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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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구멍매달기 고문 끝에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소식이 로마 교황청으로 날아든다.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째, 주교(主敎)로서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종교활동을 해왔던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은 교회나 예수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한편,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오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히데요시(秀吉)가 1587년 이래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했고, 도쿠가와(德川) 역시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여 1614년 모든 가톨릭 선교사를 해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637년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천주교를 믿는 이를 중심으로한 4만명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정부는 포르투갈이 연관되어있음을 의심하여 가톨릭 탄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세 명의 젊은 포르투갈 신부는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와 관련된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끊어져버린 일본에서의 선교 명맥을 잇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말라리아로 한 명의 신부가 운신을 못 하게 되고 로드리고와 가르페만이 일본으로 잠입에 성공, 두 명의 사제는 가톨릭을 믿는 마을에 숨어 조심스레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낮에는 관헌의 눈을 피해 움막에 숨고 밤에는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등 제한된 활동을 하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관헌들이 마을로 들이닥치자 서로 다른 피신길에 오른다. 도망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라는 비굴한 인물이 접근하는데, 그는 한 때 가톨릭교도였다가 배교한 전력이 있는 자로 로드리고 등이 일본에 들어오자 다시금 가톨릭으로 회심(回心)하였다. 하지만 기치지로는 또다시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자신은 약하게 태어났을 뿐이며 배교를 거부하고 목숨을 내놓을 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외친다.

감옥에 갖힌 로드리고는 이노우에라는 부교오로부터 배교를 권유받는데, 그는 페레이라를 배교시킨 인물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의 선교 활동을 '추녀의 깊은 애정'에 비유하며 원치 않는 애정을 쏟는 것이 상대편에게는 도리어 해악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노우에는 이미 배교를 맹세한 신도들 마저 살해한다. 통역은 농민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로드리고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배교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라면, 과연 가톨릭에서 말하는 자비나 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급기야 다시만난 가르페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죽고, 페레이라 역시 자신들이 일본에 전파한 그리스도를 일본인들은 전혀 엉뚱하게 변형시켜 믿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자 로드리고는 심한 갈등에 빠진다.

이송된 감옥에서 로드리고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며 기도를 하다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일본인 신도들의 죽음과 자신의 행위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떠올리고 문득 이 모든 일이 희극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감옥에서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밖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이러한 희극적인 감상은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감옥을 방문한 페레이라로부터 그것은 코고는 소리가 아니라 구멍메달기 고문을 당하는 신도들의 고통에찬 숨소리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은 이미 배교를 맹세하였지만, 로드리고가 배교를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로드리고는 예수가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끼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성화를 밟는다.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는 "과연 신자의 기도는 신에게 도달한 것일까, 아니 본래 신이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두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교도의 심정으로도 솔직하게 울려오는 번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로드리고는 극한의 상황에서 기도가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미칠 수 없으며, 결국 선택의 주체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번민에 시달린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 공감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노우에라는 인물 때문이다.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이노우에는 수많은 가톨릭 사제를 배교시킨 인물로 로드리고는 그가 포악한 성정을 지닌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이 나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탄압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논리가 일견 타당한 것은 그것이 당시 일본 정부가 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며 현실에 뿌리를 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편 로드리고의 내세에 관련한 종교적 믿음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견은 좁혀질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고민과 번뇌는 모두 수긍이 가기 때문에 로드리고의 고뇌가 좀더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만약 엔도 슈사쿠가, 로드리고가 악독한 관헌의 탄압에 맞서 끝내 모든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 순교하는 것으로 그렸다면 무척 조잡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종교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고뇌로 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하고 공감하게 만든 것 같다.

읽는 내내 미우라 아야코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미우라 아야코의 <양치는 언덕>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이라든지 <성서에세이>에서 기도를 했더니 원하는 물건이 실제 생겨나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 틀림 없다든지 하는 대목과, <침묵>에서 끝내 침묵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물론 두 작가의 종교관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공감하게 되는 신의 모습은 <침묵>에서 로드리고의 기도 끝에 그리스도가 했다고 생각한 말, '어디에 계셨냐'는 로드리고의 물음에 '너희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말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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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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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벤은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변호사이다. 한때 사진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생활고와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생활고를 해결한 뒤에는 꿈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고, 사진에 대한 꿈은 비싼 사진기를 사들이고 멋진 암실을 꾸미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아내 베스 역시 작가가 되려는 꿈을 꾸었지만 출판사에 보낸 원고들이 거듭 퇴짜를 맞고,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자 어쩔 수 없이 벤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교외로 이사를 하고, 두번째 아이를 낳게 되자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이 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거짓말이 늘고 대화가 엇나가기 시작하자 벤은 베스가 바람이 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의 외도 상대가 이웃에 사는 젊은 아마추어 사진작가 게리임을 알게 된다. 게리는 얼마 안되는 유산으로 살면서도 겉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고, 끊임없이 자신이 사진작가로 성공할 것이라며 허풍을 떠는 인물이다.

