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손홍규 장편소설
손홍규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멀지 않은 미래, 폐허로 변한 서울. 소년과 동생이 길을 걷고 있다. 동생은 헬멧을 쓰고 있다. 

건물은 붕괴 되었고, 짖지 않는 개들이 사람을 습격했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 것 같다. 낮에만 활동할 수 있는 기형이 된 자들이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리고 짐승이 있다. 짐승은 집요하게 자신이 점찍은 사람들을 뒤쫓는다.

소년과 동생이 노인을 만나고, 소녀와 여자를 만난다. 

밀려난 자들이 작은 위안을 나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위태롭다. 

군화 신은 암살자가 습격한다. 암살자는 소년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둔다.

얼마 뒤 동생이 끌려가고, 소녀가 그들을 따라간다. 짐승이 동생과 소녀를 데려간 무리를 뒤쫓고, 소년과 노인이 그 뒤를 따른다. 

여자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 큰 절망과 작은 희망을 품는다. 

암에 걸린 노인이 짐승을 처지하려다 목숨을 잃고, 소년 역시 군화 신은 암살자의 동생에게 살해 당한다.


서울이라는 제목만 보고 구입한 두 권의 책 중 한권이다.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에서 실망감을 맛봤다면, <서울>에서는 당혹감을 느꼈다. 

소설은,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이 되어버린 공간을 이야기한다. 영화 <28일 후>와 같은 음울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돌연변이가 된 자들과 짐승의 공격을 받는다. 소년과 동생이 목적지로 삼은 남쪽도 서울과 마찬가지인 상황임이 밝혀지자 그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린다. 

작가는 서울이 폐허가 된 이유에 대해, 동생이 헬멧을 써야하는 이유에 대해, 살아있는 생명체가 죄다 기형을 낳는 이유에 대해, 함구한다. 대신 서사 중간에 노인과 소년의 짤막한 대화를 끼워 넣는다. 앞선 사람의 말을 조금씩 변주하거나 뒤틀어 묘한 울림을 내도록 고안된 대화들이다. 


소설을 끌어가는 힘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독자가 궁금해 할 '이유'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우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성인남성을 배제하고 소년과 소녀, 노인과 여자로 인물을 구성한 이점도 잘 살리고 있다. 

반면, 대화가 주는 효과는 신통치 못하다. 상대편 대화를 변주하여 통찰과 인식에 이르는 효과를 원했다면 제한적으로 사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이런 대화들을 서사 중간에 끼워 넣는 바람에 말장난의 느낌이 강해져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또한, 시인의 이미지를 끼워 넣는 것도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미지가 자연스럽에 어울리지 못하고 성기는 바람에 생뚱맞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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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소설은 1980년대 중반, 인도의 칼림퐁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십대 소녀 사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련에서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진다. 

초오유라는 이름을 가진 그 저택에서 사이는 은퇴한 판사 외할아버지와 아무런 정서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리사가 사이를 살뜰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삶을 꾸려갈 수는 있었다. 

열 여섯이 되는 해, 사이는 지안이라는 네팔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네팔 반란군들이 고르카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지안이 거기에 관여하면서 지안이 변심하기 때문이다. 연애는 치졸한 양상으로 파국을 맞는다.

판사는 애정을 쏟았던 개를 도둑맞는 바람에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미국에 돈 벌러간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 반군들에게 털려 빈털터리가 된다. 비주는 옷까지 모두 빼앗겨 할머니들이나 입는 핑크색 파자마를 입고 초오유의 문을 두드린다. 요리사가 문을 열 때 사이는 칸첸중가의 다섯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그러져 있고, 자기 지분을 주장하며 '사건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사이의 외할아버지 제무바이 파텔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은퇴한 판사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고 서구의 우월성을 내재화한 그는 인도인을 깔봤고, 어느 날 자신의 아내도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내가 정치적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진 제무바이 파텔은 아내를 시시때때로 때리기 시작하다 처가로 쫓아버린다. 

사실 파텔이 영국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돈은 모두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파텔은 영국에서는 인도인이라고 멸시당했고, 인도에 돌아와서는 인도인을 멸시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길 포기한 뒤 내부망명을 하고 만다. 그가 마지막에 애정을 쏟은 것은 개와 체스였다. 


