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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삐딴 리 - 개정판
전광용 지음 / 을유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충매화. 1960년 8월 사상계>
여인의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여인은 충에게 미국에서 유행하는 인공수태가 가능한지 묻는다. 충은 인공수태가 실험단계이며 시설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어렵다고 답한다.
여인은 남편이 아버지뻘 된다고 했다. 7년 째 애가 들어서지 않아 남편이 밖으로 나돌아 슬슬 애가 타던 여인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남편을 충의 병원으로 데려와 검사를 맡는다. 검사결과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지만 여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다.
그때부터 여인은 충에게 원시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신에게 임신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충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느 순간 비뚤어진 마음이 되어 여인의 뜻대로 해준다. 자신의 정액을 관장기에 넣어 여인의 자궁에 넣는 방법이 성공할지는 의문이었다.
충은 자기가 왜 비뚤어진 마음을 먹었는지 생각한다. 유복자에 소아마비인 자신의 처지, 사귀던 여인 선희의 이별통보 등 괴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마 뒤, 여인이 충을 찾아와 태기가 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날 밤 여인이 충을 유혹하여 호텔에 들지만 술기운 중에도 충은 여인을 뿌리친다.
다시 충을 찾아온 여인이 인공수정은 되지 않았다고, 어린애를 낳고 싶었다고 울면서 고백한다. 충은 '참 제비도 더럽게 뽑았지. 하필이면 나 같은 것의 종자를 받으려구...... 피동이 아니라 능동으로, 이 여인에게 정확한 수태를 시켜야지' 라고 결심한다.
<초혼곡, 1960년 12월 현대문학>
서해안 작은 반도 구가곡 출신의 '나'는 T교수의 소개로 부잣집에 입주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 첫째 딸 영희는 공교롭게도 등교길에 가끔 만나 흠심을 품었던 여학생이었다.
어쨌든 막내 영식을 가르치는 1년여 동안 영희와 꽤 가까워진다. 또 문학소녀인 둘째 영숙이 '나'를 사모하는 마음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고백하지도 못했고, 영숙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했다. 모두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영식이 입시에 실패하자 '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군대에 갔다가 부상을 당한 뒤 제대한다. 그리고 얼마 뒤 우연히 영숙을 만난 '나'는 영희가 미국 유학하고 돌아온 의사와 결혼했다가 불행해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희는 가끔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영숙도 몹쓸 병에 걸려 시한부였다. 영숙은 '선생님만 계셔 주시면 산다'고 했지만 병은 뼛속까지 파고들었기에 나을 가망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영숙 앞에서 왈칵 울음을 쏟는다. 그것은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줏대 없는 왜소하고도 소극적인 자기 비굴에 대한 나 스스로의 새로운 넋을 부르는 통곡이었다. 스스로의 무덤에 항거하여 새로운 의지와 행동을 마련할 흘러간 역사에 대한 최후의 호곡이었다.
<바닷가에서 - 반편들-, 1962년 1월 사상계>
주문진에 오징어가 잡히는 철이 되자 사람 사태가 일어난다. 객줏집과 음식점 마다 일할 사람들이 몰려들어 먹고 써댔으며, 장삿집 주인들은 한껏 외상을 줬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고 오징어가 씨가 마르자 일순 분위기가 바뀐다. 밀린 밥값 안 내도 되니 제발 가달라는 분위기가 되버린 것이다.
울진노인도 일하러 왔다가 하릴 없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처지가 되었다. 명심이를 데리고 술장사하는 원산댁이 이를 듣고 딱하게 여겨 운전수에게 울진노인을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혈기방장한 운전수는 명심이만 원하는 대로 굴면 그러겠노라 했지만, 탄광패도 명심이를 불러대는 통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원산댁이 다치고 다음 날 화물차는 병원에갈 원산댁과 명심이, 그리고 울진노인을 태우고 출발한다. 4.3. 때문에 타향으로 흘러들어온 제주해녀 모녀가 바다로 향했고, 학생들은 모래사장에서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있었다.
<면허장 - 1962년 5월 미사일>
대학 진학을 앞둔 현숙은 고민이 많았다. 친구 영희는 체육과에 들어가 율동이나 하구 춤이나 실컷 추다가 쓸만한 놈팽이나 얻어걸려 시집가면 그만이라며 태평하게 결정했지만, 현숙은 그러지 못했다. 문학쪽을 전공하려 했지만 소설가인 아버지가 오히려 만류했다. 여자는 결혼해서 아내로 살 때 행복하다는 논리였다. 오히려 어머니가 '면허장 하나라두 타놓으면 바쁜 목에 써먹을 수 있다'며 약학과를 권유한다.
어쨌든 현숙은 약학과를 나와 약제사 면허증을 따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이 늦어졌는데, 우연희 영희 결혼식에서 재회한 김선생이 중매를 선다. 상대는 국영기업체에 다니는 남자였는데, 그는 현숙보다는 약제사 면허증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치 면허장과 결혼하려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현숙은 세파의 폭풍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과도히 예기한 결과 이해타산과 인간거래의 매개장인 면허장을 땄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존귀한 가보처럼 아담한 유리액자에 넣어 현숙의 방 뒷벽에 소중이 걸려 있던, 그의 조그만 사진이 한 귀에 붙은, 약제사 면허장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채 뜰 구석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꺼삐딴 리 - 1962년 7월 사상계>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로 유명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라는 점이었다. 초진에서 병에 앞서 우선되는 것은 환자의 병원비 부담 능력 감정이었다. 거기서 탈락하면 어떻게든 환자를 따돌렸다. 외상도 절대로 안됐다. 따라서 그의 병원 주 고객은 왜정시대에는 주로 일본인,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 속에 드는 축이었다.