게리의 집을 방문한 벤은 게리와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다툼을 벌인 끝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벤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후 게리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동부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서부의 몬태나 주 산간지방인 마운틴폴스로 도주한 벤(이제는 게리)는 그곳에서 게리의 신탁연금으로 생활하는 한편 사진을 찍는다. 몬태나 주의 인물들을 찍은 사진을 <몬태난> 신문사 기자 루디가 좋게 보아 신문사에 소개시켜주고, 신문사에서는 벤의 사진을 싣기로 결정한다. 또 신문사의 사진부장인 앤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오두막에 갔다가 우연히 산불 현장을 목격하고 찍은 사진이 대서특필되고 여러 메이저 신문사에도 팔리게 된다. 벤은 조용히 살면서 신분을 감추려 했으나 사진이 유명해지자 이곳저곳에서 그에게 접촉해오고 이제 벤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루디가 벤의 과거 행적을 캐내어 벤을 협박하는 지경에 으르고, 둘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다. 자동차에서 튕겨나온 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루디는 자동차와 함께 형체도 없이 불타버려 경찰은 벤이 사망한 것으로 처리한다. 또 다시 신분을 잃어버린 벤은 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새로운 신분으로 세탁한 후 앤과 함께 다른 도시로 떠난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벤의 아내 베스이다. 베스는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그 희생양으로 벤을 택한다. 그러면서 벤의 젊었을 적 모습이라 할 만한 게리와 바람을 피운다. 베스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권이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벤에게 집을 비우라고 말한다. 벤이 죽은것으로 되자 이번에는 월스트리트에서 부를 축적한 인물과 재혼을 한다.

베스의 이러한 양태는 벤에게서도 일면 발견되는데, 벤은 성공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고 사진작가로 살길 원한다. 하지만 막상 모든 것을 잃게 되자 자신의 과거 삶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사진작가로 살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것으로 되자 벤이 되돌아간 삶은 과거의 부유한 벤은 아니지만 역시나 앤과 가정을 꾸리고 평온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했던 인물은 게리였으며 그는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우연히 사진용품 판매점에서 만난 성공한 사진작가는 대화를 하고 싶은 벤을 두고 사진에 미친 아마추어 취급을 하며 사진에 대한 열정을 폄하한다.

 

누구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직업이 곧 나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것에 심하게 불편함을 느끼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던 나'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던 나'를 버린 것 역시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는 외면을 한다.

에티엔 바랄의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을 보면 일본의 심리학자 기시다 슈가 인용된다. 그는 "모든 인간은 본능이 부서진 상태로 태어난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상일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모든 욕망은 불가능한 단 하나의 욕망의 표현인 바, 안정된 상태로의 복귀가 그것이라고 한다. 자아는 전능함의 꿈인 동시에 무기력의 경험이며 바로 이 때문에 자아는 불안정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과 '안정된 상태로의 복귀'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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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49
패트리샤 모이스 지음, 진용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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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티베트 경감은 아내 에미와 함께 이탈리아의 산타 키아라 지역으로 스키 여행을 떠나는데, 영국에 마약을 밀반입하는 범인의 흔적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업무와 연관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어느날 리프트에서 프리츠 하우저라는 의사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그를 올라가는 리프트에 탄 누군가가 총으로 쏜 것이다. 하우저는 독일에서 개업하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이면에는 마약 거래가 있었던 듯 하다. 현지 경찰 스페치와 헨리 경감은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을 심문하는데 모두들 하우저의 죽음을 환영할 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호텔 지배인인 로새티는 하우저에게 약점을 잡혀 호텔 운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 이외에는 빼앗기고 있다. 또 로저 스팅스라는 젊은이는 과거 밀수와 관련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하우저에게 협박을 받은 듯 하다. 그리고 하우저와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토루디 크니펠이라는 아가씨 역시 살해 동기가 있었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게르다 브라운이라는 보모는 하우저 때문에 어머니가 나치에게 끌려가고 아버지가 그로 인해 자살하기까지 했다.

한편, 산타 키아라에는 스키를 즐기고 강습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이 있는데 마리오 일가가 그들이다. 마리오 노인의 아버지와 큰아들 줄리오는 스키를 타다가 죽었다. 마리오 역시 스키를 타다가 다리를 다쳐 지금은 리프트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큰아들 줄리오는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였는데 그 시체를 발견한 것은 막내아들 피에트로이다. 피에트로는 언젠가 큰 돈을 벌어 촌구석을 벗어나 미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다.

 

스페치의 면밀한 시간표와 아내인 에미의 도움을 받아 범인의 윤곽을 잡아가던 헨리 경감에게 마리오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마리오가 똑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하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 하다.

