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이야기 - 편지와 우체국의 역사에서 세계 우편의 현주소까지
이종탁 지음 / 황소자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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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을 다니는 나로선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정보통신이나 우표일반에 얽매이지 않고 우체국의 기원, 우표의 역사, 각국의 우체국, 최근 우체국의 동향 등 우정인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물론 우정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우체국에서 제공받는 보편적 서비스의 폭과 깊이가 얼마만큼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난 김에 우체국 민영화 얘기를 해보자.

 

최근 민영화 바람이 거세다. 왜 민영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고, 그저 민영화를 하면 막연히 좋아지는 것처럼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체국은 결코 민영화 되어선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언급하며 민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의 우체국과 우리나라의 우체국은 엄연히 다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차이점을 보자.

 

첫째, 일본의 우체국은 정규직원 26만에 보유자금 360조엔의 거대 공룡이었다. 일본의 4대 은행과 4대 생명보험자산을 합한 액수보다 커서 시장을 기형적으로 독점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 우체국은 예금7위, 보험5위의 수준이며 주 대상도 서민층과 농어촌 주민들이다. 우체국이 은행과 보험을 위협하기 보단 시중 은행과 보험사가 외면하는 서민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우체국 개수는 2800여개이다. 전국적으로  어떤 은행보다도 많다. 하지만 서울지역 우체국 개수는 은행에 밀려 4위다. 그만큼 지방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얘기다. 돈이 안되면 지점조차 개설하지 않는 은행과는 엄연히 다르다.

 

둘째, 일본의 우체국은 대대손손 세습하는 경우가 많다. 시험도 보지 않고 아버지가 국장이면 아들도 국장을 하는 식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신분을 유지한다. 엄청난 규모의 국가 사업체를 그냥 물려받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우정족'이란 말까지 있었으며, 그들이 정치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체국 하면 정겨운 집배원 아저씨가 떠오르지 무지막지한 금권과 권력을 휘두르는 누군가는 떠올리려야 떠올리기 힘들다. 빈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사람보고 '우체국장'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관공서 공무원들의 빈잔은 금방금방 옆에서 따라주지만 우체국장은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 잔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자조섞인 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우체국은 권력, 금권과는 거리가 멀다.

 

셋째, 우리나라에선 우체국 민영화를 국민이 나서서 외친 적이 한번도 없다. 왜인고 하니 우체국 직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과 똑같이 수익을 내서 거기서 월급을 받는다. 게다가 9년 연속 흑자이니, 공무원이면서 흑자를 내는데다가 국민의 세금을 한푼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남는 금액을 세금에 보태주는 유일한 공무원이다. 그래서 우체국은 비효율적이며, 민영화를 하여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공무원수를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엉뚱하게 공무원수가 많아 보이는 우체국을 겨냥하여 무조건 민영화 하자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우체국을 민영화하면 공무원수가 확 준다는 단순논리이다. 수익을 내며 세금을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보태주는 공무원을 전부 민간인으로 바꿔버리면 그것이 공무원 감축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영국에선 마을 주민들이 우체국을 없애지 말아달라고 시위를 벌인다. 영국은 민영화가 되었기 때문에 수익이 나지 않는 산간 우체국은 죄다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은행과 택배회사들이 외면하는 지방 소읍, 산간마을의 다정한 이웃이 공무원감축은 무조건 좋다는 이상한 논리에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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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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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보이를 읽으면서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을 떠올렸다. <시네마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설정과 <리버 보이>에서의 할아버지, 손녀, 그리고 죽음은 그다지 다른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차이가 있길래 <시네마 천국>에 대한 내 감정은 한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인 반면에 팀보울러의 <리버보이>에 대해서는 지루함과 진부함이 전부였을까 생각해본다.

<시네마 천국>의 미덕은 감정의 절제이다. 성인이 된 토토가 알프레도를 회상하면서 단 한번도 '나는 알프레도가 그립다'는 감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다. 회상 속에서 알프레도와 토토가 그 마을에서 살아가면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은 저절로 차오르고, 마지막으로  토토가 키스씬들을 편집한 필름을 보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게 된다.

반면 <리버 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중 화자는 슬프고, 괴롭고, 안타깝고 도무지 절제란 것을 모른다. 작중 화자가 이미 슬프니 내가 거기 껴들 여지가 있나! 군중들은 아직 무슨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준비도 안된 상태인데 연설하는 사람이 이미 흥분의 도가 지나쳐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는 꼴이다. 게다가 서양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죽음과 삶을 영혼의 영역으로 이미 문화적으로 체득하고 있을 동양권 독자들에게 할아버지의 어린시절 분신인 리버보이의 출현은 그다지 신선하지도, 참신하지도 않다. 강물의 흐름을 인생에 비유한 그 진부함이란!

결국 이 작품은 노인과 어린아이의 우정이라는 점에서의 설득력도 없고-사실 노인과 어린아이의 우정이 가능한 경우란 극히 드물며, 드물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대신 설득력 있는 전개가 반드시 전재되어야 할 것이다-, 리버보이라는 생뚱맞은 할아버지의 어릴적 분신도 판타지적 상상력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만약 단편소설의 분량으로 개작한다면 청소년용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졸렬했다. 도무지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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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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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을 산다는 것이 착각으로 한강의 소설을 샀다. <성탄특선>의 유쾌함을 기대하고 책을 넘겨 작가의 사진을 본 순간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작가를 착각한 것이다. 나는 작가의 얼굴을 보고 작품의 내용을 넘겨 짚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얼굴을 보고 유쾌한 소설이길 포기 하고 읽었으며, 읽고 난 이후의 느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것은 바로 '왜 나는 여성작가를 싫어하는가?' 이다. 남성, 여성의 구분 자체가 이미 비난의 집중포화를 감수한 구분인데다가, 여성작가라니! 그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이며 가부장적 이분법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시원스럽게 내놓지 못하는가.

