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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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 40세. 신장 173. 한때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회사에 다녔으나 실직. 아내가 저금통장을 들고 집을 나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어 노숙자 처지까지 떨어짐. 후지키 요시히코의 과거다. 

그 후지키 요시히코가 지금, 비에 젖은 채 온통 심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괴이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 나는 건 JR 기차표와 누군가가 건네준 맥주, 그리고 18년 만의 대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물통과 도시락, 그리고 은색 파우치가 있다. 도시락에서 블록 모양 영양식을 먹고 나서 은색 파우치를 열어보니 게임기 같은 게 들어있다. 작동시키니 "화성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나서 액정에 떠오르는 문장들.

후지키는 생존, 아이템, 생사, 협력, 적대관계 등의 키포인트가 담긴 그 문장들을 보며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게임기는 제1 체크포인트로 이동을 지시했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던 후지키는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며 이동한다. 

이동하던 중 바위 조각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 놀란다. 소리나는 쪽으로 용기를 내서 다가가니 사람의 형체가 도망을 친다. 상대는 기다리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자리를 피하고, 50~60미터 정도 달려가다 돌에 걸려 넘어진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키가 크고 날씬한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겨우 상대를 안심시키고 말을 시켜보니 그녀 역시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는 눈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오토모 아이이고 성인잡지에 만화를 기고하여 먹고 산다고 했다. 보청기를 낀 그녀의 게임기는 도망치던 중 떨어뜨려 망가진 상태였다.

둘이 어찌어찌 해서 체크포인트로 가보니 거기에 일곱 명의 사람이 더 모여 있다. 그들 역시 게임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그 게임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 정보와 체크포인트에서 얻은 정보를 결합해 보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며칠 간의 기억이 상실된 채 오스트레일리아로 추정되는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게임의 룰에 따라야 하며, 그 룰을 어길 시에는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하게 되는 것 같다. 게임은 게임기가 정해놓은 룰에 따라야 하는데, 게임기가 제시하는 첫 번째 행동지령은 이렇다. 


서바이벌을 위한 아이템을 얻으려는 자는 동쪽으로, 호신용 아이템을 얻으려는 자는 서쪽으로, 식량을 얻으려는 자는 남쪽으로, 그리고 정보를 얻으려는 자는 북쪽으로 가라.

 

후지키와 오토모 북쪽으로 가서 정보를 얻기로 하는데, 그곳에서 얻은 정보는 약간 으스스한 면이 있었다. 서바이벌을 택한 자들은 현실주의자로 가능한 한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좋다. 호신용 아이템을 택한 자들은 협력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한 자들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식량을 선택한 자들이 뜻밖에도 가장 위험한 자들이 될 것이다. 왜 식량을 선택한 자들이 가장 위험한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템 일람 정보까지 획득한 둘은 처음 출발지로 돌아온다. 마침내 각자가 얻은 것들을 교환하는 시간이 되자 후지키와 오토모는 다른 팀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아이템 일람 덕분이었다. 이렇게 되자 후지키와 오토모 역시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얼버무리기로 한다. 이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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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로얄>이나 <헝거 게임>과 같은 서바이벌 호러 소설로 1999년에 발표되었다. <화성의 미궁>이라는 게임북을 토대로 디자인된 이 게임에는 '게임 마스터'와 '옵저버' 가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면 9명의 참가자 중 누가 '게임 마스터'와 '옵저버' 역할을 하는지 추리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다.

서바이벌 소설이 그렇듯 남쪽으로 간 자들이 '식시귀'가 된다는가, 스너프 필름을 얻기 위해 디자인 된 게임이었다든가, 하는 자극적인 설정이 난무한다. 시간 떼우기로는 괜찮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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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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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라 하면 가무를 익혀 술자리 흥을 돋우는 한편 때에 따라 몸도 파는 창녀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논개와 같이 적장을 살해했다거나, 황진이와 같이 문장에 능해 시서를 남겼다든가 하는 식의 독특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경우도 혹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가무를 익힌 창기 정도의 인상이 보편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이현수의 <신 기생뎐>은 이러한 이미지를 부엌에서부터 깨나가기 시작한다. 첫 장의 주인공은 부엌어멈 타박네이다. 그녀는 기생집에서 차려지는 음식의 요리법이 일반식당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부터 시작해서 모양이 어떠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타박'을 해댄다. 그런데 차츰 읽다보니 느껴지는 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정작 기생집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 기생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다고 오인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는 기껏 방송매체를 통해 막연하게 형성된 것일 터다.

