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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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도시 진평군 은파면에 소재한 은파고등학교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이 학교 교사 김준후는 아내 권영주와 성격 차이로 따로 산 지 3년째다. 이혼을 원하던 김준후와 달리 아내는 이혼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는 외부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했고, 특히나 그 시점에 들어선 뱃속의 아이를 지울 생각도 없었다.

은파에서 혼자 생활하게 된 김준후는 담임을 맡고 있는 반 학생 채다현과 불륜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야근하는 김준후를 채다현이 찾아오고, 둘은 3층 교실에서 허겁지겁 정사를 치룬다.

정사 직후 수위 황권중이 순찰을 도는 통에 교실을 빠져나온 김준후가 다시 3층으로 올라갔을 때 거기엔 경악할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채다현이 교실 천장에 나체로 목메달려 있었던 것이다. 목에는 자상이 있었고, 교실 바닥에는 비즈가 잔뜩 붙은 요란한 무늬의 칼이 떨어져 있었다. 채다현이 바닥을 딛고 올라선 흔적이 없었기에 김준후는 제3의 인물이 채다현을 살해한 뒤 빠져나갔다고 보았다.

심폐소생술이 무위로 끝나자 김준후는 채다현의 몸에 남아있는 정액 때문에 자신이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릴 처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김준후는 황권중의 눈을 피해 채다현의 시체를 삼은호수에 유기하기로 작정한다. 시체가 떠오른 후 진짜 살인범이 잡히길 기대하면서...

채다현의 시체가 며칠 뒤 떠올랐고 베테랑 강치수 형사가 사건에 투입된다. 강치수는 채다현이 사라진 장소가 학교라는 사실에 주목해 일찌감치 김준후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준후의 알리바이가 일부 밝혀지고 다른 용의자들이 튀어나오면서 사건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먼저 채다현의 어머니가 사기전과로 복역하다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기는 상당한 규모었고, 피해자 중에는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김준후와 같은 학교 선생 조미란의 남편이 끼어 있었다.

조미란은 물론이고 채다현의 친구였던 정은성 역시 채다현을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 특히 정은성은 채다현을 지속적으로 폭행하고 돈까지 뺏은 정황이 있었으므로 주요 용의자였다.

다음으로 김준후의 아내 권영주가 있다. 그녀는 최근 은파로 와 김준후 집에 머물기 시작했는데, 채다현이 사망하기 전날 채다현의 집까지 찾아가 따귀를 때렸다는 것이 밝혀진다. 불륜에 대한 응징으로 살인이 선택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므로 김준후는 아내를 의심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는 시점에 김준후에게 협박 편지가 날아든다. 채다현을 살해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삼은호수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김준후는 황권중 밖에 협박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다 보고 다소간의 금전적 요구에는 응할 생각으로 삼은호수에 간다.

하지만 삼은호수에 간 김준후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기 직전의 황권중을 발견하고, 또다시 살인 누명을 쓸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를 피한다.

며칠 뒤 경찰은 조미란을 황권중 살해범으로 체포한다. 유독가스가 포르말린으로 밝혀졌기에 과학실에 출입할 수 있으며 알리바이가 없는 그녀가 자연스레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조미란은 채다현 살해 역시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하는데, 경찰은 그녀의 진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녀는 현장에서 발견된 칼이 자살한 남편의 것이었다는 점 때문에 아들이 범인이라 착각했다. 그러던 차에 황권중이 김준후에게 보낸 협박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거기에 '증거 운운'하는 내용이 있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황권중을 살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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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오래된 논쟁 중 하나가 서술트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이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술했던 화자가 사실은 범인이었다는 내용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두고 반 다인은 '후안무치한 트릭이고 1페니 동전을 5달러 금화라고 속여 건내는 사기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와 반대였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 소설을 꽤 극찬했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미스터리 소설이 작가와 독자의 지적 게임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야 하고 작가만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사실 범인은...' 으로 시작하는 헛소리를 나중에 지껄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한 작가가 프레더릭 더네이와 멘프리드 리(엘러리 퀸이라는 공동필명으로 작품 발표)이다. 이들은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당당하게 공개한 뒤 '독자에게 도전'을 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했다.

