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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구멍매달기 고문 끝에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소식이 로마 교황청으로 날아든다.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째, 주교(主敎)로서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종교활동을 해왔던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은 교회나 예수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한편,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오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히데요시(秀吉)가 1587년 이래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했고, 도쿠가와(德川) 역시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여 1614년 모든 가톨릭 선교사를 해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637년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천주교를 믿는 이를 중심으로한 4만명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정부는 포르투갈이 연관되어있음을 의심하여 가톨릭 탄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세 명의 젊은 포르투갈 신부는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와 관련된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끊어져버린 일본에서의 선교 명맥을 잇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말라리아로 한 명의 신부가 운신을 못 하게 되고 로드리고와 가르페만이 일본으로 잠입에 성공, 두 명의 사제는 가톨릭을 믿는 마을에 숨어 조심스레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낮에는 관헌의 눈을 피해 움막에 숨고 밤에는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등 제한된 활동을 하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관헌들이 마을로 들이닥치자 서로 다른 피신길에 오른다. 도망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라는 비굴한 인물이 접근하는데, 그는 한 때 가톨릭교도였다가 배교한 전력이 있는 자로 로드리고 등이 일본에 들어오자 다시금 가톨릭으로 회심(回心)하였다. 하지만 기치지로는 또다시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자신은 약하게 태어났을 뿐이며 배교를 거부하고 목숨을 내놓을 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외친다.
감옥에 갖힌 로드리고는 이노우에라는 부교오로부터 배교를 권유받는데, 그는 페레이라를 배교시킨 인물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의 선교 활동을 '추녀의 깊은 애정'에 비유하며 원치 않는 애정을 쏟는 것이 상대편에게는 도리어 해악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노우에는 이미 배교를 맹세한 신도들 마저 살해한다. 통역은 농민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로드리고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배교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라면, 과연 가톨릭에서 말하는 자비나 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급기야 다시만난 가르페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죽고, 페레이라 역시 자신들이 일본에 전파한 그리스도를 일본인들은 전혀 엉뚱하게 변형시켜 믿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자 로드리고는 심한 갈등에 빠진다.
이송된 감옥에서 로드리고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며 기도를 하다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일본인 신도들의 죽음과 자신의 행위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떠올리고 문득 이 모든 일이 희극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감옥에서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밖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이러한 희극적인 감상은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감옥을 방문한 페레이라로부터 그것은 코고는 소리가 아니라 구멍메달기 고문을 당하는 신도들의 고통에찬 숨소리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은 이미 배교를 맹세하였지만, 로드리고가 배교를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로드리고는 예수가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끼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성화를 밟는다.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는 "과연 신자의 기도는 신에게 도달한 것일까, 아니 본래 신이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두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교도의 심정으로도 솔직하게 울려오는 번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로드리고는 극한의 상황에서 기도가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미칠 수 없으며, 결국 선택의 주체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번민에 시달린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 공감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노우에라는 인물 때문이다.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이노우에는 수많은 가톨릭 사제를 배교시킨 인물로 로드리고는 그가 포악한 성정을 지닌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이 나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탄압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논리가 일견 타당한 것은 그것이 당시 일본 정부가 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며 현실에 뿌리를 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편 로드리고의 내세에 관련한 종교적 믿음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견은 좁혀질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고민과 번뇌는 모두 수긍이 가기 때문에 로드리고의 고뇌가 좀더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만약 엔도 슈사쿠가, 로드리고가 악독한 관헌의 탄압에 맞서 끝내 모든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 순교하는 것으로 그렸다면 무척 조잡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종교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고뇌로 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하고 공감하게 만든 것 같다.
읽는 내내 미우라 아야코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미우라 아야코의 <양치는 언덕>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이라든지 <성서에세이>에서 기도를 했더니 원하는 물건이 실제 생겨나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 틀림 없다든지 하는 대목과, <침묵>에서 끝내 침묵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물론 두 작가의 종교관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공감하게 되는 신의 모습은 <침묵>에서 로드리고의 기도 끝에 그리스도가 했다고 생각한 말, '어디에 계셨냐'는 로드리고의 물음에 '너희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말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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