흥미롭기로는 두번째 장의 오마담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무형문화제로 천거될 만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오마담이 소리기생으로 늙어가는 얘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번번히 속으면서도 가진 것 전부를 내어주는 심리가 알듯 모를 듯 하다.

작가 이현수는 춤기생, 기둥서방, 집사 등 기생집에서 삶을 꾸려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일곱 마당에 걸쳐 걸터듬어 나간다. 꽤나 공들였을 것이 분명한 고증들과 맛깔나는 대화가 어우러지면서 소설은 절로 무르익어 가고, 저 홀로 똑똑하다고 젠 체 하는 어벙한 자들과 자신의 삶을 깜냥껏 꾸려가는 사람들이 대비되면서 어느덧 내가 갖고 있던 기생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그리고 얼핏 들여다본 그들 삶의 한 자락이 나에게 희로애락의 공감을 불러 일으켜 책을 덮었을 땐 오랜만에 훌륭한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52부작 드라마로도 제작된 모양인데 내용을 대략 살펴보니 소설과는 기본적인 부분만 공유할 뿐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다른 듯 하다. 지난 1월에 청주로 차량 수리를 맡기러 갔다 읽었던 소설인데 뒤늦게 독서일기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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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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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발데르는 양자 컴퓨터와 신경망 개발, 그리고 인공지능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룬 스웨덴 과학자이다. 그의 전처 한나 발데르는 한 때 잘 나갔던 배우였고, 둘 사이에는 아들 아우구스트가 있었다. 한나가 아들 아우구스트를 데리고 프란스를 떠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프란스는 연구에 몰두하면 전혀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나가 새로 만난 남자 라세는 프란스 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빴다. 영화에서 악역을 주로 맡는 라세는 술에 취하면 한나를 때렸고, 프란스가 보내 주는 양육비를 착복했으며, 아우구스트를 학대했다.


어쨌든 프란스 발데르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슈퍼 크래프트' 연구에 몰두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의 프로그램이 전혀 엉뚱한 회사인 '트루 게임스' 에서 발표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프란스 발데르는 자신들이 운용하던 시스템에 취약점이 있었는지 검사해 달라고 '의문의 여자 해커'에게 부탁하고, 그녀는 면밀한 조사 뒤 해킹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후에 신호정보와 컴퓨터 보안을 담당하는 스웨덴 정부기관 FRA 역시 해킹 개연성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후 프란스의 행보는 다소 엉뚱했다. 컴퓨터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과학자 라면 자본으로 부터 독립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던 그가 미국의 솔리폰이라는 대기업에 취직을 한 것이다. 거기서 얼마간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던 프란스가 이번에는 갑자기 솔리폰에 사표를 던지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솔리폰은 그가 회사의 프로젝트를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프란스는 아우구스트를 계속 라세 밑에서 키울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런데 아우구스트가 프란스의 집에 온 뒤로 그림을 그리거나 알 수 없는 긴 숫자들을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프란스는 아우구스트가 서번트라는 것을 알게된다. 한나와 라세 밑에서는 학대 당하고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그소 퍼즐만 맞추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았다. 


한편, <밀레니엄>은 지난 번 살라첸코 기사 이후 이렇다 할 특종을 내지 못하고 잊혀져 가고 있었다.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한물 간 기자로 취급되었다. 이런 와중에 거대 미디어 그룹 세르네르가 지분 투자를 하고 오베라는 이름의 얼치기 언론인을 투입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밀레니엄>을 주무르고 싶어 했다. 미카엘은 이에 대해 극력 반발했지만 에리카는 흔들리고 있었다. 미카엘에게 리누스 브란델이라는 사람이 제보 전화를 걸어온 것이 그 즈음이었다. 

