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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소설은 1980년대 중반, 인도의 칼림퐁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십대 소녀 사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련에서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진다.
초오유라는 이름을 가진 그 저택에서 사이는 은퇴한 판사 외할아버지와 아무런 정서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리사가 사이를 살뜰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삶을 꾸려갈 수는 있었다.
열 여섯이 되는 해, 사이는 지안이라는 네팔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네팔 반란군들이 고르카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지안이 거기에 관여하면서 지안이 변심하기 때문이다. 연애는 치졸한 양상으로 파국을 맞는다.
판사는 애정을 쏟았던 개를 도둑맞는 바람에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미국에 돈 벌러간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 반군들에게 털려 빈털터리가 된다. 비주는 옷까지 모두 빼앗겨 할머니들이나 입는 핑크색 파자마를 입고 초오유의 문을 두드린다. 요리사가 문을 열 때 사이는 칸첸중가의 다섯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그러져 있고, 자기 지분을 주장하며 '사건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사이의 외할아버지 제무바이 파텔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은퇴한 판사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고 서구의 우월성을 내재화한 그는 인도인을 깔봤고, 어느 날 자신의 아내도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내가 정치적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진 제무바이 파텔은 아내를 시시때때로 때리기 시작하다 처가로 쫓아버린다.
사실 파텔이 영국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돈은 모두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파텔은 영국에서는 인도인이라고 멸시당했고, 인도에 돌아와서는 인도인을 멸시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길 포기한 뒤 내부망명을 하고 만다. 그가 마지막에 애정을 쏟은 것은 개와 체스였다.
한편,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미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그는 그린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의 일부도 만끽하지 못한 채 더러운 주거지에서 벌레같이 살았다. 그가 인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중에는 땡전 한푼도 없었다.
사이의 가정교사 지안은 초반엔 긍지 높은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가면 심지가 굳지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짜증섞인 주장이나 내뱉다가 슬그머니 뒤돌아서고 마는 인물로 판명된다.
그런데 이렇듯 어딘가 부족한 인물들이 칼림퐁과 뉴욕을 배경으로 불연속적인 흐름과 코미디를 만들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건들이 희화화되고 만다.
경찰에게 억울하게 고문 당해 눈이 먼 사람의 가족들이 파텔의 개를 보고 '돈이 되니 훔치자' 라고 결심한다거나, 반란군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거나, 시위 중 경찰의 총격에 사람이 죽었는데도 도망가는 장면을 코믹하게 처리한다든가 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사이와 지안의 연애 역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무거운 주제를 회피하여 기교로 얼버무리는 솜씨와 입담은 좋은데, 묵직한 맛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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