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타, 연인을 맞이하다
비르기트 반더베케 지음, 황규종 옮김 / 디오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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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체빌>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에 알베르타와 나단은 체육대회를 위한 합숙소에서 만난다. 둘은 한밤의 하이킹에서 구덩이에 빠지지만 서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고, 알베르타와 나단은 각기 다른 사람과 사귀게 된다. 나단은 알베르타를 미체빌(재앙)이라 부른다.

삼 년이나 사 년에 한번씩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승천일을 얼마 앞두고 알베르타와 나단은 도망친다. 도망의 이유는 열렬한 사랑에 굴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찾아든 모텔에서 사소한 것들로 충돌한다. 가을에 나단은 천문학 일을 하기 위해 애리조나로 가고 알베르타는 리용으로 간다.

 

<장 필립>

프랑스에서 남편 장 필립, 딸 쎄실과 함께 사는 독일인 소설가는 '나'는 자신의 소설 <미체빌>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남편은 고약한 이야기라 평한다. 남편의 평에 알베르타와 나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계속 머리속에서 전개시킨다. 딸 쎄실이 아파서 바닷가로 내려가 생활을 하며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은 바닷가 생활이 따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바닷가로 왔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반대편에서 차를 운전해 오는 수염 기른 나단을 발견한다.

 

<알베르타, 연인을 맞이하다>

알베르타는 나단의 아이를 낙태하고 둘은 헤어졌었다. 몇 년간 연락이 끊어졌었는데 어느 날 자동응답기에 나단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하겠다는 그의 말에 알베르타는 여러가지 상념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단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생각을 진행시킨다. 알베르타는 그와의 대화가 엇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선 안되는지, 어떤 말을 하는게 좋은지 고민한다. 마침내 나단이 집으로 찾아오는데 그는 자신이 결혼했고, 아내가 만삭이라는 말을 꺼낸다. 알베르타는 예전에 나단과 나두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것은 남자의 이중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식사를 마친 후 나단은 "아, 헌데 말이지. 나는 물론 내 아내를 사랑해." 라고 말하며 관계를 갖고 싶어 왔지만 그 이상의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알베르타는 늦었다는 말로 나단을 내보낸다.

 

싫어하는 부류의 소설이다. 2장에서 소설가가 '소설 속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인 나단을 발견하는 장에서 극에 달했다. 남녀 사이의 미묘한 엇갈림에 관한 세세한 묘사도 별로 공감가지 않는다. 치약을 중간에서 짜느냐 끝에서부터 짜느냐로 싸우는 부부 이야기를 길게 늘여놓은 느낌이다.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기 때문에 독서행위는 긴장을 요하는데 반해 그려지는 그림은 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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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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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안관 벨은 헌츠빌에서 한 소년을 가스 처형실로 보냈다. 그는 소년의 말과 행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안톤 시거는 산소 탱크에 스턴건을 장착해 무기로 사용하는 자다. 그는 수갑을 찬 채로 부보안관 한 명을 살해한다.모스는 사막에서 영양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마약 거래 현장을 지나게 된다. 그는 24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한밤중에 죽어가던 멕시코인이 물을 달라던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현장으로 갔다가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모스는 아내를 친정으로 보낸 후 도주하고, 안톤 시거는 모스가 가진 가방에 부착된 트랜스폰더를 추적하고, 벨은 모스와 시거를 추적한다.

 

모스는 베트남 참전 경험과 영리한 머리를 사용하여 신중하게 처신하지만 안톤 시거의 추적이 점점 좁혀 온다. 마약 거래의 다른 한쪽이 웰스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한다. 시거에게 총상을 입고 멕시코 병원에 입원한 모스를 찾아간 웰스는 자신에게 돈가방을 넘기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웰스 역시 시거에게 간단히 제거당하고 모스는 다시 도주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가출 소녀를 태우고 동행하던 모스는 결국 시거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한다. 벨은 모스와 어린 소녀 사이에 부적절한 일이 없었다는 점만이라도 모스의 아내에게 이해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시거는 모스의 아내를 찾아가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이미 모스가 죽었으니 자신을 죽일 필요는 없다는 그녀에게 시거는 자신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며 살해한다. 마약을 먹고 질주하던 차가 시거의 차를 들이받아 시거는 심한 상처를 입지만 경찰이 오기 전에 사라진다. 벨은 보안관직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아저씨를 찾아가 자신이 받았던 부끄러운 훈장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버지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

 

각 장의 시작은 보안관 벨의 상념으로 시작되고, 그후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잔혹한 사건들이 서술된다. 안톤 시거는 불가항력적이고 무적이고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벨은 그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정말로 존재하는 유령과 같다'고 말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특정한 일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결코 그것에 대적할 상대가 못 된다'고 깨닫는다고 생각한다.