한편,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미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그는 그린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의 일부도 만끽하지 못한 채 더러운 주거지에서 벌레같이 살았다. 그가 인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중에는 땡전 한푼도 없었다. 


사이의 가정교사 지안은 초반엔 긍지 높은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가면 심지가 굳지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짜증섞인 주장이나 내뱉다가 슬그머니 뒤돌아서고 마는 인물로 판명된다. 


그런데 이렇듯 어딘가 부족한 인물들이 칼림퐁과 뉴욕을 배경으로 불연속적인 흐름과 코미디를 만들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건들이 희화화되고 만다.

경찰에게 억울하게 고문 당해 눈이 먼 사람의 가족들이 파텔의 개를 보고 '돈이 되니 훔치자' 라고 결심한다거나, 반란군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거나, 시위 중 경찰의 총격에 사람이 죽었는데도 도망가는 장면을 코믹하게 처리한다든가 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사이와 지안의 연애 역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무거운 주제를 회피하여 기교로 얼버무리는 솜씨와 입담은 좋은데, 묵직한 맛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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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렸다
윌라 캐더 / 도서출판 오상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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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서부의 스위트 워터 마을 외각에 포레스터 대위 부부의 저택이 있었다. 대위는 철도 부설공사 이권을 가지고 있었고 은행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부인은 대위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기품이 넘치면서도 요염한 여인이었다.

주인공 니일 허버어트는 외삼촌 포머로이 씨 댁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포머로이씨는 판사이자 포레스터 대위의 법률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니일은 포레스터 부인을 볼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니일이 동네 소년들과 포레스터 대위의 저택 주변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마을 개들을 독살한다고 소문 난 불량배 아이비가 소년들에게 다가와 거들먹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새총을 꺼내 딱따구리를 쏘아 맞혔다. 아이비는 주머니칼을 꺼내 바닥에 떨어진 딱따구리의 눈을 도려낸 뒤 다시 날려 보냈다. 가련한 딱다구리는 겨우겨우 나무 위쪽 둥지로 날아갔다. 니일은 딱다구리가 너무 불쌍했다. 차라리 딱다구리를 죽이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 니일이 나무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만다. 심하게 다친 니일을 포레스터 부인이 간호해준다. 니일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자신을 간호하는 포레스터 부인의 손길과 체취를 느낀다. 아마도 니일이 느낀 최초의 여자였을 것이다.


니일은 요염하면서도 성숙한 포레스터 부인을 동경했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내곤 한다. 하지만 니일의 이런 두근거림은 곧 깨어지고 만다. 좋지 않은 소문을 달고 다니는 엘린저라는 정력적인 남성과 포레스터 부인이 부정한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니일은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가슴 속에 세겨진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니일은 건축기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방학을 맞아 고향인 스위트 워터에 돌아온 니일이 꽃다발을 만들어 포레스터 부인의 저택으로 갔을 때, 니일은 또 다시 엘린저와 포레스터 부인의 부적절한 대화를 엿듣는다. 니일은 부인을 위해 만든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린다.


경제공황이 찾아오고, 포레스터 대위의 은행이 파산한다. 대위는 자신의 재산을 챙길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돈을 맡긴 불쌍한 고객들을 위해 재산을 헐어 보상 해준다. 대위는 스위트 워터에 있는 저택만 겨우 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뇌일혈까지 찾아와 대위는 굴신하기 조차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만다. 포레스터 부인의 정염을 덮을 돈도, 남성의 육체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기꾼 같은 엘린저 마저 돈 많은 처녀와 결혼하며 부인을 떠난다.

부인은 술에 의존했고, 과거 소년이었던 니일의 친구들과 야비한 아이비에게 몸을 허락하며 타락해간다. 니일은 자신의 마돈나가 타락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긍지높은 포레스터 대위가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켜본 뒤 대학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는 포레스터 부인과 야비한 아이비에 관한 더러운 소문이 날아든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소문도 외삼촌 포머로이가 사망하면서 끝이 난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젊은 시절을 스위트 워터 마을에서 지냈다는 낮선 남자가 니일에게 다가와 자기 소개를 한다. 그는 에드 엘리어트란라는 사람이라면서 옛 친구 포레스터 부인의 소식을 전한다.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호와 결혼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던 그녀가 스위트 워터의 주민들 안부를 자세히 물은 뒤 부탁을 남겼다고 했다. "니일 허버어트를 만나게 되면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잊지 말고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말을 들은 니일은 먹먹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지만, 사내는 그녀가 삼 년 전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날 밤, 니일은 거리에서 산 장미꽃 송이에 비밀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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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하다. 불편하니까 현실적이겠지만, 현실적인 것을 굳이 소설에서까지 반복해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의 불편함이다.  