 

페트리시아 모이즈(Patricia Moyes) 소설의 특징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의 풍속을 생생히 묘사하여 마치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녀의 소설을 풍속미스테리로 분류하기도 한다. 영화 제작사의 기술팀과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Dead Men Don't Ski)를 1959년에 발표하여 주목 받았다. Wikipidia에 의하면 그녀의 작품목록은 다음과 같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것은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 뿐인 것 같다.

 

Dead Men Don't Ski(1959)

The Sunken Sailor a.k.a. Down Among the Dead men(1961)

Death on the Agenda (1962)

Murder a la Mode (1963)

Falling Star (1964)

Johnny Underground (1965)

To Kill a Coconut a.k.a. The Coconut Killings (1966)

Murder Fantastical (1967)

Death and the Dutch Uncle (1968)

Who Saw Her Die? a.k.a. Many Deadly Returns (1970)

Season of Snows and Sins (1971)

The Curious Affair of the Third Dog (1973)

Black Widower (1975)

Who Is Simon Warwick? (1978)

Angel Death (1980)

A Six-Letter Word for Death (1983)

Night Ferry to Death (1985)

Black Girl, White Girl (1989)

Twice in a Blue Moon (1993)

Who Killed Father Christmas/ And Other Unseasonable Demises (1996; short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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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박청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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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김정수가 부대에서 권총을 들고 휴가를 나와 은행을 턴 후 우연히 만난 은채라는 여자를 데리고 DMZ 인근의 초소로 간다. 은채는 김정수, 철호와 관계를 갖고 DMZ로 들어가 북의 병사와도 관계를 맺는다.

제대를 한 후 김정수는 뇌성마비에 걸린 자신의 쌍둥이 형 김정호를 살해한 후 그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갱이 된 그는 정재계 주요 인사를 테러하고 은행을 턴다.

자우림이라는 카페를 근거지로 삼아 한국은행을 털 모의 끝에 실행에 옮기고, 죽은지 삼일만에 80년 5월의 광주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황당무계한 줄거리를 동성애, 난교, 테러, 은행강도, 성서의 쌍둥이와 부활 모티프 등 자극적인 소재로 버무려 놓았다. 한국은행을 턴 후에는 사뭇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시도도 곁들인다. 문제는 자극적인 소재로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고, 80년 5월 등의 상징이 생뚱맞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시대에 대해 작중 인물들은 고통스러워 하나 독자는 지루하다.

쌍둥이라는 모티브와 남북관계의 연결고리는 조잡하고, DMZ가 상징하는 경계의 의미도 모호하다. 현실 개조의 구체적 행동 및 실패로 인한 절망 끝에 마지막으로 테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행동으로 선택한다. 그러니 김정수의 테러는 좌절감의 발현일 것인데 김정수의 좌절에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다. 테러와 강도사건 묘사가 조잡하고 우연에 기대고 있어 안쓰럽다. 80년 5월과 초현실적인 묘사들이 생뚱맞게 느껴지는데 작가의 고통이나 세계관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중 인물들이 이 시대를 괴롭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 인한 절망감으로 대안 없는 일탈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남북 분단과 80년 광주로 상징되는 거대한 부조리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북한 병사가 단 한번 관계를 맺은 은채를 찾기 위해 DMZ로 들어와 동굴 속에서 산다는 설정이나, 김정수가 돈을 모아서 DMZ를 사겠다고 하는 등의 대사를 통해 일체의 인위가 제거된 DMZ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데, 진부하다.

결국, Coolio의 Gangster's paradise 노래를 차용한 제목과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이, 개성도 사상도 흐릿한 작중 인물들로 인해 전개됨으로서 맥빠진 느낌의 소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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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한 명상
송기원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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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이자 장돌뱅이 출신 김윤호가 처음 여자의 성기를 본 것은 일곱살 때로, 동갑내기 영순이의 성기는 보랏빛 자운영 꽃처럼 빛나 보였다. 그리나 영순이의 성기는 마치 껍질이 굳게 닫히 조개와도 같아서 단 한 번도 그 속살이 열린 적이 없었다. 두번째로 여자 성기를 본 것은 국민학교 사학년 때로 미친년의 털투성이 성기였다. 그것은 밤짐승의 거대한 입처럼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보드랍고 환히 빛나는 성기가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세계를 상징하지만 열린 적이 없었던 반면에, 벗어나고 싶은 미친년의 털투성이 성기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 달려들 것만 같은 부조리를 경험한 것이다.

도청소재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설명으로 미루어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인 것 같다) 윤호는 사생아이자 장돌뱅이 출신인 자신과 화려한 도청소재지의 불균형을 견디지 못한다. 학교를 때려치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양아치 짓을 하던 중 고향에 내려온 처녀를 겁탈하려 하지만 거대한 밤짐승의 입이 덥쳐오는 환상에 처녀의 얼굴 위로 눈물을 떨구고 그런 그의 등을 처녀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준다.