모스와 웰스는 둘 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모스의 아내는 모스가 똑똑하기 때문에 일을 잘 마무리지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웰스 역시 프로로 고용된 자다. 하지만 그들은 시거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시거는 부상도 사소한 일을 당한 것처럼 스스로 치료해 가면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시거는 고속도로 휴게소 주인을 살려준다. 동전던지기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모스의 아내는 죽인다. 그녀는 동전던지기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거는 운명을 관장하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련한 보안관 벨 역시 그를 잡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거는 엉뚱하게도 마약에 취한 10대가 운전하는 차에 받혀 죽을 위기를 넘긴다. 죽음을 관장하는 시거 마저도 마약에 취해 날뛰는 10대에게는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일까?

작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이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에서 따왔다고 밝히며 시의 전문을 권두에 싣고 있다.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봤지만 시 자체거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다만 '...늙은 사람이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다만...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한 번 자연에서 벗어난 후엔...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노래해 준/형상만을 취하리라' 하는 시구에서 생각해볼 여지는 있는 듯 하다.

소설의 매 장 첫머리가 벨의 상념으로 시작하고 벨은 은퇴를 앞둔 노인이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모스의 아내에게 위험을 경고해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작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현실은 시거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휩쓸고 갈 뿐이고, 기껏해야 그런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도 마약에 취한 10대의 질주와 같은 우연적인 사건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제어불가능하고 우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끔찍한 세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영혼과 지혜를 갖춘 '노인'이 이런 광기와 우연을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을 지은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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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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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사태가 일어난지 4년 후, 선거에서 대량의 백지투표가 발견된다. 우익정부는 즉시 계엄을 선포한다. 백지투표를 해서는 안된다는 어떠한 법령도 없고 그것이 위법이라는 근거 역시 전혀 없지만 정부는 수도를 버리고 감시초소를 세워 누구도 들어가거나 빠져나올 수 없도록 한다. 하지만 수도는 동요에 빠지기는 커녕 평범한 일상 생활을 영위할 뿐이었다.

안달이 난 정부는 폭탄을 떠뜨리고 그것이 백지투표 행위를 부추긴 자의 소행이라고 발표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항의할 뿐이었고, 당의 핵심인물인 시장마저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고 만다. 우익정당과 중도정당에 투표한 소수 시민이 수도 경계를 넘으려 하자 정부는 그들의 집을 백색투표 행위자들이 약탈할 것이라 위협하여 내분을 꾀하며 돌려보낸다. 하지만 되돌아 온 그들을 시민들은 덤덤하게 도와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4년 전 실명사태가 전국을 휩쓸 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성이 있었고 그녀는 당시 살인을 저질렀으며 어쩌면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투서가 날아든다. 정부는 즉각 세 명의 경찰을 수도로 잠입시킨다. 수사 책임자인 경정은 투서를 보낸 사람을 만나고 당시 그녀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조사한다. 하지만 조사로 드러난 점은 의사 부인이었던 그녀가 격리 수용된 병원에서 강간범 우두머리를 살해하여 여성들의 존엄성을 지켜냈고 사람들을 생존시키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경정은 이 사실을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했으나 내무부장관이 원하는 것은 그녀와 백색투표의 배후를 연결시키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었다. 결국 경정은 사진을 넘겨준 후 수사에서 제외된다. 경정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녀에게 정부가 획책하고 있는 바를 알려주고 언론사에 진실을 전한다. 진실을 실은 신문은 다음 날 폐간되고 사람들은 신문기사를 복사하여 삐라처럼 뿌린다. 경정과 그녀는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총리는 내무부장관이 너무 멀리갔다고 생각하여 해임하고 그 자리를 겸임한다.

 

처리할 일들이 있어 오늘 연가를 냈기 때문에 어제 밤 2시까지 출근 걱정 없이 읽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단 한명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쉼표만으로 지리하게 서술해나기 때문에 읽다보면 누구의 대사인지 헤깔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의도로 생각된다. 독자는 맥락을 통해 누가 한 말인지 파악할 수 있기도 하고, 누구의 대사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독자가 의식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참여하여 누구의 대사인지 판단하게끔 유도하는 듯 하고, 누구의 대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누구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효과를 노리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큰 틀에서 계급이나 계층의 일원, 혹은 어떠어떠한 인간성을 지닌 누군가로서의 인간이 중요한 것이지 이름으로 특정지어지는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 좀더 우의적이고 모호한 면이 많다. 수도 주민들이 정부의 탈출에도 불구하고 정상 생활을 영위해 가는 상황은 일면 무정부주의자적 낙관으로 읽히는데, 이것이 작가의 진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인지 아니면 역으로 진보에 대한 비관의 투영인지는 모호하다. 역자 정영목 역시 '짖자, 개가 말했다'로 시작한 책이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로 끝나는 것이 왠지 불길하기 짝이 없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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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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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 이수명이라는 남자가 정신보건심판위원회에 출석한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 자가 스스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그곳에서 이수명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신림책방을 하는 아버지 가게에 기식하는 주인공 '나' 이수명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어머니 역시 정신병으로 시달리던 어느 날 욕조에서 가위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하지만 환청은 어머니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라고 속삭이고, 수명은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 되는 어느 날,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여자에게 말을 건 행위가 성추행으로 오인을 받자 아버지는 수명을 강원도의 수리희망병원에 입원시키며 '이번에 가면, 죽기전엔 못 나온다'고 말한다.

