대 대령 뮐러의 눈에 띄게 된다. 뮐러는 요한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더니 요한이 아리안족 순수 혈통인 영웅족의 일원이 틀림없다며 요한을 독일군에 복무 배치시키고 간호사 힐다와 결혼하게끔 주선한다. 포로에서 감시자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요한은 조제프 등에게 해로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제프가 탈출할 계획을 털어 놓으며 함께 가자고 권한다. 요한은 그들과 함께 탈출한다.
요한의 탈출 직후 러시아군이 독일로 진격한다. 힐다의 집에 독일군 장교가 뛰어들어 힐다에게 씻을 물을 부탁한다. 몸을 정갈히 하고난 직후 장교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힐다는 그 장교에 대한 흠모의 정을 느낀다. 러시아군이 힐다의 집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힐다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아이와 함께 죽고 만다. 자살한 독일군 장교는 요르그 요르단이었다.
프랑스로 건너간 요한은 여전히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다. 독일군이었던 전력 때문에 이번엔 전범자가 된 것이다. 유대인으로 오인받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 일부터 유대인 의사와 함께 탈출한 일, 프랑스인 조제프의 탈출을 도운 일 등을 모두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군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고 개개인의 사정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수용소에서 코루가 사제와 그의 아들 트라이안을 만난 요한은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코루가 사제는 수용소에서 병사한다. 탄원문을 보내고 단식투쟁을 하던 트라이안 역시 절망감에 자살한다.
수용소를 전전하며 9년을 보낸 요한에게 스잔나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스잔나는 요한이 떠나간 뒤 항상 그를 생각하며 지냈다는 것, 어머니가 마르쿠 골덴베르크에게 총살당한 사실, 그리고 러시아군이 그녀를 윤간하여 아이를 낳게된 사연 등을 써서 보낸다.
1938년부터 13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 요한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장성한 두 아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스잔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스잔나는 그 옛날 판타나에서 요한과 만날 때 입었던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겨우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그들에게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미군에게 사정을 설명하던 요한에게 징집관의 여비서가 혹시 트라이안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녀는 트라이안의 아내 엘레오노라 베스트였다. 요한은 간직하고 있던 트라이안의 안경을 그녀에게 건내준다. 징집관은 요한의 가족이 훌륭한 선전물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요한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요한에게 웃으라고 반복적으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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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규(Constant Virgil Gheorghiu)는 1916년 루마니아 태생으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루마니아 외무성의 문화 사절로 근무하던 시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게오르규도 연합군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이 <25시>의 토대가 된다.
소설 속에서 트라이안은 흰 토끼 이야기를 한다. 잠수함에서 흰 토끼는 위기를 나타내는 지표 동물이다. 흰 토끼가 죽고 나면 이제 사람 차례인 것이다. 흰 토끼가 모두 죽은 이후의 시간, 즉 24시 이후의 시간이 바로 25시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요한 모리츠는 상황의 노예가 되어 13년간을 수용소를 전전한다. 그의 이름은 타인에 의해 이온, 요한, 야콥, 양켈, 야노스로 불린다. 요한은 자신이 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13년간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 설명을 요구하고 답변을 듣게 되지만 요한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명을 가진 개인 요한'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특정 카테고리에 속한 요한' 에 대한 기계적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루마니아인, 독일군 등의 카테고리는 요한이 어디에 속하는지 나타낼 뿐, 요한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개념적 범주일 뿐이다.
<25시>는 이미 기계화 되어버린 유럽 문명과, 대안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별다를 것 없는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서 개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과연 있는지 묻는 묵시록적인 소설이다. 흰 토끼는 이미 죽어버려 유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류 역시 <25시>의 주인공 요한과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