자신을 프란스 발데르의 조수라고 소개한 리누스 브란델은 프란스가 스웨덴에 온 뒤 편집증에 사로잡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다며 파 보면 뭔가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 하던 도중 '의문의 여자 해커'에 대해 언급하자 미카엘은 해커의 정체가 리스베트가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리스베트는 NSA 해킹에 성공하여 슈퍼유저 권한까지 획득하고, 이에 NSA 최고 보안 책임자 '에드 더 네드'로 불리는 에드윈 니덤의 추격을 받는 상태였다. 


프란스 발데르라는 천재 과학자, 수학과 예술 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서번트 아우구스트, NSA를 해킹한 천재 해커 리스베트와 그녀를 쫓는 또 다른 해커 출신 보안안 책임자 에드윈 니덤. 그들 모두를 연결하는 곳에 '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라는 러시아 비밀집단이 있다. 그 비밀집단의 리더는 '타노스', 또는 '키라' 로 불리는 미모의 여성인데, 그녀의 진짜 정체는 리스베트의 여동생 카밀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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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이 2004년 밀레니엄 시리즈를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긴 후, 책이 출잔되기 불과 6개월 전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리고 13년 만에 시리즈의 4부 <거미줄에 걸린 소녀>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을 사기 전에 굉장히 망설였다. 오리지널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난 뒤 느낌은 나쁘지 않다. <밀레니엄>이 지향하는 '탐사보도'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주제도 무난히 가져갔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에 대한 분석도  괜찮은 편이다. 와스프(리스베트)의 반대편에 타노스(카밀라)를 배치하여 3부에서 그림자만 어른거렸던 리스베트의 여동생을 등장시킨 것도 좋았지만, 이런 이름들이 자매가 어렸을 적 보았던 마블 코믹스에서 유래했다는 설정도 그럴싸 하다. 또 하나의 미덕은 리스베트가 행하는 정의의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4부에서는 한나(여자)와 아우구스트(아이)가 학대 당하고, 리스베트는 둘의 자활을 돕는다.

어쨌든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의도한 것이 스티그 라르손이 구축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4부로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어느정도 성공한 것 같다. 


* 페데 알바레즈 감독의 동명 영화는 캐스팅, 연출, 각색 모두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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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듭은 누가 풀까
이경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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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의 주인공 손하영은 성공한 현대무용가이며 대학교수이다. 마흔을 목전에 앞 둔 그녀는 정인호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는데, 큰 딸은 하영 작은딸은 인영이다. 남편은 바람을 피우는 눈치다.

하영과 아이들 사이에 정서적 유대는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하영을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미워했다. 집안 일은 입주 가정부가 도맡아 하고 있어 하영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손하영이 최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작품은 '도랑선비 청천각시'와 '치원대, 양산복' 이다. 이 과정에서 손하영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 연원을 따져보다 자신의 과거와 대면한다.

어렸을 적 손하영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먹고 어머니를 때렸다. 그는 한바탕 매타작이 끝나면 손하영을 끌어안고 '아버지 밉지' 라며 눈물을 흘렸다. 손하영은 어머니의 아픔에 공감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편에 섰다.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자기만이라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이었을 테지만, 이런 과정의 반복이 손하영의 여성성에 왜곡을 가져왔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파탄나게 만든 것 같았다.

손하영의 고통이 몸으로 번져 춤을 추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손하영은 재능있는 제자에게 자신의 배역을 물려준다. 

남편 정인호가 손하영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뜻밖에도 손하영은 남편에게 메달린다. 남편은 결국 떠나고, 손하영은 남편에게 메달린 자신의 심리가  과거 폭군 아버지 편에 섰던 심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와는 화해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니가 여자니?'라고 하영에게 던졌던 물음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과거 아버지 편을 들었던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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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손하영은 통상 우리사회가 어머니, 아내, 딸에게 요구하는 것 일체를 부작위로 일관한다.

