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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의 <영국 왕을 모셨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 한 문장 덕분에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디테는 처음에 프라하 호텔 점원으로 일했다. 정식 웨이터는 아니고 기차역에 나가 핫도그를 파는 일이었다.
기차 승객들은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디테는 잔돈 내주는 시간을 질질 끄는 수법으로 꽤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라이스키('천국의'라는 뜻의 체코어) 창녀촌에 갔다. 디테는 그녀들이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느꼈고, 그녀들의 아랫배 주위를 꽃이나 나뭇가지로 장식하곤 했다. 그녀들도 그런 디테를 어엿한 신사로 대접해준 것은 물론이다.
디테는 어느 정도의 돈과 솔직한 태도만 있으면 행복이 손에 들어올거라 믿고 큰 성공을 거두리라 다짐한다.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소설의 한 단락은 이렇게 끝나고, 다시 마법 같은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가 시작된다.
디테는 프라하 호텔에서 사귄 사업가 발덴 씨의 추천으로 티호타 호텔로 일자리를 옮긴다. 티호타 호텔 사장은 거구에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며 직원을 부를 때 호각을 불어댔다. 호각을 부르면 사방에서 직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장 앞으로 달려갔다. 또 덩치가 우람한 호텔 포터가 있었는데,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댔다. 또 번 돈은 모두 써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좋은 지배인 즈데네크씨가 있었다.
어느 날, 볼리비아 사람들이 프라하 아기 예수상(밤비노 디 프라가)의 축성을 받기 위해 티호타 호텔에 머무는데, 가짜 예수상과 바꿔치기 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디테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오인받아 티호타 호텔을 떠나게 된다.
다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호텔 파리였다. 그곳은 지금까지 일한 호텔보다 규모 면에서나 설비와 품격 면에서나 훌륭한 곳이었다. 그곳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씨는 대단한 인물로 웨이터복이 썩 잘 어울렸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시킬 음식과 서비스를 여지없이 알아 맞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디테의 물음에 그는 "영국 왕을 모셨으니까!" 라고 답했다.
디테는 스크르지바네크씨로부터 지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술들을 차분히 습득하는 한편, 손님들이 두고간 고급 넥타이를 착용하고 자세를 바르게 해서 작은 키를 극복하려 애썼다.
어느 날, 호텔이 보유하고 있는 금식기를 사용하기 위해 아비시니아 황제 일행이 방문하게 된다. 디테는 황제를 잘 보필했지만 행사가 끝난 뒤 금티스푼 하나가 모자라자 제일 먼저 의심 받게 된다. 게다가 아비시니아 황제가 자신을 잘 보필해주었다며 디테에게 훈장을 내려줬기 때문에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시샘을 받게 된다. 결국 디테는 호텔 파리를 떠난다.
호텔 파리를 그만두기 전, 디테는 독일인 여성 리자를 체코 민족주의자들(극우성향의)로 부터 구해주려다 폭행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디테와 리자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독일이 체코를 침공한 것이다.
그래서 디테는 자신의 이름을 독일식인 디티에로 바꾸었다. 다음으로 재판장과 의사, 에스에스 대원들 앞에서 아리아-게르만 혈통을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검사를 위해 자위를 했다. 그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프라하 뿐 아니라 브로노, 그밖의 사형집행법이 있는 전국 모든 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어쨌든 디테는 리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독일인도, 체코인도 디테를 축원해주지 않았다.
리자는 독일군을 따라 전장으로 떠났다. 그녀는 전장에서 유태인들의 학살 현장을 뒤져 매우 값 비싼 우표들을 약탈해왔다. 중간중간 아내와 만나 관계를 갖었기에 지크프리트라는 아들을 낳을 수 있었지만 아이는 성장이 더뎠고 온종일 못과 망치만 갖고 놀았다.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올 무렵, 디테는 볼셰비키로 오인되어 체포된다. 그는 차라리 그편이 체코 해방 시국에 유리하리라 생각했다. 오해로 밝혀져 유치장에서는 풀려났지만 그의 아내는 폭격을 맞아 사망한 뒤였다. 디테는 아들을 버리고 우표만 챙겨 도망간다.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디테는 게슈타포 지휘관의 주소를 밀고한다. 디테는 애국자들이 처형당할 때 나치 관청에서 예의 그 수음을 한 죄로 반년 형을 언도 받는다. 형을 살고나온 디테는 아내가 준 우표로 프라하 근교에 방기된 거대한 채석장을 사서 호텔을 짓는다. 호텔은 장사가 잘 됐고,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여전히 체코인들은 그를 멸시했고, 무시했다.
체코가 공산화 되어 재산이 몰수되고 백만장자들은 감옥에 가게 된다. 디테는 명단에서 빠졌지만 자진신고 형식으로 노동교화형을 받게 되고, 사람들이 꺼리는 오지로 자원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랑말, 고양이, 염소 등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들이 잘 지나지 않는 산간도로를 보수하면서 단순하고 평온하게.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디테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남들보다 키가 작아 고민인 얀 디테(Jan Dítě)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은 돈을 벌어 아름다운 여성과 관계하는 단순한 것이다. 그 아름다운 여성이 정숙한 부인인지 창녀인지, 체코인인지 독일인인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욕망의 집합소인 호텔에서 디테는 천진난만하게 일을 배운다. 사장이 호루라기로 종업원을 통제하고, 보여주기 위한 장작을 패는 포터(무장권력)를 통해 호텔 경영방침을 전달하는 그곳에서.
하지만 그는 티스푼 도둑으로 몰리고, 체코 애국청년들에게 폭행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리고 문제의 수음 장면이 등장한다.
전국에서 체코 애국자들의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그 순간, 디테가 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나치 앞에서 정액을 받아내기 위해 골몰하는.
작가는 한 걸은 더 나아가 체코의 사회주의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싸잡아 비아냥 대는 장면도 삽입한다.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이런 장면이 (체코)독자들이 모욕을 느꼈을 법한 부분이다. 아울러 작품의 논쟁적 성격을 한층 부각시키는 지점이다.
망치와 못(공산주의의 상징)을 가지고 노는, 그야말로 독일적인 이름을 가진 저능아 지크프리트. 디테가 지크프리트를 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장면은 '역사보다 우선하는 개인의 욕망'을 탐구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듯 하다. 하지만 개인이 무슨무슨 주의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고자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래서 작품에서도 디테는 사람들이 없는 오지로 들어가 조랑말, 고양이, 염소와 함께 살며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흡족하셨느냐는 디테의 물음에 나는 '조금 아쉽다'고 답할 수밖에...
** 체코 정부는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을 출간 금지 시켰고, 작품은 사미즈다트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사미즈다트(자기출판, 지하출판)는 작가가 직접 타이핑한 작품 한 부를 지인들에게 돌려 읽히면 읽은 사람은 한 부 더 타이핑하는 식으로 보급하는 방식이다. 일부 청년들과 동료 문학인도 보후밀 흐라발의 책을 불태우거나 비난했다.
1975년 잡지 Tvoba 인터뷰를 통해 자아비판을 수행하고서야 그의 작품이 다시 인쇄될 수 있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93084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