입원한 수명은 그곳에서 4인실을 배정받는다. 환자는 '라이터(사이코패스)'로 분류되어 탈출 기회를 노리는 류수명, '바이폴라(조울증)'이고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말 많은 김용, 써커스단에서 '또별'이라는 이름의 말을 타며 재주를 부렸으나 이제는 사람을 '또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만식씨, 그리고 '스키조(정신분열증)'이고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켜 머리를 기른 미스리 이수명이 한 방을 쓰게 된다.

한편 의사로는 범죄심리학자이며 강압적인 성격의 '렉터박사'가 있고 그 밖에 대학병원에서 파견나온 의사, 공보의 등이 있다. 간호사로는 환자를 객관적이고 양심적으로 대우하려 하는 최기훈과 이와는 정반대의 윤보라, 그리고 보호사와 진압조 등이 있는데 그 중 점박이라는 별명의 오너 조카는 폭력을 내세우며 월권을 일삼기 일쑤였다.

어느 날 승민이 양말에 시계를 넣어 최기훈을 공격한 후 탈출하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수명은 혼란한 와중에 승민의 시계를 몰래 숨겨준다. 이 사건으로 승민은 수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승민은 재벌가의 샛부인 자식으로 어렸을 적부터 미국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글라이더를 배우며 자유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덜컥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유언으로 승민에게 큰 덩어리를 남겨 준다. 승민 몫이 탐이 난 가족들은 승민이 어렸을 적 방화를 한 전력이 있음을 이용, 누명을 씌워 수리희망병원에 강제 입원을 시키는 모종의 계획을 꾸민 것이다.

승민은 탈출을 시도하는 한편 바깥 쪽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어느 날 눈에 큰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그가 그렇게 조바심을 낸 것은 시력이 점점 상실되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의 생을 글라이딩을 하며 마감하고자 했다.

외부 차량 탈취 계획을 돕던 수명은 승민과 함께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마음을 바꾸고 둘은 어렵사리 수리봉 정상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수명은 잊고 있었던 기억 한자락을 끄집어 낸다. 그것은 신림책방에서 포의 소설에 빠져들어 어머니가 자해하지 못하도록 취해야 할 조치들을 소홀히 했고, 결국 자신이 남겨둔 가위로 어머니가 일을 저질렀다는 기억이었다. 수명은 그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며 침잠해들어가기만 했던 것이다. 지인이 숨겨놓은 글라이더를 타고 승민은 비상하고, 수명은 탈진상태에서 발견되어 공주감호소에 수용된다. 그리고 4년 후 정신보건심판위원회에 출석한 수명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고 트위스트를 추자는 승민의 환청에 한바탕 춤을 추고 '넌 누구냐'는 물음에 팔을 벌리고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며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고 답한다.

 

처음은 잘 읽히지 않는다. 심사위원평 역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나의 경우는 최근 소설들의 양태와 맞물린 선입관이 한 몫을 한 것 같다. <철수사용설명서>와 같은 조악한 말장난 소설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이 소설 역시 그런 부류인가 아닌가 판단이 들지 않아 몰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소설은 치밀한 구성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어 처음 접하는 작가였으나 꽤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말장난을 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점은 예전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읽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던 기억과 대비되었다. 말장난 자체에 작가 스스로 '재미있지?' 하고 묻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점은 미덕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수리희망병원, 혹은 정신병원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유독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먼저 이 책의 정신병 환자들은 전혀 정신병 환자 같지 않다. 정신분열증 환자인 화자도, 조울증의 김용도 모두 그냥 보통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한이와 지은이의 경우 침을 흘리고 의사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도 '장애'의 형태로 다가올 뿐이다.

