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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해바라기
유즈키 유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황금시간 / 2018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4년 12월, 일본 장기의 최고 명인을 가리는 용승전 제 7국을 앞두고 일본 열도가 흥분에 휩싸인다.
명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라 불리는 젊은 천재 기사 미부 요시키가 타이틀을 따내느냐, 아니면 도쿄대를 나온 엘리트로 장려회를 거치지 않고도 프로가 된 불꽃의 기사 가미조 게이스케가 파란을 이르키느냐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그런데 이 용승전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관람객들 사이에는 두 명의 형사가 끼어 있었다. 한 명은 장려회에서 승단 제한에 걸려 탈회한 뒤 경찰이 된 사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성격이 거칠지만 사건 해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베테랑 이시바 형사였다. 이들은 그해 3월 아마기산에서 발견된 백골 사체의 범인을 찾기 위해 한 팀이 된 것이다.
발견된 사체는 사후 대략 3년이 경과한 시점에 발견되었는데 40~50대의 남성으로 키는 165cm 전후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이 사체 발견 당시 함게 딸려나온 물건이 문제였다. 사체가 껴안고 있던 보자기에는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긴키 섬회양목 장기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가로 600만원을 호가하는 이 물건의 최후 소유자를 찾는 것이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될 터였다. 결국 두 형사는 7벌 밖에 없다고 알려진 이 장기말의 행방을 찾다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설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직 학교 교사 가라사와 고이치로는 장기 애호가였다. 그는 장기 잡지를 소장용과 독서용 두 권을 사서 독서용은 다 읽은 뒤 재활용 물품으로 내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놓은 폐지더미에서 장기잡지만 사라진다. 범인은 소학교 3학년인 가미조 게이스케였다. 어머니의 자살, 아버지의 학대로 게이스케는 신문배달을 해야 하는 게이스케의 유일한 취미는 장기였다.
딱한 처지를 알게된 가라사와는 게이스케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장기도 가르쳐주고, 식사도 대접한다. 때로 목욕탕에도 데리고간다. 게이스케의 벗은 몸에서 발견된 수많은 멍자국과 게이스케의 총명함이 스러지는 것이 아쉬웠던 가라사와는 게이스케를 장려회에 입회시켜 바둑기사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게이스케의 아버지 요이치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알콜과 도박에 중독된 요이치는 아들의 미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둘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결국 친권에 막혀 게이스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가라사와는 절망한다. 게이스케도 더 이상 가라사와를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도쿄대 합격이 결정된 게이스케가 자신을 아들처럼 대해준 가라사와를 찾아와 작별인사를 한다. 가라사와는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긴기 섬회양목 장기말을 게이스케에게 이별의 정표로 준다.
도쿄대에 입학한 게이스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 한다. 아버지는 일체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게이스케는 이로써 부자지간의 연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게이스케는 서점에서 고흐의 화집을 발견하고 홀린 듯 구입한다. 게이스케는 자신이 왜 해바라기에 매료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집을 구입해 돌아오는 길에 게이스케는 우연히 장기 도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될 사내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도묘 시게요시, 별명은 '귀신잡이 주케이'였다. 아마추어에서는 그를 상대할 자가 없다 했고, 프로와의 대결에서도 밀리는 실력이 아니라했다. 다만 그는 돈을 걸고 두는 '진검' 바둑만 고집했다.
도묘는 게이스케가 자신의 기보를 외우고 있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게이스케에게 내기 바둑을 두도록 종용한 뒤 게이스케에게 돈을 걸지만 승부는 게이스케의 패배였다. 이후 도묘는 당연하다는 듯이 게이스케의 방에 출입하며 신세를 지기 시작한다. 그는 야쿠자와 껄끄러운 관계로 거처조차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도묘의 강권으로 게이스케는 도박 여행을 떠나게 된다. '손도끼잡이 모토지'라는 도박장기사가 죽음을 앞두고 한 판에 100만엔을 걸고 7판을 대결하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도묘는 100만엔 밖에 없었지만 게이스케가 돈을 대는 도련님이라는 설정으로 7판을 치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째 판에서 도묘가 지는 바람에 밑천 100만엔이 날아가 버리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도묘는 게이스케를 윽박질러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말을 타인에게 400만엔에 넘긴다는 각서를 쓰게 한다. 자신이 이기면 반드시 되찾아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러나 이후 6판을 모두 이긴 도묘는 약속과 달리 도망가버리고 게이스케는 은인인 가라사와가 준 소중한 장기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제서야 도묘는 첫째 판도 일부러 져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장기말도 팔아먹기 위해 상황을 그렇게 몰아간 것.