반면 매우 자주 이런 원칙에 반해 '사실은~'을 남발했던 작가가 아가사 크리스티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홍학의 자리>는 갖가지 기교가 난무하는 소설이며, 특히 서술트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다. 서술트릭은 전술했듯 100년 전 아가사 크리스티가 써먹었을 당시에도 찬반을 일으킨 양날의 검이다. 그런 서술트릭이 현재에도 통용되려면 역시나 '정정당당함'이 필요하다.

작가가 여러가지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선입견이나 주관적 판단으로 인해 오인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독자는 자신의 무릎을 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런 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다. 반면에 작가가 서술트릭을 써먹기 위해 여러가지 장난질을 친 것을 깨닫게 되면 작가의 신의성실을 문제삼게 되고 급기야 사기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홍학의 자리>의 주요 트릭은 채다현을 제3자가 목메달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현장, 목에 자상을 입고 목메달려 있기 까지 했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음에도 숨이 돌아오지 않아서 사망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 사체의 호수 유기 부분을 의도적으로 프롤로그에 배치에 시신이 곧바로 유기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든 기교, 그리고 채다현의 성별이다.

이 중 호수 유기 트릭 외에는 전부 사기에 가깝다. 트릭의 성공 여부는 '사실은~'을 붙여보면 된다. 채다현은 '사실은' 점프해서 올가미에 목을 집어 넣었고, '사실은' 목에 자상을 입고 목메달렸으며 심폐소생술로 숨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살아 있었고, '사실은' 김준후가 양성애자였었고 등.

특히나 채다현이 남자였다는 사실은 일면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이 가신 뒤 상황을 곱씹어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뿌옇게 처리한 권영주가 떠오른다.

김준후와 채다현이 빚어낼 멋들어진 사기극을 위해 남편이 양성애자이고, 동성애인으로 제자를 선택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드러나는 모습에 집착해 이혼을 거부하고 나아가 남편의 변호사비를 대는 권영주.

그녀의 모습은 진 리스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언급한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을 떠오르게 한다. 버사 메이슨은 제인과 로체스터가 결혼하는 데 걸림돌이며 손필드 저택에 방화를 저지르는 미친 크리올 여성이다. 버사 메이슨을 철저히 광녀로 치부하고 감금시키고 침묵시킴으로서 제인과 로체스터를 드러내었듯, 정해연은 권영주를 기괴하게 만들어 김준후와 채다현의 트릭을 완성시킨다.

남녀의 역할에 관한 선입견이, 이성애만이 독점적 육체행위라고 이해하는 고정관념이 채다현의 성별을 오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쩌면 권영주의 기괴함이 독자를 착각하게 만든 것 아닐까 생각한다. 정해연의 서술트릭을 좋은 쪽으로 보아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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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해바라기
유즈키 유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황금시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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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일본 장기의 최고 명인을 가리는 용승전 제 7국을 앞두고 일본 열도가 흥분에 휩싸인다.

명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라 불리는 젊은 천재 기사 미부 요시키가 타이틀을 따내느냐, 아니면 도쿄대를 나온 엘리트로 장려회를 거치지 않고도 프로가 된 불꽃의 기사 가미조 게이스케가 파란을 이르키느냐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그런데 이 용승전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관람객들 사이에는 두 명의 형사가 끼어 있었다. 한 명은 장려회에서 승단 제한에 걸려 탈회한 뒤 경찰이 된 사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성격이 거칠지만 사건 해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베테랑 이시바 형사였다. 이들은 그해 3월 아마기산에서 발견된 백골 사체의 범인을 찾기 위해 한 팀이 된 것이다.

