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 83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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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은 이스라엘 국가 정보 부대의 비밀 요원으로 23년간 일을 하다가 은퇴한다. 영화 속 스파이들처럼 권총을 꺼내 들거나 추격전을 벌여 왔던 것은 아니었다. 요엘은 그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고 적당한 값의 정보를 사고 팔았다. 아내 이브리아는 그런 요엘을 '이해한다'고 했다.

요엘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아내가 감전 사고로 사망한다. 비가 오는 날 아내는 전선을 건너려다 감전 당했고, 이를 지켜보던 이웃 이타마르 비트킨이 아내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고 만다. 그것이 아내의 사망과 관련해 요엘이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요엘은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아내와 이웃 비트킨이 함께 자살한 것인지, 또는 자신이 마지막 임무에서 실수한 무엇 때문에 아내가 살해당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임무에서 잃어버린 버지니아 울프의 책 <델러웨이 부인>과 호텔 벽에서 본 도형들, 그리고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도 모를 '휠체어에 탄 인물'에 대해 거듭 생각한다.

 

은퇴한 요엘은 라마트 로탄에 집을 얻고 간질병을 앓는 딸 네타, 어머니와 장모님과 함께 생활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네타의 간질병 증세에 대해 아내 이브리아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 증세가 요엘로부터 기인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요엘은 아내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부동산 업자 아릭은 요엘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였고 이웃에 사는 미국인 남매 랄프와 안 마리 역시 그러했다. 요엘은 안 마리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나 그 관계가 어떤 형태로 흘러갈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 부대의 책임자 르 파트롱의 소환에 응한 요엘은 그가 제안한 복귀 요청을 거절한다. 르 파트롱은 방콕의 여자 정보제공자가 요엘을 특정했기 때문에 그가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르 파트롱은 그녀에게 요엘이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요엘을 특정했다고 생각했다.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요엘은 네타에 대한 책임감과 불길한 느낌 때문에 복귀를 고사한다. 대신 임무를 맡은 요엘의 친구 오스타쉰스키가 얼마 후 시체가 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죄책감을 느낀 요엘은 금기를 깨고 오스타쉰스키의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임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가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한다. 하지만 오스타쉰스키의 누가 그를 방콕으로 보냈는지 묻고, 이름을 말하는 요엘에게 '반역자', '카인' 이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안 마리와 랄프가 요엘에게 관계를 명확히 할 것을 요청하나 요엘은 그들에게 부정적인 답변을 한다. 요엘은 네타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간섭받길 원하지 않는 성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어머니의 퇴행 증상이 심해진다. 요엘은 방콕으로 돌아가 진상을 조사하고, 혹은 조사하는 꿈을 꾸고난 후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다. 그가 자원봉사를 하면서 댄 이름은 사샤 샤인, 바로 오스타쉰스키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때 썼던 가명이었다. 사람들은 요엘이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고, 요엘은 자원봉사를 통해 진실을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을 단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느 순간 진실은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으로 다가올 것이고, 경계심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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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요엘을 정보 부대 요원으로 설정한 후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두 개의 죽음을 통해 개인과 국가의 조화 가능성을 묻는다. 

 

첫번째 죽음은 아내의 죽음이다. 그가 국가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아내가 사망한다. 요엘은 아내의 사망을 단순한 사고사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내를 방치한 데 대한 뒤늦은 죄책감 때문에 그녀가 이웃집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자살했을지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임무 수행 중 실수한 어떤 문제 때문에 아내가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으로까지 확장된다.

 

두번째 죽음은 동료의 죽음이다. 오스타쉰스키는 요엘이 복귀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한다. 요엘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정보 부대를 떠났기 때문에 동료가 죽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속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속죄에 대해 오스타쉰스키의 아버지는 '반역자', '카인' 이라며 비난한다.

