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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한유진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어머니의 방까지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고, 방 안에는 어머니의 시체가 있있다.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었고 가슴에는 손이 모아져 있었다. 살인자는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
의붓형제 김해진이 곧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전화로 알려왔으므로 한유진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경찰에 신고할 것인지. 시체를 치울 것인지. 그리고 그 대답은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재킷과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어머니 쪽으로 돌아섰다. 피 웅덩이에 반듯하게 누운 어머니가 나를 맞았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비로소 간과해버린 사실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어머니의 자세는 살해당한 시신으로서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목을 베이고 피를 쏟아내며 쓰러진 사람이 스스로 머리채를 풀어 얼굴을 가리고, 손을 가슴에 모은 다음, 반듯하게 누워 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48p)
소설은 게임 Doom 이나 Resident Evil의 첫 장면처럼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로 혼란을 느끼다가,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 둘 떠오르자 차츰 상황 인식에 이르는 도입부.
게임의 배경과 법칙을 소개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플레이어(독자)가 맞닥뜨릴 범상치 않은 전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안배하는 이 도입부. 도입부에서 제시된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한 단서를 잘 배치한 뒤, 종반부에서 성공적으로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면 게임(소설)은 성공할 것이다.
정유정은 이러한 구성과 진행에 매우 능수능란한 작가임이므로 이제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우물'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약물중독자들은 대부분 환상을 좇느라 약을 먹는다. 내 경우는 반대다. 환상을 얻으려면 약을 끊어야 한다. 끊은 지 얼마 후면 마법의 시간이 열린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게 돌아가고, 생각 대신 직관으로 세상을 읽어들인다. 내가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낀다. 인간이 만만해진다.(16p)
한유진은 약을 먹고 있다. 그 약은 주치의이자 저명한 정신의학자, 미래아동청소년 병원 원장인 이모가 처방한 약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약을 먹는가? 작가는 사건 해결의 단서를 조금씩 독자와 공유한다.
비로소,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이유가 이해됐다. 내겐 신나고 짜릿했던 영화가 사실은 찜찜하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서워하고 슬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67p)
네 형과 아빠가 바다에 빠져서 죽었어. 그것도 내 눈앞에서. 나는 그날 울산에서 너까지 그런 식으로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하나 남은 아들마저 기어코......(142p)
어머니가 그토록 빨리 선수 교체를 해버릴 줄은 몰랐다. 입양 이야기를 꺼낸 지 단 이틀 만에 모든 게 준비될 줄도 몰랐다. 어머니의 영원한 에이스일 줄 알았던 유민 형의 자리는 고스란히 해진에게 넘어간 걸로 보였다.(106p)
한유진은 사이코패스로 '리모트' 라는 간질, 조울증, 행동장애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 아버지와 형은 사망했고, 김해진은 어머니가 입양한 의붓형제다. 16세 까지만 해도 한유진은 수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약을 끊으면 경기력이 향상되었기에 그렇게 했다가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발작을 일으킨다. 한유진은 현재 운동을 포기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준비중이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그런 평온한 일상과 무관한 단서들이 문제다.
매끈한 진주 표면에 불거진 작은 돌기의 감촉이 신경에 거슬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촉의 기시감이 거슬렸다...... 언제, 어디서 이런 걸 만져봤을까.(152p)
근데 모양이고 나발이고 설명할 것이 없는 게, 달랑 진주만 있는 귀걸이였거든(167p) 나는 겁먹은 것에 끌렸다.(188p)
그렇다. 한유진은 약으로 통제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미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약을 끊었을 때 느끼는 해방감, 인간을 살해할 때 느끼는 신이 된 것 같은 충족감.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259p)
어머니, 이모, 의붓형제를 모두 해치운 새로운 종(種) 한유진은 이제 가볍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채워 놓은 감정이라는 족쇄를 훨훨 벗어 던지고.
감정을 없애면 선택의 무게는 신발을 사는 일만큼 가벼워진다. 목적과 비용의 상관관계만 따지면 될 테니까.(347p)
성서에 따르면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고, 둘이 한자리에 들어 낳은 아들이 카인이다. 그런데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인류 최초의 살인자다.
창조되지 않고 잉태되어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 '신이 되는 느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행위로 '살인'을 택한다는 이 이야기는 언제 읽어봐도 흥미롭다.
여호와가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한다. 여호와는 카인에게 벌을 내리는데, 카인은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용서를 빈다.
그러자 여호와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고 카인을 죽이려 하는 사람에게는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겠다고 선언한다.
<종의 기원>은 사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현대적 변형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문학이란 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혼의 문제를 다룬다 함은 외로움이 전제 조건입니다. 혼이란 깊은 우물이나 구멍 같은 것으로 성격적으로 파탄이 난 사람들이 그 구멍을 들여다 봅니다. 문제는 그 구멍의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인데, 중요한 것은 반드시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정유정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데 능수능란하다. 그 깊이 또한 상당히 깊어서 소설은 꽤 완성도가 느껴진다.
문제는 그 우물들이 이미 발견된 우물이라는 점과, 다시 올라오는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발견한 우물을 공유하고 있는 <네 심장을 쏴라>, 고유정 사건을 능숙한 필치로 그려낸 <완전한 행복>, 그리고 고전적인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원형으로 <크리미널 마인드>의 아무 에피소드에서나 나올법한 사이코패스를 버무린 <종의 기원>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 약점들 탓에 정유정을 최고의 작가들 반열에 올리기가 어렵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82586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