발견된 사체는 사후 대략 3년이 경과한 시점에 발견되었는데 40~50대의 남성으로 키는 165cm 전후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이 사체 발견 당시 함게 딸려나온 물건이 문제였다. 사체가 껴안고 있던 보자기에는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긴키 섬회양목 장기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가로 600만원을 호가하는 이 물건의 최후 소유자를 찾는 것이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될 터였다. 결국 두 형사는 7벌 밖에 없다고 알려진 이 장기말의 행방을 찾다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설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직 학교 교사 가라사와 고이치로는 장기 애호가였다. 그는 장기 잡지를 소장용과 독서용 두 권을 사서 독서용은 다 읽은 뒤 재활용 물품으로 내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놓은 폐지더미에서 장기잡지만 사라진다. 범인은 소학교 3학년인 가미조 게이스케였다. 어머니의 자살, 아버지의 학대로 게이스케는 신문배달을 해야 하는 게이스케의 유일한 취미는 장기였다.

딱한 처지를 알게된 가라사와는 게이스케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장기도 가르쳐주고, 식사도 대접한다. 때로 목욕탕에도 데리고간다. 게이스케의 벗은 몸에서 발견된 수많은 멍자국과 게이스케의 총명함이 스러지는 것이 아쉬웠던 가라사와는 게이스케를 장려회에 입회시켜 바둑기사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게이스케의 아버지 요이치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알콜과 도박에 중독된 요이치는 아들의 미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둘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결국 친권에 막혀 게이스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가라사와는 절망한다. 게이스케도 더 이상 가라사와를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도쿄대 합격이 결정된 게이스케가 자신을 아들처럼 대해준 가라사와를 찾아와 작별인사를 한다. 가라사와는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긴기 섬회양목 장기말을 게이스케에게 이별의 정표로 준다.

도쿄대에 입학한 게이스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 한다. 아버지는 일체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게이스케는 이로써 부자지간의 연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게이스케는 서점에서 고흐의 화집을 발견하고 홀린 듯 구입한다. 게이스케는 자신이 왜 해바라기에 매료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집을 구입해 돌아오는 길에 게이스케는 우연히 장기 도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될 사내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도묘 시게요시, 별명은 '귀신잡이 주케이'였다. 아마추어에서는 그를 상대할 자가 없다 했고, 프로와의 대결에서도 밀리는 실력이 아니라했다. 다만 그는 돈을 걸고 두는 '진검' 바둑만 고집했다.

도묘는 게이스케가 자신의 기보를 외우고 있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게이스케에게 내기 바둑을 두도록 종용한 뒤 게이스케에게 돈을 걸지만 승부는 게이스케의 패배였다. 이후 도묘는 당연하다는 듯이 게이스케의 방에 출입하며 신세를 지기 시작한다. 그는 야쿠자와 껄끄러운 관계로 거처조차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도묘의 강권으로 게이스케는 도박 여행을 떠나게 된다. '손도끼잡이 모토지'라는 도박장기사가 죽음을 앞두고 한 판에 100만엔을 걸고 7판을 대결하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도묘는 100만엔 밖에 없었지만 게이스케가 돈을 대는 도련님이라는 설정으로 7판을 치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째 판에서 도묘가 지는 바람에 밑천 100만엔이 날아가 버리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도묘는 게이스케를 윽박질러 초대 기쿠스이게쓰의 말을 타인에게 400만엔에 넘긴다는 각서를 쓰게 한다. 자신이 이기면 반드시 되찾아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러나 이후 6판을 모두 이긴 도묘는 약속과 달리 도망가버리고 게이스케는 은인인 가라사와가 준 소중한 장기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제서야 도묘는 첫째 판도 일부러 져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장기말도 팔아먹기 위해 상황을 그렇게 몰아간 것.

게이스케는 도쿄대를 졸업한 뒤 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가 자기사업을 일으킨다. 그 사업이 성공해 번듯한 사업가가 되자 인연이 끊겼던 아버지가 게이스케 앞에 나타난다. 그는 게이스케가 비정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간지에 폭로하겠다며 끊임없이 돈을 요구한다. 요구액수가 점점 늘어나자 게이스케는 아버지와 연을 끊는 댓가로 고액을 한번에 준 뒤 각서를 받기로 한다. 하지만 각서를 아버지가 교묘한 속임수로 찢어버리자 둘은 몸싸움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게이스케의 외가는 상당히 부유했으나 근친적인 성향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집안이었다. 게이스케의 어머니 역시 친오빠와 근친상간을 했고 그 결과 게이스케가 태어난 것이다. 요이치는 게이스케의 어머니와 얼마간의 재산이 욕심이 나 결혼한 것이었다. 결국 요이치와 게이스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던 것.