 

요엘은 두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나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경계의 바깥에서 죽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국가적인 인물이었을 때는 아내가 죽었고, 그가 사인(私人)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국가적인 차원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각각의 죽음이 그린 경계 바깥에 스스로 위치했기 때문에 진실에 접근할 수 없고 의심과 망상의 경계를 더듬을 뿐이다. 그러한 의심과 망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집안 일을 찾아내지만 그의 어머니는 요엘에게 무언가 '일을 하라'고 권한다. 요엘 스스로도 그런 상태가 되면 과거 자신에게 괜찮은 일거리나 수익을 제안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개인적인 영역과 국가적인 영역을 상정하고 각각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파악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아모스 오즈의 답변은 유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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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탑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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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우에스기 백부의 손에서 자란 오토네는 먼 친척인 겐조가 백 억 엔의 유산 상속자로 자신을 지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단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다카토 슌사쿠라는 사내와 결혼해야 하는데 그 사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겐조는 백 세 가까운 노인으로 과거 은광 투자 때문에 다케우치 다이지라는 사내를 살해하고 미국으로 도망쳐 자수성가 한 인물이다. 그가 미국으로 도망치자 동업자인 다카토 쇼조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된다. 죄책감을 느낀 겐조는 일본으로 돌아와 삼수탑(三首塔)을 만들어 자신이 살해한 다케우치 다이지, 자신 대신 참수당한 다카토 쇼조,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세겨 넣은 공양탑을 만들고 막대한 부를 다케우치 다이지의 아들 다케우치 준고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막상 다케우치 준고를 만나보니 성정이 좋지 않아 겐조는 얼마간의 돈을 주어 준고를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후손과 다카토 쇼조의 후손을 짝지워 준 후 유산을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겐조는 자신의 후손 중 오토네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마음에 들어 이 여자 아이를 다카토 쇼조의 후손 다카토 슌사쿠와 결혼시키기로 결심하고 두 아이의 지문을 두루마기에 찍어 삼수탑에 보관한 후 시간이 흐르자 위와 같은 유산 상속 조건을 내건 것이다.

 

하지만 다카토 슌사쿠를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살해되고 상속 조건은 복잡하게 변하고 만다. 만약 오토네가 슌사쿠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유산은 겐조 노인의 혈육 모두에게 균분되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유산 상속인들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오토네는 그들 모두가 지극히 타락한 사람들임에 경악한다. 클럽의 무희, 아크로바트 댄서, 어린 남성을 노리개로 삼아 쾌락을 즐기는 유한 마담, 수상한 서커스단의 연기자 등 직업도 수상쩍었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기둥서방이라 할 만한 인물들이 하나씩 붙어 유산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토네 역시 다카토 슌사쿠의 사촌 다카토 고로라는 인물에게 유린당한 후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상속인 한 명이 줄어들 때마다 배분되는 몫이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은 직후부터 상속인들이 사망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유한 마담 시마바라 아케미가 사망하고, 밤무대 댄서인 초코와 하나코까지 차례로 살해당한다. 사람들이 살해 당하면서 오토네는 자기도 모르게 다카토 고로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토네는 다카토 고로가 그들을 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그가 무척 냉철하면서도 자상하다는 점에 점차 이끌리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살인 사건의 의심이 오토네에게 쏠리면서 오토네와 다카토 고로는 유산 배분의 단초가 된 삼수탑을 찾는다. 

 

그곳에서 다카토 고로가 들려준 충격적인 진실은 오토네를 경악시키면서도 기쁘게 만든다. 바로 지금껏 악당으로 알고 있었던 다카토 고로가 사실은 다카토 슌사쿠였고, 다카토 고로는 유산을 목적으로 숙부가 자신과 바꿔치기 한 가짜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다카토 고로는 과거 자신의 지문이 찍힌 두루마기를 찾아 존재를 증명하기 전까지는 가짜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것.