육아에 관해 말하자면 몸매가 무너질까봐 모유 한 번 먹여본 적이 없고, 아이들 밥 한 끼 차려본 경험이 없다. 남편은 최소한 아이들과 놀아주기라도 하는데 반해 손하영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아이들에게 '왜 나를 미워하냐'며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남편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댁 제사를 깜빡해서 큰집에 가지 않은 날, 손하영은 남편의 냉담한 반응이 두려워 집에 가는 대신 호텔에 가서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남편은 손하영의 사회생활을 이해한다며 제사 정도만 참석하라고 -차리라고가 아니라- 부탁 했었다. 바람피고 돌아온 손하영은 남편이 자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다.

그녀는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양복에서 혹시라도 바람의 징후가 있는지 살피면서 비참해하고, 이혼요구에는 눈물을 흘리며 뜻밖의 재난을 당한 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친모가 맞을 땐 수수방관 했으면서 자신이 힘들 땐 친모에게 전화를 걸어 패악질을 일삼는다.


손하영은 그야말로 공감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여자이다. 그런 손하영이라는 주인공을 가지고 작가는 '도랑선비 청천각시'와 '치원대 양산복' 이야기를 차용하여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여성성 보다 중요한건 인간성이다. 억압받는 부류에 속해 있다고 해서 뭐든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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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삐딴 리 - 개정판
전광용 지음 / 을유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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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매화. 1960년 8월 사상계>


여인의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여인은 충에게 미국에서 유행하는 인공수태가 가능한지 묻는다. 충은 인공수태가 실험단계이며 시설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어렵다고 답한다.

여인은 남편이 아버지뻘 된다고 했다. 7년 째 애가 들어서지 않아 남편이 밖으로 나돌아 슬슬 애가 타던 여인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남편을 충의 병원으로 데려와 검사를 맡는다. 검사결과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지만 여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다.

그때부터 여인은 충에게 원시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신에게 임신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충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느 순간 비뚤어진 마음이 되어 여인의 뜻대로 해준다. 자신의 정액을 관장기에 넣어 여인의 자궁에 넣는 방법이 성공할지는 의문이었다.

충은 자기가 왜 비뚤어진 마음을 먹었는지 생각한다. 유복자에 소아마비인 자신의 처지, 사귀던 여인 선희의 이별통보 등 괴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마 뒤, 여인이 충을 찾아와 태기가 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날 밤 여인이 충을 유혹하여 호텔에 들지만 술기운 중에도 충은 여인을 뿌리친다.

다시 충을 찾아온 여인이 인공수정은 되지 않았다고, 어린애를 낳고 싶었다고 울면서 고백한다. 충은 '참 제비도 더럽게 뽑았지. 하필이면 나 같은 것의 종자를 받으려구...... 피동이 아니라 능동으로, 이 여인에게 정확한 수태를 시켜야지' 라고 결심한다.


<초혼곡, 1960년 12월 현대문학>


서해안 작은 반도 구가곡 출신의 '나'는 T교수의 소개로 부잣집에 입주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 첫째 딸 영희는 공교롭게도 등교길에 가끔 만나 흠심을 품었던 여학생이었다.

어쨌든 막내 영식을 가르치는 1년여 동안 영희와 꽤 가까워진다. 또 문학소녀인 둘째 영숙이 '나'를 사모하는 마음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고백하지도 못했고, 영숙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했다. 모두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영식이 입시에 실패하자 '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군대에 갔다가 부상을 당한 뒤 제대한다. 그리고 얼마 뒤 우연히 영숙을 만난 '나'는 영희가 미국 유학하고 돌아온 의사와 결혼했다가 불행해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희는 가끔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영숙도 몹쓸 병에 걸려 시한부였다. 영숙은 '선생님만 계셔 주시면 산다'고 했지만 병은 뼛속까지 파고들었기에 나을 가망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영숙 앞에서 왈칵 울음을 쏟는다. 그것은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줏대 없는 왜소하고도 소극적인 자기 비굴에 대한 나 스스로의 새로운 넋을 부르는 통곡이었다. 스스로의 무덤에 항거하여 새로운 의지와 행동을 마련할 흘러간 역사에 대한 최후의 호곡이었다.


<바닷가에서 - 반편들-, 1962년 1월 사상계>


주문진에 오징어가 잡히는 철이 되자 사람 사태가 일어난다. 객줏집과 음식점 마다 일할 사람들이 몰려들어 먹고 써댔으며, 장삿집 주인들은 한껏 외상을 줬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고 오징어가 씨가 마르자 일순 분위기가 바뀐다. 밀린 밥값 안 내도 되니 제발 가달라는 분위기가 되버린 것이다.

