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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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산악 마을에서 애나 루 라는 10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실종된다. 소녀의 부모는 지역 종교 공동체 내에서 제한적인 교우관계만 맺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원한 관계가 없었고, 애나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애나 루의 부모와 시골마을 주민들은 이 사건이 단순실종 사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스타형사 포겔은 사건에 투입되자 마자 매스컴을 불러 인터뷰를 자청한다. 단순실종이 아니라 납치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 주장함으로써 대대적인 예산 증액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최신장비와 인력을 확보한 포겔은 능숙한 솜씨로 소녀 주변을 훑기 시작하고, 그 결과 소녀를 스토킹하던 마티아의 존재를 알게된다. 조사 결과 마티아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지만, 마티아가 스토킹하면서 찍어댄 동영상은 전혀 다른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낡은 흰색SUV를 타고 다니는 교사 마티니였다.

포겔은 쾌재를 불렀다. 매스컴을 통해 사건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각색하는데 성공한데다, 확실한 용의자 마티니까지 확보했으니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에서 범한 과오를 덮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실 포겔은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 때 증거를 조작했었다. 과자 제조일자가 피의자가 수감된 이후라는 점이 들통나 조작이 걸렸을 때 부하직원을 희생시켜 빠져나오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때 사건을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고지식한 검사가 영장발부를 거부한다는데 있었다. 포겔은 또 다시 증거조작 유혹에 빠져든다.

애나 루의 가방에서 발견된 마티니의 혈흔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체포영장이 발부된다. 매스컴은 이미 언론재판을 통해 마티니를 범인으로 확정짓고 있었고, 마티니의 가족조차 그를 떠난 상태였다. 그로기상태에 몰린 마티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은퇴한 기자가 마티니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공개한다. 빨간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소녀가 주기적으로 실종되던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룬 홈페이지. 그리고 동영상.

매스컴이 쳐 놓은 덫에 포겔이 걸려들고, 마티니는 누명을 벗는다.


사건이 벌어진 지 62일 째 되던 날, 62세의 정신과 전문의 플로레스가 한밤중에 병원으로 불려나가 포겔 형사와 면담하게 된다. 포겔 형사는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차에 혼자 타고 있었으며, 다친 곳도 없다고 주장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의사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그의 옷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도나토 카리시는 1973년생으로 이탈리아 남부 마르티나프랑카 출신이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이고 '폴리뇨의 살인마'라 불리는 연쇄살인범 루이지 키아티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한다. 1999년부터 10년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9년 자신이 실제 참여한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속삭이는 자>로 데뷔, 이탈리아에서만 250만부를 팔아치웠다.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으로 600만부 이상 팔렸고, 후속작들도 속속 영화화되는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이다.


<안개 속 소녀>는 자극적인 것만 쫓는 추악한 매스컴과 부패한 경찰이 만나 한 사람의 시민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서술을 쫓아가는 독자의 긴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꽤나 능수능란하다. 또한 반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마냥 후한 점수를 주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독자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이다.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하고, 특정 인물과 공감하고 싶어한다. 물론, 작품과 독자의 거리를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작가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독자는 작품 속 누군가와 시선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개 속 소녀>는 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희생자 애나 루는 처음부터 희미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주인공 격인 포겔의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마티니 역시 촉이 좋은 독자라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못할 것이며, 매스컴과 종교공동체와 정신과 의사, 그리고 이웃들 모두가 악당이거나 그에 준한다.

결국 독자는 긴장감을 갖고 책을 읽긴 하지만, 관찰자도 몰입자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작가가 마련한 결론까지 함께 가게 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4676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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