 

다작 작가로 알려진 요코미조 세이시의 <삼수탑>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격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렇다할 수수께끼 풀이의 완성도는 보이지 않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등장은 하나 활약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작품은 전후 일본의 분위기를 적실하게 반영하고 있어 그 퇴폐적인 분위기가 농밀하게 그려진다. 여성이 정조를 잃으면 그 즉시 타락하거나 정조를 빼앗은 남성을 좇아야 한다는 관념이나 동성애를 절대악으로 보는 당시 사회 분위기 역시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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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노린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4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문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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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전기회사가 입체자금 조달에 압박을 받다가 어음사기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업무책임자인 회계과장이 이 사건으로 자살하고 만다. 회계과장의 신임을 받던 부하 직원 하기자키 다쓰오는 공분을 느껴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의 친구이자 신문기자인 다무라가 이를 돕는다. 회사 고문 변호사인 세누마씨 역시 전직 형사를 고용해 어음사기꾼들을 추적한다.

사건을 파해치는 과정에서 이들은 어음사기꾼들의 배후에 후네자카 히데아키라는 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우익 조직을 이끌고 있었는데 조직 유지 자금을 위해 어음 사기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어음사기꾼이 자신을 추적하던 전직 형사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후네자카 일파는 변호사마저 납치하여 살해한다. 다쓰오는 사건의 주변을 서성이는 아름다운 여인 우에자키 에쓰코의 존재 때문에 다무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한 채 독자적인 조사를 이어나가는데, 어음사기꾼 겐키치가 목 메달아 자살한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의 부패 상태로 보아 그는 전직 형사를 죽인 직후인 4개월 전에 자살한 것으로 판명이 되자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추리소설은 본디 이상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극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에 더욱 리얼리티가 필요한 법이다......현대처럼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서로의 조건들이 착종되거나 절단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개개로 고립된 상태에서는 추리소설의 수법이 좀더 폭넓게 활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리얼리티의 부여도 더욱 필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세이초는 추리소설에 리얼리티가 부여되어야만 독자에게 실감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인간성과 사회성을 함께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신념으로 세이초는 범행의 트릭보다는 범행의 동기에 주목했다.

 

동기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대로 인간묘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범죄 동기는 극적인 상태에 놓여진 인간의 심리에서 비롯된다......나는 동기에 좀더 사회성이 부여되기를 주장하는 바이다. 그렇게 되면 추리소설도 좀더 폭넓어지면서 깊이를 더해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러는 문제제기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일본 경찰은 살인의 경우 수사 1과가 담당하고 지능범죄의 경우는 수사 2과가 담당한다. 단순 경제사범의 범죄로 시작된 이 소설은 점차 살인으로 발전하고 전후 우익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전쟁 전 일본 우익의 재원은 군부의 기밀비로 경제적 제약을 그다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예전 후원자를 잃어버린 일본 우익은 그 재원을 비합법적인 수단에 호소하기 시작했고 공갈, 사기, 횡령 등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야쿠자와 일본 우익의 긴밀한 관계도 이러한 전후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점과 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주간 요미우리>에 동시 연재한 <너를 노린다>는 연재 당시 <눈의 벽>이라는 제목이었고 195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두 작품 모두 독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8798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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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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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구로, 시로, 아오, 아카, 그리고 다자키 쓰쿠루는 완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아리를 이루었었다. 다섯은 성적인 관심을 배제한 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체감을 느끼며 생활해 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자키 쓰쿠루만 도쿄에 소재한 공대에 입학하고 나머지 넷은 나고야에 소재한 대학을 선택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한동안은 고등학교 시절의 일체감을 확인하며 소식을 주고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자키 쓰쿠루가 고향으로 돌아가 네 명에게 연락을 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분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네 명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한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고, 급기야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다자키 쓰쿠루는 이유도 듣지 못한채 동아리로부터 팽개쳐지고 만다.

한동안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된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만이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어 아슬아슬한 한계선을 넘기기 직전인 날들이 이어진다. 가까스로 삶으로 되돌아오지만 다자키 쓰쿠루의 외모와 성격은 이전보다 날카로와진다.