충격에 휩싸인 게이스케의 앞에 죽을 병에 걸린 도묘가 나타난다. 도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내기 장기를 두자 했다. 게이스케는 도묘에게 강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장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그와 대국했다. 그리고 돈을 잃었다.

그런 게이스케에게 도묘가 과거에 자신이 사기친 400만엔을 다른 방식으로 갚겠다고 했다. 누군가 살해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그것으로 빚갈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게이스케는 아버지라고 믿고 살아왔던, 자신을 그토록 학대하고 지금은 돈을 우려내기 위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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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스케가 매료된 해바라기는 그의 어머니 고향이 자랑하는 꽃이었다. 게이스케는 자신의 피에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광적인 어떤 것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 매료된 이유였을 것이다.

게이스케와 도묘는 아마기산에서 마지막 대국을 벌인다. 도묘는 게이스케가 불러준 이름에 대해 해야할 일을 했다면서 자신이 마지막 대국에서 이기면 잔신을 죽여 아마기산에 묻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도묘는 대국에서 패배한다. 그는 스스로 칼을 들어 자살하고, 게이스케는 대국에 사용한 장기말을 시신 위에 놓아준다.

1994년 12월의 제 7국은 게이스케의 2보 반칙패로 결정난다. 대국이 끝난 후 사노와 이시바 형사가 게이스케를 따라 신칸센역으로 들어가지만 게이스케는 마침 들어온 신칸센을 향해 몸을 날린다.

"원한이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야. 시기, 질투, 분노, 자존심, 강한 열등감, 인생의 절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끈적끈적하게 바짝 졸아들어 있는 곳이야"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장기의 비정한 세계를 이렇게 평가하는데, 도박 장기의 세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복기는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인데, 진짜 도박 장기사끼리 벌이는 대전에서 복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프로의 대국과 달리 자신의 예측이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겉치레에 연연하는 사람은 조만간 잡아먹힌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독한 늑대의 피>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풍기는 진한 수컷 내음에 현혹되어 나는 작가가 남성이라고 속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해 보니 1968년생 여성작가다. 편견의 산물이다.

일본장기(쇼기)를 소재로 반상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긴장을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안정된 호흡으로 이십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역량도 훌륭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도 탁월하다. 얼핏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이나 <점과 선>에서 느꼈던 우직한 힘을 느낀 것도 같다. 오랜만에 진지함이 느껴지는 추리소설을 읽어서 기분이 썩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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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을 위한 행복한 청소부 - 2015 초등 국어 교과서 수록, 한영합본
모니카 페트 지음, 김경연.수잔나 오 옮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 풀빛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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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페트는 1951년생으로 독일에서 태어났다. 1980년, 대학시절 시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동급생이 자살한 사건을 소재로 <시험, Examen> 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가 된 그녀는 이후 어린이 동화와 청소년 소설, 스릴러 등을 발표했다.

본 작품집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행복한 청소부 Der Schilderputzer, 1995> 는 간판을 닦는 청소부 이야기이다. 작가와 음악가들의 거리였기에 간판에는 베토벤, 하이든, 괴테, 실러, 브레히트, 잉게보르크 바흐만 등의 이름이 씌여 있었고 청소부는 그들에 대해 공부한 끝에 재미있는 강연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교수가 되라고 말했지만 청소부는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생각을 모으는 사람 Der Gedankensammler, 1986> 는 생각을 모으는 부루퉁씨 이야기이다. 그는 매일 아침부터 여러가지 생각들을 가죽 가방에 모은 뒤 갈퀴로 깨끗하게 흙은 고른 커다란 화단에 이것들을 심는다. 생각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곧이어 무수히 많은 작은 조각들로 알알이 부서져 멜로디를 내며 세상으로 다시 흩뿌려진다.

<바다로 간 화가 Der Maler, die Stadt und das Meer, 1996> 는 가난한 화가의 이야기다. 화가는 바다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모아 바다로 가서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바다 그림을 그리며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떨어진 화가는 도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가는 매일같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바다를 동경하다 어느 날 부터 그림속으로 들어가서 살게되었다.

