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 관한 명상
송기원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사생아이자 장돌뱅이 출신 김윤호가 처음 여자의 성기를 본 것은 일곱살 때로, 동갑내기 영순이의 성기는 보랏빛 자운영 꽃처럼 빛나 보였다. 그리나 영순이의 성기는 마치 껍질이 굳게 닫히 조개와도 같아서 단 한 번도 그 속살이 열린 적이 없었다. 두번째로 여자 성기를 본 것은 국민학교 사학년 때로 미친년의 털투성이 성기였다. 그것은 밤짐승의 거대한 입처럼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보드랍고 환히 빛나는 성기가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세계를 상징하지만 열린 적이 없었던 반면에, 벗어나고 싶은 미친년의 털투성이 성기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 달려들 것만 같은 부조리를 경험한 것이다.

도청소재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설명으로 미루어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인 것 같다) 윤호는 사생아이자 장돌뱅이 출신인 자신과 화려한 도청소재지의 불균형을 견디지 못한다. 학교를 때려치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양아치 짓을 하던 중 고향에 내려온 처녀를 겁탈하려 하지만 거대한 밤짐승의 입이 덥쳐오는 환상에 처녀의 얼굴 위로 눈물을 떨구고 그런 그의 등을 처녀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준다.

함께 양아치짓을 하다가 검거된 춘봉으로부터 죽었다 깨나도 똘마니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니 따로 할 일을 찾아보라는 말에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한 윤호는 명작소설을 읽고 '대개의 주인공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추악하고 역겨운 치부를 그것도 무슨 자랑이라고 어중이떠중이로 길게 늘어놓는데 그게 바로 명작소설' 임을 발견한 후 자신과 같은 출신이 위악(僞惡)의 수단으로 문학을 취할 수 있다고 느낀다.

대학의 백일장에 당선이 되고 장경희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장경희는 화려한 대도시에 윤호가 편입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줄 것 같았지만, 첫 관계 후 장경희가 처녀성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자 완벽한 일체감이 사라져 버림을 느낀다.

대학에 들어가서 윤호는 '아웃사이더', '초현실주의', '퇴폐주의'등 여러 양태의 외피를 써가며 자신을 더욱 밑바닥으로 내팽개 친다. 그는 이런 저런 여자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넝마주의를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더욱 드러내려 한다. 하지만 윤호가 여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관계'가 아닌 '세상과의 관계맺기' 라는 왜곡된 형태였다. 일상적인 인식의 해체, 자기학대를 통한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는 결국 월남에 파병된 뒤 똥통에 빠진 뒤 완성된다. 그는 똥통에 빠진 후 무서운 고참이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씻기고 갖가지 얼차려에서 열외가 되는 것을 보고 치부를 드러내는 극단적인 밑바닥에 도달했음을 알게된다.

그는 월남에서 돌아온 후 룸살롱에 나가는 조영희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털투성이의 거대한 입과 영순이의 생콩 비린내 나는 성기가 부조리의 틀을 깨고 합치되는 것을 느낀다.

그후 작가가 된 윤호는 몇 명과 연애를 해보았냐는 물음에 룸살롱에 나가던 조영희 '단 한명' 이라고 이야기 하며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말한다. 그녀를 정말 다시 찾았느냐는 물음에 윤호는 목포 히빠리 골목의 늙은 창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마흔이 넘은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이렇게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나헌티는 모든 남자들이 똑같어갖고, 한 남자로 여게진단 말이여라우. 펭소에 알고 지낸 남자가 아니고라우. 기냥 나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런 남잔디, 뭐이냐, 저그 보름달 안에서 숨이 헉헉 넘어감서 나를 찾고 있는 것 같단 말이요. 그런 남자야, 곰배팔이먼 어쩌고, 문뎅이먼 어쩌고, 째보먼 어쩐다요? 참말로 나를 원해서, 나가 없으먼 살어남지도 못하는 그런 남자가 바로 그런 남자겠제라우."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가 주인공 김윤호가 고등학교를 작파하고 건달로 지내던 시기의 이야기라면, <여자에 관한 명상>은 그 후의 이야기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OT라는 것을 따라갔는데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서울내기들의 낭창낭창한 자기 소개가 몇 번인가 계속되다가 한눈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가 비칠거리며 일어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다. 앞서 소개하던 동기들의 말씨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어쨌는지 전라도에서 올라온 그 친구는 서울말을 흉내내려 애를 썼다. 그리고 소개가 끝나고, 그의 얼굴이 벌개졌으며,  열패감이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떠올랐다. 차라리 전라도 사투리 그대로 썼다면 좋았을 것을 서울말도 아니고 전라도 사투리도 아닌 말을 그는 사용했다.

그 비슷한 경험은 나도 조금쯤은 가지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연애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을 때에 여자애가 나를 답동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만 해도 인천의 중심지는 동인천이었고 답동성당은 신포시장 맞은편에 있었다. 나는 왠지 주눅이 들었고, 촌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을 인용해가며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 중언부언하였다. 그런 말을 하면 마치 동인천의 화려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할 것처럼. 벌써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참 어렸을 때 얘기다...

영화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는 최민수의 개똥폼 잡는 연기 빼고는 꽤나 괜찮았다. 당시 같이 본 자들 사이에 '애들은 손대지 마라' 는 최민수 대사가 희화화 되어 유행도 했었고, 민망하기 그지 없는 새마을 개사노래도 종종 누군가가 불러댔다. 물론 여학우가 있는 데서 부를 용기가 있는 자는 없었지만. 송기원의 원작 소설은 더욱 좋았다. 그 시절에 나는 어쩌면 김윤호와 같이 나를 내던져가며 세상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을 위장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가을이 싫다. 추워지면 왠지 울적해진다. 그러니 나도 김윤호와 같이 위악(僞惡)의 외피를 뒤집어 쓰고 이 가을을 견뎌야 겠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38257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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