그 즈음 하이다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하이다는 능숙하고 절제된 폼으로 수영을 하는 친구였는데 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떠났다는 여행 이야기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 LP 3장 세트를 남긴 채 쓰쿠루의 곁을 홀연히 떠나고 만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이 색채가 없는 텅 빈 그릇 같다고 느낀다.

 

소원했던 대로 역사를 만드는 일을 갖게 된 서른 여섯의 다자키 쓰쿠루는 과거의 상실감을 묻어둔 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여자친구 사라가 어느 날 다자키 쓰쿠루의 과거 이야기를 듣더니 그에게 치유되지 못한 부분이 있어 타인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 못하는 것 같다며 네 명을 만나볼 것을 권한다. 16년만에 다자키 쓰쿠루는 과거의 친구들을 찾는다.

아오와 아카는 각기 다른 분야지만 나름대로 성공을 향해 착실한 걸음을 딛고 있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이 동아리에서 추방된 이유가 시로의 충격적인 발언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로는 자신이 다자키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오와 아카는 다자키 쓰쿠루가 강간을 하지 않았음을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시로는 누군가에게 참혹하게 살해 당했고, 구로는 핀란드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핀란드로 가서 구로를 만난 다자키 쓰쿠루는 구로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좋아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시로가 정신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이상하게 되어버린 이야기들을 듣는다. 

 

도쿄로 돌아온 다자키 쓰쿠루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로가 완벽한 균형을 유지했던 동아리의 균열을 감지하고 이를 견디지 못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닌지, 혹은 절제된 성적인 부분들의 영향은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핀란드로 떠나기 전 중년 남성과 걸으며 웃던 사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질투심보다는 물리적인 고통을 느낀다. 

사라에게 다른 남자는 없는지 직설적인 질문을 던진 다자키 쓰쿠루는 어찌되었든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한다. 자신이 할 일은 어쨌든 특별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고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차차 고쳐갈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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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는 미묘한 차이점이 느껴진다. 고통과 상실감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과거에 입었던 상처와 이로 인한 상실감을, 비록 사라라는 여자친구의 권유이긴 하지만, 직시한려고 노력한다. 이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사라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고자 노력한다. 

기존 소설에서였다면 다자키 쓰쿠루는 흘러가는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조용히 관조하고, 원치 않는 결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방식은 아닐 지라도 이번 소설에서는 질투심에 근접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새벽에 전화를 거는, 무라카미 하루키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감에 대한 관조적 태도 덕분에 그만의 스타일을 획득했는지도 모른다. 중견 칭호를 얻은지 오래 전인 그가 새삼 그만의 스타일을 버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향후 그의 작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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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펭귄클래식 33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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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콘스탄스는 클리퍼드 채털리와 결혼했는데 한 달간의 신혼을 보낸 후 클리퍼드가 참전했고, 육 개월 후에 부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된 채 되돌아온다. 1920년 가을, 둘은 클리퍼드의 고향인 랙비로 간다. 그곳은 클리퍼드의 영지로 테버셜 광산이 있었다.

클리퍼드는 그곳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가 소설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내조했고 그가 쓰는 소설들이 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콘스탄스의 아버지 맬컴 경은 그 소설들이 아무런 내용 없는 빈 껍데기 뿐이라 했다. 클리퍼드는 소설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하자 명성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추악했다.

그 즈음 클리퍼드가 초청한 작가 중 마이클리스라는 인물이 콘스탄스에게 반한다. 콘스탄스는 마이클리스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마이클리스는 편벽한 사람이었고, 둘의 관계가 지속되지는 못한다.

클리퍼드는 광산업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불구라는 사실을 그러한 힘을 취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를 시중드는 일에 진력이 나 있었기에 볼턴 부인을 고용해 그를 전적으로 시중들게 한다. 