물질과 의식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작가의 경향과, '안분자족하는 삶이야 말로 행복'이라는 편협한 강박이 느껴지는 이야기들로 내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544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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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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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의 한 아파트 욕실에서 카밀라 로엔이라는 여성이 사망한 채 발견된다. 무단침입 흔적은 없었고, 무기로 사용된 총은 집안 쓰레기통에서 발견된다. 특이한 점은 그녀의 왼손 집게 손가락이 잘려나가 있다는 것과, 눈꺼풀 뒤에서 오각형의 붉은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두번째 희생자는 리스베트 발리라는 이름의 가수였다. 공연 제작자인 그녀의 남편 빌리 발리에 따르면, 그녀가 감자 샐러드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해리의 상관 비아르네 묄레르에게 우편으로 리스베트 발리의 왼손 가운뎃 손가락이 배달되면서 사건은 연쇄 살인으로 확정된다. 이번에도 오각형의 붉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세번째 희생자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바바라 스벤센이었다. 범인은 대담하게도 사무실에 침입해 화장실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희생자의 넷째 손가락이 잘려 나갔고, 오각형 별 모양의 붉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발견된다.

한편, 해리 홀레는 동료 엘렌 옐텐이 살해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곤경에 빠져 있었다. 엘렌 옐텐은 '프린스'로 알려진 무기밀매상을 추적하다 살해 당했는데, 유력한 용의자는 스베레 올센이라는 신나치였다.

그런데 그 스베레 올센을 같은 경찰인 톰 볼레르가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톰 볼레르는 정당방위로 인정되었지만, 프린스로 이어지는 모든 증거 역시 사라지고 만다.

해리는 톰 볼레르가 사실은 프린스가 아닐까 의심하던 차였고, 그가 저지른 수많은 '정당방위 살인' 역시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료 경찰들, 게다가 직속 상관인 묄레르 마저 해리를 믿어 주지 않았다. 해리는 다시 술에 빠져 들었고, 라켈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해리는 사직서를 썼고, 상관이 휴가에 다녀와 최종 승인을 하기까지 3주 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이 시기에 붉은 오각형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연쇄 살인이 발생한 것이다.

해리는 3주 사이에 연쇄 살인을 해결하고, 무기 밀매상 '프린스'가 사실은 톰 묄레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해리는 먼저 잘려져 나간 손가락이 살인 순서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다음으로는 펜타그램의 반복적 등장이 범죄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갖고 있지 않을까 가정한다. 5각형 다이아몬드, 5개인 손가락, 5일 간격으로 5시경 이루어지는 살인. 그렇다면 살인 위치도 5각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리는 오슬로 시내에 피해자 위치를 표시해본다. 그러자 정확히 5각형 모양의 별이 완성되었다. 해리는 이를 근거로 다음 살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CCTV 업자를 대동해 다음 살인 장소로 추측되는 곳으로 갔으나 그곳은 다음 번 살인 예정지가 아니라 이미 살인이 일어났던 장소였다. 피해자는 마리우스라는 대학생으로 엄지 손가락이 잘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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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붉은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의 키우부 광산에서 채굴된다. 전쟁자금을 목적으로 반군들이 운영하는 광산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로로 판매되기 어려워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주로 가공된다.

경찰은 붉은 다이아몬드와 무기 밀매 루트를 더듬다 유력한 용의자로 스벤 시버첸을 지목한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다이아몬드 밀수를 배운 뒤 그 사업을 꽤 잘해 나가고 있었다. 그의 출장 일정과 살인 주기가 정확히 일치하자 경찰은 그의 어머니의 집에서 잠복하다 체포하기로 한다.

그런데 마침내 나타난 스벤을 톰 볼레르가 예의 '정당방위 살인'으로 죽이려 하고, 이를 베아테 뢴이 목격한다. 이로서 톰 볼레르릐 '프린스 설'은 최소한 베아테 뢴에게는 설득력을 얻게 된다.