포레스터 대위는 스캔들에 휘말린 메리언 옴스비(훗날 포레스터 부인)의 생명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결혼한 뒤에는 일체 과거를 묻지 않는다. 대공황 시기에는 은행이 파산하자 다른 대주주들과 달리 자신의 채권과 주식을 처분하여 고객 지분으로 돌려놓는다. 

이토록 긍지높은 인물을 작가는 뇌일혈에 걸리도록 하여 성적, 신체적 기능을 박탈시킨다. 그런 뒤 그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을 건달, 양아치, 얼치기들과 어울리도록 하여 타락하도록 만들고,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를 낱낱히 지켜보도록 한다.

긍지높은 인물과 주인공은 요염한 포레스터 부인의 신체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한 뒤, 온갖 시정잡배들이 기품있는 부인을 유린토록 하는 이 구성이 어떤 효과를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사디스트적인 구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73년 버지니아 윈체스터 태생인 윌라 캐더는 서부 개척시대에 관한 소설을 주로 썼다. 본 작품은 원제 <A Lost Lady>로 오상출판사가 펴낸 책 표지에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씌여 있으나 이는 출판사의 농간이고, 실제 수상작은 1922년에 발표한 <One of Our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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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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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산악 마을에서 애나 루 라는 10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실종된다. 소녀의 부모는 지역 종교 공동체 내에서 제한적인 교우관계만 맺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원한 관계가 없었고, 애나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애나 루의 부모와 시골마을 주민들은 이 사건이 단순실종 사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스타형사 포겔은 사건에 투입되자 마자 매스컴을 불러 인터뷰를 자청한다. 단순실종이 아니라 납치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 주장함으로써 대대적인 예산 증액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최신장비와 인력을 확보한 포겔은 능숙한 솜씨로 소녀 주변을 훑기 시작하고, 그 결과 소녀를 스토킹하던 마티아의 존재를 알게된다. 조사 결과 마티아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지만, 마티아가 스토킹하면서 찍어댄 동영상은 전혀 다른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낡은 흰색SUV를 타고 다니는 교사 마티니였다.

포겔은 쾌재를 불렀다. 매스컴을 통해 사건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각색하는데 성공한데다, 확실한 용의자 마티니까지 확보했으니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에서 범한 과오를 덮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실 포겔은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 때 증거를 조작했었다. 과자 제조일자가 피의자가 수감된 이후라는 점이 들통나 조작이 걸렸을 때 부하직원을 희생시켜 빠져나오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때 사건을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고지식한 검사가 영장발부를 거부한다는데 있었다. 포겔은 또 다시 증거조작 유혹에 빠져든다.

애나 루의 가방에서 발견된 마티니의 혈흔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체포영장이 발부된다. 매스컴은 이미 언론재판을 통해 마티니를 범인으로 확정짓고 있었고, 마티니의 가족조차 그를 떠난 상태였다. 그로기상태에 몰린 마티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은퇴한 기자가 마티니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공개한다. 빨간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소녀가 주기적으로 실종되던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룬 홈페이지. 그리고 동영상.

매스컴이 쳐 놓은 덫에 포겔이 걸려들고, 마티니는 누명을 벗는다.


사건이 벌어진 지 62일 째 되던 날, 62세의 정신과 전문의 플로레스가 한밤중에 병원으로 불려나가 포겔 형사와 면담하게 된다. 포겔 형사는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차에 혼자 타고 있었으며, 다친 곳도 없다고 주장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의사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그의 옷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도나토 카리시는 1973년생으로 이탈리아 남부 마르티나프랑카 출신이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이고 '폴리뇨의 살인마'라 불리는 연쇄살인범 루이지 키아티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한다. 1999년부터 10년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9년 자신이 실제 참여한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속삭이는 자>로 데뷔, 이탈리아에서만 250만부를 팔아치웠다.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으로 600만부 이상 팔렸고, 후속작들도 속속 영화화되는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이다.