편견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본다. 편견이란 확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내 성씨인 최씨와 관련된 속담을 들어보자. <산 김가 셋이 죽은 최가 하나를 못 당한다> 라던가 <최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 라는 속담이 있다. 분명 최씨 성을 가진 인물들 중 깐깐하고 고집 센 사람들을 경험한 누군가가 그 강렬한 인상을 주변사람들과 공유했을 것이며, 그런 공유가 공감으로 이어져 속담의 지위까지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편견이다. 나로 말하자면 최씨이지만 고집이 옹고집도 아니요 깐깐한 편이기 보단 우유부단한 경우가 꽤 있다.

미쉘 푸코는 광인에 대해 너그러운 견해를 내놓지만 나로 말하자면 광인, 속칭 미친사람에 대해 극도로 긴장한다. 대학 시절 옆집에 미친사람이 살았었는데 온 동네를 병을 깨고 돌아다니고, 자기 아들을 수시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강렬한 경험은 나에게 광인에 대해 너그러운 인정은 커녕 극도의 긴장감만을 유발할 뿐이다.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편견이다. 따라서 편견은 경험과 확률이다. 무시하고 넘어갈 <개념상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다시 여성작가라는 모호한 편견으로 돌아와보면, 내 편견은 이렇다. 여성작가들의 작품 속 주인공의 직업은 대부분 전문직, 프리랜서들이다. 그들은 생계에 큰 곤란을 겪지 않으며, 그런 이유 때문인지(!) 광기에 쉽사리 휩싸인다. 그들의 연애는 폭력적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그들은 서로 일치점을 찾지 못해 결국은 파국을 맞는다.

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으면서 나는 괴로웠다. 작중 인물들은 작가, 조각가, 실내인테리어디자이너 등 범상치 않은(!) 직업을 갖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돌출 행동들이 잇따른다.  각자의 트라우마로 첫번째 여주인공은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으며, 두번째 여주인공은 어릴적 육손으로 놀림을 받다가 수술을 받은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과거를 묻고 살아간다. 남자 주인공 역시 겉다르고 속다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감정의 기형적 성장을 경험하였다.

'왜'라는 질문에 척척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논리겠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적절한 공감을 독자로부터 끌어내지 못하고,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연원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미숙함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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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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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가장 무섭게 본 영화가 기시 유스케 원작의 <검은집>이었다. 그 영화를 볼 당시,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우체국보험심사지급 업무를 일부 담당하고 있었기에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 그런 좋은 인상을 갖고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유리 망치>를 주문하여 읽게 되었는데 무척 실망하게 되었다.

추리소설의 수작들의 공통점은 추리과정의 단서들을 최대한 독자와 공유한다는 점이다. 단서들이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독자는 그 트릭을 파해하지 못하는 반면, 탐정은 그 트릭을 간파할 때 독자는 아차!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반면 치졸한 작품들은 단서를 공유하지도 않고 결말에 가서야 '사실은 이랬었다' 라는 식이 많다.

수작과 졸작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품들이 바로 결말을 향해 정보를 짜맞춰가는 작품이다. 정보를 공유해가다보면 독자가 눈치챌 것이 두렵고, 그러다 보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결말에 가까이 다가갈때마다 정보를 하나씩 까발려 가며 결국은 최종 결론에 이르러서야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역시 '사실은 이랬었다'는 식의 황당함은 덜할 지언정, 진정한 추리소설의 재미를 독자에게 줄 수는 없다. 독자는 기껏해야 스릴러을 읽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시 유스케는 밀실살인을 설정했다. 너무 고전적인만큼 그 트릭 또한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 소재다. 그러다 보니 기시 유스케는 각종 첨단 과학기술을 등장시킨다. 첨단 과학기술과 추리는 상극이다. 인간이 해내고 인간이 밝혀내는 것이 추리의 기본일텐데,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부분을 첨단 과학기술에 의탁하다 보니 당연히 추리의 긴장감이 반감되고 만다. 게다가 밀실살인을 완성시키기 위해 범인의 직업과 살아온 내역까지 구구절절 읊어가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결말에 억지로 짜맞춘 스토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1949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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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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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날 바로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샀다.

선단(先端)공포증에 걸린 야쿠자, 어느날부터인가 캐처를 믿지 못하게 된 공중그네 곡예사, 입스에 걸린 3루수 등, 자신들이 가장 익숙하게 해내던 일들을 어느날부터인가 낯설어져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는 만사 태평한 뚱보 의사로, 환자들과의 첫 남에서 매우 단순한 치료법을 제시하지만, 정작 환자들은 그럴싸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대로 실행 하지 못한다. 그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연휴 3일을 집에서 쉬었는데 쉬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내내 따라다녔다. 실제 한 것은 없는데 말이다.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뒤쳐질 것이라든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든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든가 하는 문구들에 둘러싸여 숨가쁘게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들 역시 저 환자들과 과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의사 이라부 이치로처럼 천진난만하게 풍덩 뛰어들어 그 일을 재미있게 해보는 것,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닐까. 어짜피 우리는 예전에 유행하던 그 무시무시한 광고처럼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1508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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