어느 날 영지의 사냥터지기 맬로즈가 콘스탄스의 눈에 띈다. 그는 조용히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말수가 적었고 전 부인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했다고 했다. 콘스탄스는 맬로즈의 육체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그에게 다가서지만 맬로즈는 모든 인간관계에 불신감만 드러낼 뿐이었다. 탐색과 경계로 점철되는 대화와 만남이 몇 차례 반복된 이후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해제되고 둘은 관계를 나눈다. 따뜻한 성관계를 경험한 콘스탄스는 자신은 클리퍼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맬로즈는 전 부인과 이혼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클리퍼드는 자신의 영지와 신분을 물려줄 아이를 원했고 콘스탄스는 맬로즈의 아이를 임신한다. 콘스탄스는 언니 힐다와 떠난 여행 중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아이가 생겼다고 남편을 속이기로 결심한다.

맬로즈 역시 전부인과의 이혼을 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는다. 전부인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추문이 떠돌자 맬로즈는 해고되어 랙비를 떠나게 된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에게 맬로즈와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 놓는다. 클리퍼드는 콘스탄스가 말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 맬로즈가 콘스탄스에게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낙관적인 편지를 보낸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가거나 기어 넘어간다.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 하늘이 아무리 여러 번 무너진다 해도 말이다. 1917년에 콘스탄스 채털리는 대략 이러한 처지에 처해 있었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 소비에트가 건설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 휩쓸고간 비참한 유럽은 산업화가 가속화되어 인간의 개성이 압살되고 있었다. 로렌스는 영국에 또 다른 재앙이 밀려올 것이라 생각했고 작가의 예언대로 얼마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로렌스는 비참한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따뜻한 성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광산을 산업화의 표징으로 보았고 그곳을 지옥으로 생각했다. 로렌스는 볼셰비즘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볼셰비즘의 유물론적 세계관도 결국 물질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인간의 따뜻한 감정을 회복시킬 수는 없다고 믿은 것 같다.

로렌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영국은 섹스를 통해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룰 때,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존중할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그리하여 사냥터지기 맬로즈의 입을 빌어 남자들이 주황색 바지를 입고 다니며 자신의 신체를 자랑스럽게 뽐내면 여자들 역시 그러할 것이고, 돈이 많지 않더라도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형들이 모이면 술마시며 밤새도록
하던 얘기 되풀이해도 싫증이 나질않는데
형들도 듣기만 했다는
먼 얘기도 아닌
이 지구안에 어떤곳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꽂았다고
거리에 비둘기 날고 (노래 날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그러나 지금은 지난 얘길뿐이라고
지금은 달라 될수가 없다고 왜 지금은 왜 지금은
난 보고싶은데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코니와 멜로즈가 서로 상대방 음모에 꽃을 엮어주는 대목에서 나는 들국화의 노래 "머리에 꽃을" 가사와 우드스탁에서 히피들이 현란한 색깔의 바지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꽃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원인을 거칠게 이야기하면 의식만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LSD 와 같은 약물로 Nirvana를 추구했던 것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로렌스는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알려져 있기로 폐결핵은 성적 욕구를 부추기는 한편, 성불능을 만든다고 한다. 클리퍼드가 하나의 상징이냐는 질문에 로렌스는 약간 얼버무리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클리퍼드가 자신과 오버랩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로렌스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성에 관한 면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따뜻한 성관계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물질만능의 산업화 사회에서 인간을 우선하는 사회로 회귀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서문에 의하면 작품은 외설시비에 말려 재판에 회부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법정은 로렌스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항문성교와 동성애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팽귄클래식에서 출간된 판본은 로렌스가 세번째로 고쳐쓴 판본으로 무삭제 결정판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다. 멜로즈의 사투리 부분을 충청도식 어미로만 처리하고 있는데 여간만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작품에 대해 설명(옹호) 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와 도리스 레싱의 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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