<안개 속 소녀>는 자극적인 것만 쫓는 추악한 매스컴과 부패한 경찰이 만나 한 사람의 시민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서술을 쫓아가는 독자의 긴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꽤나 능수능란하다. 또한 반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마냥 후한 점수를 주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독자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이다.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하고, 특정 인물과 공감하고 싶어한다. 물론, 작품과 독자의 거리를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작가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독자는 작품 속 누군가와 시선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개 속 소녀>는 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희생자 애나 루는 처음부터 희미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주인공 격인 포겔의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마티니 역시 촉이 좋은 독자라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못할 것이며, 매스컴과 종교공동체와 정신과 의사, 그리고 이웃들 모두가 악당이거나 그에 준한다.

결국 독자는 긴장감을 갖고 책을 읽긴 하지만, 관찰자도 몰입자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작가가 마련한 결론까지 함께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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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하는 요리사
뤽 랑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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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스트레인지웨이즈 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죄수들은 2인용 감방에서 네다섯명이 함께 지냈고,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 뿐이었고, 음식은 꿀꿀이죽과 진배 없었다. 대처가 집권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죄수들은 담벼락 밖으로 벽돌과 나사못 따위들을 던지며 저항했고, 교도소 주변에 위치한 집들의 정원과 지붕이 파손됐다. 피해를 입은 집 중에는 스트레인지웨이즈 교도소의 요리사 헨리 블레인의 집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교도소를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점을 선전해 기자들에게 10파운드씩 받고 출입을 허가해주고 있었다. 

사실 헨리 블레인은 교도소에 오기 전 배에서 요리를 했다. 당시 그는 농축 산화마그네슘으로 음식에 장난질을 쳐 선원들의 뱃속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교도소에 취직을 했으니, 이번엔 죄수들의 위장을 괴롭히는 데 골몰했을 것은 뻔한 이치다. 어쩌면 폭동의 원인은 헨리 블레인의 음식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죄수들이 파손된 이웃들의 집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자신들이 만든 종이꽃들을 담 밖으로 뿌리면서도, '고문하는 요리사 헨리 블레인을 위한 꽃은 아니다' 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자 헨리 블레인이야 말로 이번 폭동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

헨리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신은 요리를 했을 뿐이라고, 도저히 못 먹을 저급한 식재료를 공급한 것은 윗선의 책임이라고 항변한다. 또한, 화장실 가기 귀찮아 식당 구석 아무데나 오줌을 갈긴 거지같은 직원을 채용한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타자 분위기가 반전된다. 교도행정의 부조리와 불쌍한 죄수들의 처지가 부각되면서 국민들의 동정론이 일게 된 것이다. 죄수들 역시 항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유쾌한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여론은 더욱 죄수들 쪽으로 기울었다. 헨리는 얼떨결에 죄수들을 후원하는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된다.

아무도 헨리가 두 명의 부인과 한 명의 정부, 그리고 목격자 한 명을 살해해 자기집 정원에다 파묻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최근 사귄 <앙글리칸 트리뷴>의 노처녀 기자 루이즈 베이커가 숫처녀 딱지를 떼자마자 색정광으로 변해 목을 졸라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자 죽여버렸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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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랑은 1956년 파리 출생으로 철학을 전공한 뒤 퐁투아즈의 세르즈공립미술학교에서 미학과 예술사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32세 때 첫 작품 <수평선으로의 여행(88)>을 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추리소설 <리버풀 밀물(91)>, <분노(95)>를 차례로 펴내며 명성을 얻었다.

<고문하는 요리사>는 1998년 작품으로 원제는 <천육백 개의 배(腹)>이다. 1990년 4월 영국 맨체스터의 스트레인지웨이즈에서 일어났던 교도소 폭동사건을 소재로 한 블랙유머인데, 대처가 펼친 신자유주의가 공적 영역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1998년 '고등학생들이 뽑은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는데, 논쟁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 같다. 얼핏 마틴 에이미스의 유머가 연상되는데, 마틴 에이미스 보다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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