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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평점 :
나가미네 시게키는 아내를 여읜 뒤, 딸 에마가 커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학교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 에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미네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메뉴얼에 따른 미온적 대처 외 적극적 개입은 없었다.
며칠 뒤, 아라카와 강 하류에서 에마의 시체가 발견된다. 벌거벗은 채 발견된 에마의 사인은 급성 신부전. 마약 과다 투여에 의한 사망이었다.
범인은 동네 양아치 일당 스가노 가이지, 도모자키 아쓰야, 그리고 이들에게 협박 당해 자가용을 빌려주고 심부름을 하는 나카이 마코토였다. 스가노 가이지는 클로로포름으로 에마를 질식시켜 납치한 뒤 각성제를 먹이고 강간 하였으며, 이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 보관하는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 마약이 과다 투여된 에마가 정신을 잃고 사망하자 가이지와 아쓰야는 에마의 시신을 마코토 아버지의 차에 싣고 가 강가에 유기했다.
뉴스를 통해 가이지와 아쓰야가 납치한 여자애를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코토는 고민 끝에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변조한 뒤, 범인은 스가노 가이지와 도모자키 아쓰야라고 밝히고, 주소와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를 알려준다. 나가미네는 익명의 제보자 말에 따라 아쓰야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다가 딸이 강간 당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하고 분노에 휩싸인다. 귀가한 아쓰야와 맞닥뜨린 나가미네는 식칼로 아쓰야를 찔러 사망케 한 뒤 분을 참지 못해 성기를 절단하고, 공범 가이지가 나가노의 펜션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떠났다는 말에 따라 엽총을 들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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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범죄 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소년은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피해자의 슬픔이나 억울함은 반영되지 않고 실상은 무시되었다. 공허한 도덕관일 뿐이다..... 범인 체포로 이어진다 해도 자세한 경위는 설명해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 범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채 재판이 시작되고 유족 입장에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범인은 대단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89p)
도모자키 아쓰야를 죽인 것을 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한이 풀렸냐고 물으시면 그럴 리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더 분했을 겁니다.
도모자키는 미성년자입니다 게다가 고의로 에마를 죽인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알코올이나 마약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었다고 변호사가 주장하면 도무지 형사처벌이라 할 수 없을 가벼운 판결이 내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미성년자의 갱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피해자 측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빤합니다...... 한번 생긴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갱생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은 피해자들 속에 남아, 영원히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183-184p)
<방황하는 칼날>은 2004년 12월 일본에서 출판된 후 갱생을 주 목적으로 하는 소년법에 대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나가미네를 돕는 펜션 여주인 와카코의 불안과 안타까움, 나가미네 체포는 곧 강간살인범 가이지에 대한 낮은 처벌로 이어지는 걸 알고 고뇌하는 형사들의 양가적 감정 등이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져 시종일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법과 제도가 있으니, 바로 촉법소년과 주취감경 문제다. 피해자나 유족의 상처와 아픔이 가해자의 나이가 어리다 해서 회복되는 것도 아닌데 처벌을 면하게 해주거나, 술 취해 저지른 행동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감경시켜 주는 이러한 제도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특히 법 집행 기관인 경찰과 최종 판결 기관인 법원이 객관성을 담보하기는 커녕 그들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주권자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하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대한민국에는 '방황하는 칼날'을 붙들어 줄 제3의 존재가 아예 없는 공(公)권력 부재 상태나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 하에 <방황하는 칼날>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느 부모가 형사와 법의 판단을 믿고 시스템에 의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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