한편 해리는 스벤 시버첸이 진범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리스베트 발리의 배달된 손가락의 손톱 밑에서 회향 씨앗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빌리 발리는 리스베트 발리의 손가락이 자신의 항문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인정했는데, 씨앗이 소화되는 시간을 고려할 때 빌리 발리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범인은 빌리 발리로 밝혀지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빌리 발리는 아내 리스베트 발리가 여행지에서 스벤 시버첸과 만나 외도한 것에 격분해 범행 계획을 세운 것이다. 오각형과 다이아몬드 따위는 모두 연막에 불과했다.

그는 스벤 시버첸을 연쇄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해 희귀한 붉은 다이아몬드를 범행 현장에 남겨 두었고, 범행 직전에는 그와 무기 거래를 했다. 물론 알리바이를 없애기 위해 목격자가 없는 곳을 거래 장소로 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귀한 붉은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자, 살인이 일어나는 시점마다 오슬로에 있었으면서 적당한 알리바이도 없는 자, 바로 스벤 시버첸이 연쇄살인범으로 탄생하는 계획이었으나 해리에 의해 간파당해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찰 내 자경단을 운영하는 한편, 무기 밀거래로 자금을 조달했던 '프린스'로 밝혀진 톰 묄레르는 라켈의 아들 올레그를 납치해 해리를 처치하려다 도리어 엘리베이터에 끼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자 <오슬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 줄타기를 하기로 유명한 해리가 이번 작품에서는 알콜 중독 재발, 3주 후 사직, 라켈과의 관계 파탄, 아들처럼 생각하는 올레그의 납치 등 총체적 난국을 보인다.

그런 해리 홀레의 처지가 다소 민망했던지 작가는 듀크 엘링턴의 일화를 슬쩍 끼워 넣는다. 듀크 엘링턴은 피아노를 너무 완벽하게 조율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 이유가 너무 완벽하게 조율된 피아노의 음에서는 온기와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고정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가 어쩌면 그가 가진 온갖 인간적 문제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타인 역시 자신과 비슷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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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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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토니 라스트와 브랜다 부부는 헤턴 대저택을 물려받아 무료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남편 토니 라스트는 저택 수리 외에 딱히 관심 분야가 없는 권태로운 인물이었고, 브랜다는 한때 아름다운 미모로 주목받았으나 결혼 후 사교계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빠른 사업가인 비버 부인의 아들 존 비버가 헤턴 저택을 방문한다. 토니 라스트가 의례적으로 건낸 초대의 인사를 존 비버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결과였다. 존 비버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없었고 그럴싸한 일자리도 없는, 별볼일 없는 젊은이었다.

토니는 자기집을 방문한 존 비버를 아내 브랜다에게 쓸어 맡기고 본인은 자리를 비우는 등 홀대한다. 남편 대신 손님을 응대하게 된 브랜다는 젊은 남성 존 비버가 본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존 비버는 브랜다의 외모에 끌렸지만 단지 돈이 많이 들 것 같다는 이유로 관계를 발전시킬 의지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존 비버의 태도는 브랜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결과적으로 브랜다 주도 하에 둘은 불륜에 빠져든다.

이 즈음 비버 부인이 임대수익과 실내장식을 팔아치울 욕심에 브랜다에게 런던의 자그마한 아파트 임대를 권하는데 브랜다가 응낙하여 라스트 부부는 두 집 살림을 하게 된다. 브랜다는 남편에게는 런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둘러댔고, 라스트는 이를 순진하게 믿었기에 가정은 외형만 유지되는 처지가 된다.

얼마 후 헤턴 저택 인근에서 사냥대회가 열리고 여기에 구경 갔던 라스트 부부의 아들 존이 낙마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들이 사망했는데도 부부의 태도는 매우 기이했다.

남편은 아들 사망 당시 다친 다른 여성을 걱정하는가 하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천박한 여성과 동물 소리를 흉내내는 우스꽝스러운 카드 놀이를 한다. 브랜다 역시 매우 침착한 태도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존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랜다는 남편 라스트에게 '존 비버를 사랑하고, 당신과 이혼하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다. 라스트는 아들에 이어 아내도 잃은 오쟁이진 남편 처지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위해 '불륜 증거 만들기'에 돌입한다.