울진노인도 일하러 왔다가 하릴 없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처지가 되었다. 명심이를 데리고 술장사하는 원산댁이 이를 듣고 딱하게 여겨 운전수에게 울진노인을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혈기방장한 운전수는 명심이만 원하는 대로 굴면 그러겠노라 했지만, 탄광패도 명심이를 불러대는 통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원산댁이 다치고 다음 날 화물차는 병원에갈 원산댁과 명심이, 그리고 울진노인을 태우고 출발한다. 4.3. 때문에 타향으로 흘러들어온 제주해녀 모녀가 바다로 향했고, 학생들은 모래사장에서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있었다.


<면허장 - 1962년 5월 미사일>


대학 진학을 앞둔 현숙은 고민이 많았다. 친구 영희는 체육과에 들어가 율동이나 하구 춤이나 실컷 추다가 쓸만한 놈팽이나 얻어걸려 시집가면 그만이라며 태평하게 결정했지만, 현숙은 그러지 못했다. 문학쪽을 전공하려 했지만 소설가인 아버지가 오히려 만류했다. 여자는 결혼해서 아내로 살 때 행복하다는 논리였다. 오히려 어머니가 '면허장 하나라두 타놓으면 바쁜 목에 써먹을 수 있다'며 약학과를 권유한다.

어쨌든 현숙은 약학과를 나와 약제사 면허증을 따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이 늦어졌는데, 우연희 영희 결혼식에서 재회한 김선생이 중매를 선다. 상대는 국영기업체에 다니는 남자였는데, 그는 현숙보다는 약제사 면허증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치 면허장과 결혼하려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현숙은 세파의 폭풍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과도히 예기한 결과 이해타산과 인간거래의 매개장인 면허장을 땄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존귀한 가보처럼 아담한 유리액자에 넣어 현숙의 방 뒷벽에 소중이 걸려 있던, 그의 조그만 사진이 한 귀에 붙은, 약제사 면허장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채 뜰 구석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꺼삐딴 리 - 1962년 7월 사상계>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로 유명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라는 점이었다. 초진에서 병에 앞서 우선되는 것은 환자의 병원비 부담 능력 감정이었다. 거기서 탈락하면 어떻게든 환자를 따돌렸다. 외상도 절대로 안됐다. 따라서 그의 병원 주 고객은 왜정시대에는 주로 일본인,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 속에 드는 축이었다.

그가 양복 호주머니에서 18금 회중시계를 꺼내 미국 대사 브라운과의 약속시간을 가늠한다. 시계는 제국대학 졸업 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으로 <월삼 17석> 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과거를 회상한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보냈는데 지금은 생사를 모른다. 딸 나미코, 아니 이제는 '코(子)'를 떼어낸 나미는 대학 영문과를 마쳐줬는데 미국 유학을 갔다가 외인교수와 눈이 맞았다. 코쟁이 사위를 보게 생겨 심사가 복잡하다. 후처 혜숙은 과거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였다.

1945년 8월 하순에 해방이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타도하자는 문구가 곳곳에 걸렸다. 이인국 박사도 치안대로 끌려간다. 그 6개월 전 사상범 춘석이를 응급치료만 해주고 입원실이 없다는 핑계로 쫓아냈는데 앙심을 품은 춘석이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 이인국 박사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감옥 내에 이질이 돌아 일손이 부족해진데다 소련 군의관들로 부터 솜씨를 인정받자 이인국은 슬며시 기회를 보아 소련군 장교 스탠코프에게 왼쪽 볼에 있는 혹을 떼내 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노어회화책을 끼고 노력한 덕에 어느정도 의사소통도 되었다. 마침내 수술이 성공하자 이인국 박사는 소련군 병사가 빼앗아간 시계도 되찾고 아들도 모스크바에 유학을 보낸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되자 남으로 내려온 이인국 박사는 이번엔 미국에 줄을 댄다. 상감진사 고려청자 화병을 들고 브라운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도 막히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는 이인국 박사였다.