그건 이야기 전개를 위해 그랬다 치더라도 의사, 간호사, 그리고 보호사에 관한 시각은 자기검열의 냄새가 너무 난다. 먼저 의사는 랙터 박사, 공보의, 대학에서 파견나온 의사가 있고 간호사는 윤보라와 최기훈이 있으며 보호사 등 일꾼들은 점박이 등이 있는데, 이들의 행동이 모두 개인적 특성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이때문에 부조리한 처우와 지은이에 대한 윤간, 환자에 대한 상시적인 폭력이 등장하면서도 그것이 곧 정신병원 시스템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애써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최기훈이다. 그는 환자에게 정당한 처우를 해주려 하고, 양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간호사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병원 시스템에 매여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인권에 반하는 행동도 하고 ECT 처치에 대해서도 자신없는 말로 변명한다. 또 병원에서 일어난 윤간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일관성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최악의 진흙탕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고, 인간적인 면에서는 흔들리는 인물인 최기훈은 어쩌면 작가의 '동업자 의식'이 투영된 인물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작가가 간호사와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심사직을 거쳤다고 하니, 과거 자신 혹은 동료를 그리는 데 있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병원 시스템 전체에 칼날을 들이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K.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같이 '정상인이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감금당하고 권력으로 표징되는 정신병원으로부터 탈출하려하다 좌절한 후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자가 된다',하는 이미 쓰여진 이야기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도망쳐온 기억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시작하는 이수명의 이야기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고, 작가의 경험과 연구, 그리고 재기발랄하면서도 난체 하지 않는 문체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좋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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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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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와 피트, 조지, 그리고 딤은 '코로바 밀크바'에서 마약이 든 우유를 마시고 지나가는 노인의 책을 빼앗아 찢고 구타한다. 그리고 '뉴욕 공작' 술집에 들어가 나이든 할머니들에게 술을 사 돌리는 것으로 알리바이를 확보한 후 강도짓을 한다. 길거리에서 빌리보이 패거리를 만나 체인과 나이프가 오가는 패싸움을 벌인 후 집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다.

어느 날인가는 외딴 집에 난입하는데 집 주인은 작가로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원고를 집필중이었다. 알렉스 일당은 작가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윤간한다. 그리고 얼마 후 패거리는 홀로 사는 할머니 집을 털기로 하는데 먼저 들어간 알렉스가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 할머니를 폭행치사하고 나머지 패거리는 알렉스를 배신한다. 14년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갖힌 알렉스는 감방 안에서 또 다시 살인에 휘말리고, 정부는 알렉스를 '루도비코 요법'이라는 새로운 갱생요법의 첫 희생자로 삼는다. 일종의 조건반사의 응용인 '루도비코 요법'은 폭력, 강간, 살인, 방화 등 범죄와 관련된 영화를 틀어주고 강제로 보게 하는 한편 그것을 볼 때마다 신체에 고통이 오게 만드는 방법이다. 알렉스는 이주일간의 요법으로 선과 악을 선택하는 능력이 거세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마저 요법 시행 중 함께 듣는 바람에 더 이상은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출옥 후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는 엉뚱한 녀석이 하숙생으로 들어와 알렉스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자신을 배신한 딤과 라이벌이었던 빌리보이는 경찰이 되어 있었다. 시외로 끌려가 딤과 빌리보이에게 두들겨 맞은 알렉스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은 예전에 알렉스가 난입하여 강도질과 강간을 했던 <시계태엽 오렌지> 작가의 집이었다. 작가의 아내가 그때 사건으로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알렉스는 언행을 조심하지만 작가는 알렉스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만다. 작가와 동료들은 새로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알렉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시내 모처에 가둬두고 음악을 틀어대자 알렉스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알렉스를 두고 언론은 '루도비코 요법'의 희생자라고 연일 보도했고 내무부장관은 알렉스를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또다시 패거리를 지어 '코로바 밀크바'와 '뉴욕 공작' 술집을 전전하던 알렉스는 예전과 달리 어린애 사진을 지갑에 넣어다니기도 하고, 전과 같이 폭력에 흥분하며 온 몸을 내맡길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먼저 봤었는데 충격적이었고 불쾌했었다. 기괴한 가면과 현란한 복장의 패거리들이 폭력과 고문, 윤간을 벌이는 장면을 별다른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마저 일었던 기억이 난다.

작품은 두 층위의 폭력을 보여준다. 첫째는 일상적인 강도질과 강간에 물든 알렉스 패거리의 폭력이고 두번째는 사상범을 가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세해버리고 '태엽'을 장착해 기계같은 인간들을 양산해 내는 정부의 폭력이다. 첫번째 폭력이 덜 역겨운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화자'라 칭하는 알렉스와 독자의 심리적 친밀함은 정부의 폭력이 더욱 부도덕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작가의 방식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소설과 영화는 극단의 찬사와 비판에 직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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