당시 영국 법률이 인정하는 이혼 사유는 간통뿐이었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교계에서는 이혼을 하기 위해 탐정을 사고 배우자 아닌 다른 여성, 혹은 남성과 호텔에 들어 간통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연극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라스트는 아내가 간통을 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간통을 벌인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판단하여 창녀 밀리를 섭외한 뒤 탐정들과 함께 호텔로 간다.

한편, '불륜 증거 만들기 여행' 직후 브랜다의 오빠 레지가 찾아와 이혼 조건을 연 2,000파운드로 올리겠다고 통보한 뒤 헤턴 저택을 팔 것을 종용한다. 라스트는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자존심의 원천인 헤턴 저택을 건드리려는 것에 대해 참았던 분을 터뜨린다. 그리고 이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한 후 브라질로 여행을 떠나버린다.

브라질 여행 중 라스트는 메신저 박사라는 탐험가를 만나 '잃어버린 도시 찾기'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중도에 라스트가 열병에 걸려 앓아 누운 사이 메신저 박사가 폭포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만다. 오지에 고립된 라스트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다.

얼마 뒤 라스트는 가까스로 토드라는 자의 손에 의해 구출되지만 그는 라스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책을 읽히려는 목적을 갖고 있을 뿐 그를 집으로 되돌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라스트를 찾아온 구조대 마저 토드가 따돌리자 라스트는 현실세계로부터 영영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만다.

헤턴 대저택은 라스트의 친인척에게 상속되고 존 비버와 헤어진 브랜다는 라스트의 친구이자 사교계의 방탕아 조크 크랜트멘지스와 결혼한다.

헤턴 저택에는 라스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헤턴의 앤터니 라스트, 탐험가, 1902년 헤턴에서 출생. 1934년 브라질에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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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에벌린 워의 아버지는 문학 평론가 아서 워이고 형은 소설가 엘릭 워이다.

자신의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을 반영해 쓴 <한 줌의 먼지>는 T.S.엘리엇의 <황무지> 중 첫 번째 시 "The Burial of the Dead"를 책 서문에 인용한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바로 그 유명한 시의 일부이다.

And I will show you sometihg different from either

Your sahdow at morning striding behind you

Or your shadow at evening rising to meet you;

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아침에 네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나는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 공포를 너에게 보여 주리라.



삶의 무상함, 죽음을 연상케 하는 handful of dust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이 소설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방향성을 잃은 당시 영국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주인공 라스트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헤턴 저택이 1864년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어 흥미(의미)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 만치 집착한다. 아들의 죽음에도, 아내의 이혼 통보에도 분개하지 않던 그가 헤턴 저택을 매각해 위자료를 달라는 말에는 분기탱천하여 처음으로 인간적인 분노를 보여준다. 그리고 선택한 결과가 오지에서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결국 지킬 가치가 없는 과거에 얽메어 불행한 미래를 맞는 라스트의 모습이야 말로 작가 에벌린 워가 씁쓸하게 전망하는 영국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한편, 아내 브렌다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는지를 따져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브렌다는 존 비버가 자신에게 무심하다는 이유로 그와 불륜에 빠져든다. 욕망은 본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기 쉬우므로 이 대목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브렌다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조크 그랜트멘지스였다. 소설 초입에 존 비버 부인은 사교계에서 '브렌다가 조크 그랜트멘지스와 결혼할 것이라 예상했었다'는 발언을 한다. 이로 보아 브렌다가 최종 선택한 조크 그랜트멘지스 '가질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손을 뻗으면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자명하다. 브렌다의 불륜은 또 다시 시작될 것이고, 이것이 당시 영국 사교계의 기본 프로세스였을 것이다. 자끄 라캉의 '궁정풍 연애가 이상화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작품 말미에는 <또 다른 결말>이 있다. 라스트가 브라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브렌다는 존 비버와의 짧은 불륜에 대해 용서를 빈다. 하지만 라스트가 런던 아파트를 브렌다에게는 비밀로 하고 유지하기로 함으로서 다음 불륜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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