게이스케는 도쿄대를 졸업한 뒤 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가 자기사업을 일으킨다. 그 사업이 성공해 번듯한 사업가가 되자 인연이 끊겼던 아버지가 게이스케 앞에 나타난다. 그는 게이스케가 비정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간지에 폭로하겠다며 끊임없이 돈을 요구한다. 요구액수가 점점 늘어나자 게이스케는 아버지와 연을 끊는 댓가로 고액을 한번에 준 뒤 각서를 받기로 한다. 하지만 각서를 아버지가 교묘한 속임수로 찢어버리자 둘은 몸싸움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게이스케의 외가는 상당히 부유했으나 근친적인 성향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집안이었다. 게이스케의 어머니 역시 친오빠와 근친상간을 했고 그 결과 게이스케가 태어난 것이다. 요이치는 게이스케의 어머니와 얼마간의 재산이 욕심이 나 결혼한 것이었다. 결국 요이치와 게이스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던 것.
충격에 휩싸인 게이스케의 앞에 죽을 병에 걸린 도묘가 나타난다. 도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내기 장기를 두자 했다. 게이스케는 도묘에게 강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장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그와 대국했다. 그리고 돈을 잃었다.
그런 게이스케에게 도묘가 과거에 자신이 사기친 400만엔을 다른 방식으로 갚겠다고 했다. 누군가 살해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그것으로 빚갈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게이스케는 아버지라고 믿고 살아왔던, 자신을 그토록 학대하고 지금은 돈을 우려내기 위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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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스케가 매료된 해바라기는 그의 어머니 고향이 자랑하는 꽃이었다. 게이스케는 자신의 피에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광적인 어떤 것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 매료된 이유였을 것이다.
게이스케와 도묘는 아마기산에서 마지막 대국을 벌인다. 도묘는 게이스케가 불러준 이름에 대해 해야할 일을 했다면서 자신이 마지막 대국에서 이기면 잔신을 죽여 아마기산에 묻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도묘는 대국에서 패배한다. 그는 스스로 칼을 들어 자살하고, 게이스케는 대국에 사용한 장기말을 시신 위에 놓아준다.
1994년 12월의 제 7국은 게이스케의 2보 반칙패로 결정난다. 대국이 끝난 후 사노와 이시바 형사가 게이스케를 따라 신칸센역으로 들어가지만 게이스케는 마침 들어온 신칸센을 향해 몸을 날린다.
"원한이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야. 시기, 질투, 분노, 자존심, 강한 열등감, 인생의 절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끈적끈적하게 바짝 졸아들어 있는 곳이야"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장기의 비정한 세계를 이렇게 평가하는데, 도박 장기의 세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복기는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인데, 진짜 도박 장기사끼리 벌이는 대전에서 복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프로의 대국과 달리 자신의 예측이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겉치레에 연연하는 사람은 조만간 잡아먹힌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독한 늑대의 피>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풍기는 진한 수컷 내음에 현혹되어 나는 작가가 남성이라고 속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해 보니 1968년생 여성작가다. 편견의 산물이다.
일본장기(쇼기)를 소재로 반상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긴장을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안정된 호흡으로 이십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역량도 훌륭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도 탁월하다. 얼핏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이나 <점과 선>에서 느꼈던 우직한 힘을 느낀 것도 같다. 오랜만에 진지함이 느껴지는 추리소설을 읽어서 기분이 썩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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