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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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상의 도시 진평군 은파면에 소재한 은파고등학교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이 학교 교사 김준후는 아내 권영주와 성격 차이로 따로 산 지 3년째다. 이혼을 원하던 김준후와 달리 아내는 이혼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는 외부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했고, 특히나 그 시점에 들어선 뱃속의 아이를 지울 생각도 없었다.

은파에서 혼자 생활하게 된 김준후는 담임을 맡고 있는 반 학생 채다현과 불륜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야근하는 김준후를 채다현이 찾아오고, 둘은 3층 교실에서 허겁지겁 정사를 치룬다.

정사 직후 수위 황권중이 순찰을 도는 통에 교실을 빠져나온 김준후가 다시 3층으로 올라갔을 때 거기엔 경악할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채다현이 교실 천장에 나체로 목메달려 있었던 것이다. 목에는 자상이 있었고, 교실 바닥에는 비즈가 잔뜩 붙은 요란한 무늬의 칼이 떨어져 있었다. 채다현이 바닥을 딛고 올라선 흔적이 없었기에 김준후는 제3의 인물이 채다현을 살해한 뒤 빠져나갔다고 보았다.

심폐소생술이 무위로 끝나자 김준후는 채다현의 몸에 남아있는 정액 때문에 자신이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릴 처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김준후는 황권중의 눈을 피해 채다현의 시체를 삼은호수에 유기하기로 작정한다. 시체가 떠오른 후 진짜 살인범이 잡히길 기대하면서...

채다현의 시체가 며칠 뒤 떠올랐고 베테랑 강치수 형사가 사건에 투입된다. 강치수는 채다현이 사라진 장소가 학교라는 사실에 주목해 일찌감치 김준후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준후의 알리바이가 일부 밝혀지고 다른 용의자들이 튀어나오면서 사건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먼저 채다현의 어머니가 사기전과로 복역하다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기는 상당한 규모었고, 피해자 중에는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김준후와 같은 학교 선생 조미란의 남편이 끼어 있었다.

조미란은 물론이고 채다현의 친구였던 정은성 역시 채다현을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 특히 정은성은 채다현을 지속적으로 폭행하고 돈까지 뺏은 정황이 있었으므로 주요 용의자였다.

다음으로 김준후의 아내 권영주가 있다. 그녀는 최근 은파로 와 김준후 집에 머물기 시작했는데, 채다현이 사망하기 전날 채다현의 집까지 찾아가 따귀를 때렸다는 것이 밝혀진다. 불륜에 대한 응징으로 살인이 선택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므로 김준후는 아내를 의심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는 시점에 김준후에게 협박 편지가 날아든다. 채다현을 살해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삼은호수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김준후는 황권중 밖에 협박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다 보고 다소간의 금전적 요구에는 응할 생각으로 삼은호수에 간다.

하지만 삼은호수에 간 김준후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기 직전의 황권중을 발견하고, 또다시 살인 누명을 쓸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를 피한다.

며칠 뒤 경찰은 조미란을 황권중 살해범으로 체포한다. 유독가스가 포르말린으로 밝혀졌기에 과학실에 출입할 수 있으며 알리바이가 없는 그녀가 자연스레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조미란은 채다현 살해 역시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하는데, 경찰은 그녀의 진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녀는 현장에서 발견된 칼이 자살한 남편의 것이었다는 점 때문에 아들이 범인이라 착각했다. 그러던 차에 황권중이 김준후에게 보낸 협박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거기에 '증거 운운'하는 내용이 있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황권중을 살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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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오래된 논쟁 중 하나가 서술트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이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술했던 화자가 사실은 범인이었다는 내용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두고 반 다인은 '후안무치한 트릭이고 1페니 동전을 5달러 금화라고 속여 건내는 사기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와 반대였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 소설을 꽤 극찬했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미스터리 소설이 작가와 독자의 지적 게임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야 하고 작가만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사실 범인은...' 으로 시작하는 헛소리를 나중에 지껄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한 작가가 프레더릭 더네이와 멘프리드 리(엘러리 퀸이라는 공동필명으로 작품 발표)이다. 이들은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당당하게 공개한 뒤 '독자에게 도전'을 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했다.

반면 매우 자주 이런 원칙에 반해 '사실은~'을 남발했던 작가가 아가사 크리스티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홍학의 자리>는 갖가지 기교가 난무하는 소설이며, 특히 서술트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다. 서술트릭은 전술했듯 100년 전 아가사 크리스티가 써먹었을 당시에도 찬반을 일으킨 양날의 검이다. 그런 서술트릭이 현재에도 통용되려면 역시나 '정정당당함'이 필요하다.

작가가 여러가지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선입견이나 주관적 판단으로 인해 오인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독자는 자신의 무릎을 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런 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다. 반면에 작가가 서술트릭을 써먹기 위해 여러가지 장난질을 친 것을 깨닫게 되면 작가의 신의성실을 문제삼게 되고 급기야 사기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홍학의 자리>의 주요 트릭은 채다현을 제3자가 목메달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현장, 목에 자상을 입고 목메달려 있기 까지 했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음에도 숨이 돌아오지 않아서 사망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 사체의 호수 유기 부분을 의도적으로 프롤로그에 배치에 시신이 곧바로 유기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든 기교, 그리고 채다현의 성별이다.

이 중 호수 유기 트릭 외에는 전부 사기에 가깝다. 트릭의 성공 여부는 '사실은~'을 붙여보면 된다. 채다현은 '사실은' 점프해서 올가미에 목을 집어 넣었고, '사실은' 목에 자상을 입고 목메달렸으며 심폐소생술로 숨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살아 있었고, '사실은' 김준후가 양성애자였었고 등.

특히나 채다현이 남자였다는 사실은 일면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이 가신 뒤 상황을 곱씹어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뿌옇게 처리한 권영주가 떠오른다.

김준후와 채다현이 빚어낼 멋들어진 사기극을 위해 남편이 양성애자이고, 동성애인으로 제자를 선택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드러나는 모습에 집착해 이혼을 거부하고 나아가 남편의 변호사비를 대는 권영주.

그녀의 모습은 진 리스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언급한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을 떠오르게 한다. 버사 메이슨은 제인과 로체스터가 결혼하는 데 걸림돌이며 손필드 저택에 방화를 저지르는 미친 크리올 여성이다. 버사 메이슨을 철저히 광녀로 치부하고 감금시키고 침묵시킴으로서 제인과 로체스터를 드러내었듯, 정해연은 권영주를 기괴하게 만들어 김준후와 채다현의 트릭을 완성시킨다.

남녀의 역할에 관한 선입견이, 이성애만이 독점적 육체행위라고 이해하는 고정관념이 채다현의 성별을 오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쩌면 권영주의 기괴함이 독자를 착각하게 만든 것 아닐까 생각한다. 정해연의 서술트릭을 좋은 쪽으로 보아줄 수 없는 이유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57883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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