함께 양아치짓을 하다가 검거된 춘봉으로부터 죽었다 깨나도 똘마니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니 따로 할 일을 찾아보라는 말에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한 윤호는 명작소설을 읽고 '대개의 주인공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추악하고 역겨운 치부를 그것도 무슨 자랑이라고 어중이떠중이로 길게 늘어놓는데 그게 바로 명작소설' 임을 발견한 후 자신과 같은 출신이 위악(僞惡)의 수단으로 문학을 취할 수 있다고 느낀다.

대학의 백일장에 당선이 되고 장경희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장경희는 화려한 대도시에 윤호가 편입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줄 것 같았지만, 첫 관계 후 장경희가 처녀성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자 완벽한 일체감이 사라져 버림을 느낀다.

대학에 들어가서 윤호는 '아웃사이더', '초현실주의', '퇴폐주의'등 여러 양태의 외피를 써가며 자신을 더욱 밑바닥으로 내팽개 친다. 그는 이런 저런 여자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넝마주의를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더욱 드러내려 한다. 하지만 윤호가 여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관계'가 아닌 '세상과의 관계맺기' 라는 왜곡된 형태였다. 일상적인 인식의 해체, 자기학대를 통한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는 결국 월남에 파병된 뒤 똥통에 빠진 뒤 완성된다. 그는 똥통에 빠진 후 무서운 고참이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씻기고 갖가지 얼차려에서 열외가 되는 것을 보고 치부를 드러내는 극단적인 밑바닥에 도달했음을 알게된다.

그는 월남에서 돌아온 후 룸살롱에 나가는 조영희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털투성이의 거대한 입과 영순이의 생콩 비린내 나는 성기가 부조리의 틀을 깨고 합치되는 것을 느낀다.

그후 작가가 된 윤호는 몇 명과 연애를 해보았냐는 물음에 룸살롱에 나가던 조영희 '단 한명' 이라고 이야기 하며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말한다. 그녀를 정말 다시 찾았느냐는 물음에 윤호는 목포 히빠리 골목의 늙은 창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마흔이 넘은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이렇게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나헌티는 모든 남자들이 똑같어갖고, 한 남자로 여게진단 말이여라우. 펭소에 알고 지낸 남자가 아니고라우. 기냥 나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런 남잔디, 뭐이냐, 저그 보름달 안에서 숨이 헉헉 넘어감서 나를 찾고 있는 것 같단 말이요. 그런 남자야, 곰배팔이먼 어쩌고, 문뎅이먼 어쩌고, 째보먼 어쩐다요? 참말로 나를 원해서, 나가 없으먼 살어남지도 못하는 그런 남자가 바로 그런 남자겠제라우."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가 주인공 김윤호가 고등학교를 작파하고 건달로 지내던 시기의 이야기라면, <여자에 관한 명상>은 그 후의 이야기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OT라는 것을 따라갔는데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서울내기들의 낭창낭창한 자기 소개가 몇 번인가 계속되다가 한눈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가 비칠거리며 일어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다. 앞서 소개하던 동기들의 말씨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어쨌는지 전라도에서 올라온 그 친구는 서울말을 흉내내려 애를 썼다. 그리고 소개가 끝나고, 그의 얼굴이 벌개졌으며,  열패감이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떠올랐다. 차라리 전라도 사투리 그대로 썼다면 좋았을 것을 서울말도 아니고 전라도 사투리도 아닌 말을 그는 사용했다.

그 비슷한 경험은 나도 조금쯤은 가지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연애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을 때에 여자애가 나를 답동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만 해도 인천의 중심지는 동인천이었고 답동성당은 신포시장 맞은편에 있었다. 나는 왠지 주눅이 들었고, 촌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을 인용해가며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 중언부언하였다. 그런 말을 하면 마치 동인천의 화려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할 것처럼. 벌써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참 어렸을 때 얘기다...

영화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는 최민수의 개똥폼 잡는 연기 빼고는 꽤나 괜찮았다. 당시 같이 본 자들 사이에 '애들은 손대지 마라' 는 최민수 대사가 희화화 되어 유행도 했었고, 민망하기 그지 없는 새마을 개사노래도 종종 누군가가 불러댔다. 물론 여학우가 있는 데서 부를 용기가 있는 자는 없었지만. 송기원의 원작 소설은 더욱 좋았다. 그 시절에 나는 어쩌면 김윤호와 같이 나를 내던져가며 세상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을 위장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가을이 싫다. 추워지면 왠지 울적해진다. 그러니 나도 김윤호와 같이 위악(僞惡)의 외피를 뒤집어 쓰고 이 가을을 견뎌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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