그가 양복 호주머니에서 18금 회중시계를 꺼내 미국 대사 브라운과의 약속시간을 가늠한다. 시계는 제국대학 졸업 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으로 <월삼 17석> 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과거를 회상한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보냈는데 지금은 생사를 모른다. 딸 나미코, 아니 이제는 '코(子)'를 떼어낸 나미는 대학 영문과를 마쳐줬는데 미국 유학을 갔다가 외인교수와 눈이 맞았다. 코쟁이 사위를 보게 생겨 심사가 복잡하다. 후처 혜숙은 과거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였다.
1945년 8월 하순에 해방이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타도하자는 문구가 곳곳에 걸렸다. 이인국 박사도 치안대로 끌려간다. 그 6개월 전 사상범 춘석이를 응급치료만 해주고 입원실이 없다는 핑계로 쫓아냈는데 앙심을 품은 춘석이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 이인국 박사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감옥 내에 이질이 돌아 일손이 부족해진데다 소련 군의관들로 부터 솜씨를 인정받자 이인국은 슬며시 기회를 보아 소련군 장교 스탠코프에게 왼쪽 볼에 있는 혹을 떼내 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노어회화책을 끼고 노력한 덕에 어느정도 의사소통도 되었다. 마침내 수술이 성공하자 이인국 박사는 소련군 병사가 빼앗아간 시계도 되찾고 아들도 모스크바에 유학을 보낸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되자 남으로 내려온 이인국 박사는 이번엔 미국에 줄을 댄다. 상감진사 고려청자 화병을 들고 브라운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도 막히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는 이인국 박사였다.
<곽서방 - 1962년 10월 새나라>
남쪽 다도해 중 하나인 경도에 곽서방이 살았다. 벼 심는 논이라고는 권노인의 재너머 한섬지기와 곽서방의 아직 소금기가 다 빠지지 않은 간척지 닷말지기가 다였다. 가뭄이 계속되어 마을 사람들이 추렴쌀을 내어 돼지로 치성을 드렸지만 비는 아직이었다.
원래 곽서방의 간척지는 순돌네가 간척한 것이었지만 태풍으로 둑이 터져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자 싼값에 곽서방에게 넘긴 것이었다. 어쨌든 곽서방은 논을 소유했다는 기쁨이 컸다.
곽서방은 운산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농사꾼은 제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의 원조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의뢰심만 늘게 되는 것이지 실지의 보탬은 안됩니다. 해방 15년에 정부가 농민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운산은 7년 전 섬으로 들어와 마을 주민들에게 개량농법을 알려주며 자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농부였다.
그토록 소원하던 비가 내리자 곽서방은 운산이 알려준 방식으로 모내기를 한다. 얼마 뒤 서울 XX대학에서 자매부락을 맺는다면서 내려와 지원금을 내놓고 간다. 곽서방은 그런 지원이 고마우면서도 어쨌든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남을 의지하고 사느니보다 제 힘으로 기껏 살아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남국 박사 - 의고당 실기-, 1962년 11월 대학신문>
학문으로나 인격으로나 존귀하고도 거룩한 존재인 남궁선생은 사학자였는데 일본인의 왜곡된 선입감에서 이루어진 기존 학설을 근본적으로 전복한 공이 있었다. 하지만 겨레니 나라니 하는 시류에 결부시키는 것은 꺼리는 학자풍의 교수였다. 그런 남궁 선생이 정년 퇴임이 단축되는 정부시책에 의해 갑자기 교단을 떠나게 된다. 남궁선생은 식장에서 '... 별로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낸 이 사람에게 이런 기념품까지 주셔서...' 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얼마 후 유학을 떠나기 전 남궁 선생을 찾아가니 남궁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자신의 장서들을 밑천으로 동대문 시장에 헌책방을 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엄친의 <여유당전서> 를 나에게 건낸다.
<모르모트의 반응, 1964년 5월 사상계>
3대 독자인 허진의 아들 윤이 개에게 하필이면 거기를 물린다. 잘라진 살가죽을 수습해 병원으로 가면서 허진은 아내에게 불구가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냐며 한탄한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분까지는 잘리지 않아 윤의 생식기능은 이상이 없도록 조치가 된다. 뒤늦게 허진은 '어디, 사람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 성이나 생식이 전부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제3자, 1964년 7월 문학춘추>
석구는 최근 난희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다. 난희와 원우를 중매선 게 화근이었다. 난희는 매일같이 원우와 사네 못사네 한탄을 하였고, 종내는 이혼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원우가 바람난 대상이 석구의 일가인 정아라며 볶아댔다. 석구도 처음엔 어떻든 간에 좋은 해결을 보려 노력했지만 종국엔 마음대로 하라며 나가떨어지고 만다. 며칠 후 원우와 난희가 나란히 포도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석구는 속으로 '연놈들 변덕도 참...'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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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도에 인천에서 사촌형, 사촌누나와 함께 살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사촌누나가 을유사에서 나온 이 책을 사들고 왔다. 읽고 독후감을 레포트로 제출해야 하는데 대신 써주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했는데 써줬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그해 여름에 나는 사촌들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큰형과 자취를 하게 되었고, 2~3년 뒤부터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촌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25년만인 것 같다. 잘 사냐고 묻고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 받은 뒤 나중에 꼭 보자고,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인 약속을 나눈 날 저녁 이 책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따.
작가의 두번째 창작집으로 표제작 <꺼삐딴 리>를 제외하면 신변잡기에 기반한 소설이 주종을 이룬다. 작가도 후기에서 세 편은 소품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하는데, 작가후기에 '그래도 이제부터 참말 써야 할 텐데......' 라고 끝맺는 부분이 뜻밖에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57879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