<곽서방 - 1962년 10월 새나라>


남쪽 다도해 중 하나인 경도에 곽서방이 살았다. 벼 심는 논이라고는 권노인의 재너머 한섬지기와 곽서방의 아직 소금기가 다 빠지지 않은 간척지 닷말지기가 다였다. 가뭄이 계속되어 마을 사람들이 추렴쌀을 내어 돼지로 치성을 드렸지만 비는 아직이었다.

원래 곽서방의 간척지는 순돌네가 간척한 것이었지만 태풍으로 둑이 터져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자 싼값에 곽서방에게 넘긴 것이었다. 어쨌든 곽서방은 논을 소유했다는 기쁨이 컸다.

곽서방은 운산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농사꾼은 제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의 원조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의뢰심만 늘게 되는 것이지 실지의 보탬은 안됩니다. 해방 15년에 정부가 농민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운산은 7년 전 섬으로 들어와 마을 주민들에게 개량농법을 알려주며 자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농부였다.

그토록 소원하던 비가 내리자 곽서방은 운산이 알려준 방식으로 모내기를 한다. 얼마 뒤 서울 XX대학에서 자매부락을 맺는다면서 내려와 지원금을 내놓고 간다. 곽서방은 그런 지원이 고마우면서도 어쨌든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남을 의지하고 사느니보다 제 힘으로 기껏 살아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남국 박사 - 의고당 실기-, 1962년 11월 대학신문>


학문으로나 인격으로나 존귀하고도 거룩한 존재인 남궁선생은 사학자였는데 일본인의 왜곡된 선입감에서 이루어진 기존 학설을 근본적으로 전복한 공이 있었다. 하지만 겨레니 나라니 하는 시류에 결부시키는 것은 꺼리는 학자풍의 교수였다. 그런 남궁 선생이 정년 퇴임이 단축되는 정부시책에 의해 갑자기 교단을 떠나게 된다. 남궁선생은 식장에서 '... 별로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낸 이 사람에게 이런 기념품까지 주셔서...' 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얼마 후 유학을 떠나기 전 남궁 선생을 찾아가니 남궁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자신의 장서들을 밑천으로 동대문 시장에 헌책방을 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엄친의 <여유당전서> 를 나에게 건낸다.


<모르모트의 반응, 1964년 5월 사상계>


3대 독자인 허진의 아들 윤이 개에게 하필이면 거기를 물린다. 잘라진 살가죽을 수습해 병원으로 가면서 허진은 아내에게 불구가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냐며 한탄한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분까지는 잘리지 않아 윤의 생식기능은 이상이 없도록 조치가 된다. 뒤늦게 허진은 '어디, 사람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 성이나 생식이 전부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제3자, 1964년 7월 문학춘추>


석구는 최근 난희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다. 난희와 원우를 중매선 게 화근이었다. 난희는 매일같이 원우와 사네 못사네 한탄을 하였고, 종내는 이혼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원우가 바람난 대상이 석구의 일가인 정아라며 볶아댔다. 석구도 처음엔 어떻든 간에 좋은 해결을 보려 노력했지만 종국엔 마음대로 하라며 나가떨어지고 만다. 며칠 후 원우와 난희가 나란히 포도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석구는 속으로 '연놈들 변덕도 참...'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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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도에 인천에서 사촌형, 사촌누나와 함께 살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사촌누나가 을유사에서 나온 이 책을 사들고 왔다. 읽고 독후감을 레포트로 제출해야 하는데 대신 써주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했는데 써줬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그해 여름에 나는 사촌들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큰형과 자취를 하게 되었고, 2~3년 뒤부터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촌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25년만인 것 같다. 잘 사냐고 묻고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 받은 뒤 나중에 꼭 보자고,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인 약속을 나눈 날 저녁 이 책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따.


작가의 두번째 창작집으로 표제작 <꺼삐딴 리>를 제외하면 신변잡기에 기반한 소설이 주종을 이룬다. 작가도 후기에서 세 편은 소품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하는데, 작가후기에 '그래도 이제부터 참말 써야 할 텐데......' 라고 끝맺는 부분이 뜻밖에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57879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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