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이 이야기
제니 에르펜베크 지음, 안문영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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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밤중 상가 거리에서 한 소녀가 빈 휴지통을 든 채 발견된다. 경찰은 소녀의 집이 어디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소녀는 아동 복지원으로 인계 된다.

소녀는 키가 크고 몸집이 뚱뚱했다. 성별로 따지면 여자아이였지만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신체적 특성은 거의 없었다.

8학년 학급에 배정된 소녀는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니 배울 의지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의 짖궂은 장난에는 일체 저항하지 않았고, 누군가 물어보면 예 또는 아니오 정도만 대답했는데 그마저도 소심하게 무언가 줍는 척 하면서 조그맣게 대답할 뿐이었다.

소녀는 누군가의 윗자리에 올라설 마음이 없었고, 그래서 최대치의 무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처럼만 해낸다면 복지원에서 영원히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소녀를 괴롭히던 아이들도 차츰 소녀의 특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거의 아무런 말도 옮기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그녀에게 신세 한탄이나 고민 상담을 하기까지 했다.

소녀도 조금씩 변화한다. 지금까지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공놀이의 규칙을 조금 알게 되거나,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활기를 띠고 무지의 바다에서 자유로웠던 그녀가 조금 알게 되자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공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녀가 공을 피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행동과 말의 법칙을 알게 되자 꺼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얼마 후 소녀는 병을 앓게 되었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그녀는 급격히 늙기 시작했다. 그리고 2주일 정도 지나가 서른 즈음의 여성이 되었다. 살이 빠졌다. 소녀는 눈을 감고서 자주 울었다.

의사가 나이 많은 부인을 소녀가 있는 독방으로 데리고 왔다. 의사는 부인을 소녀의 어머니라고 했다. 소녀였던 여자는 '아, 당신이 내 어머니라고요' 라고 말하고 아주 천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당신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네요' 라고 말한다.

소설을 읽노라면 영화 <굿바이 레닌>이 떠오른다. 서독으로 망명해버린 아버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가 어느 날 아들의 반정부 시위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는다. 문제는 그 사이 독일이 통일돼 버린 것. 게다가 체제는 자본주의. 아들은 깨어난 어머니가 충격 받을 것이 겁이 나 친구와 함께 각종 사기를 치며 조국이 통일된 사실을 숨긴다. 코미디 영화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들었다.

상점가에서 발견된 소녀는 <굿바이 레닌>의 어머니 같은 사람, 통일된 독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독 사람일지도 모른다. 상품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상점가'에 소녀가 들고 있었던 것은 돈이 아니라 '휴지통', 그것도 '빈 휴지통' 이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경찰에게- 동독은 이미 붕괴되었으므로- 대답할 말이 없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 하지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버거워 차라리 말석에서 조용히 변화를 거부하는 소녀. 하지만 소녀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알게 되자 곧바로 두려움이 밀려오고 급기야 조로(早老)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뒤늦게 조국(어머니)이 뒤늦게 나타나지만 '당신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네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어머니가 동독이라면 이미 사라졌고, 통일된 독일이라면 함께 지낸 적이 없는 어머니이므로.

작가 제니 에르펜베크는 1967년 동베를린 출신으로 <늙은 아이 이야기>는 그녀의 첫 작품으로 1999년 발표 되었다.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작가인 John Erpenbeck이고 어머니는 아랍어 번역가 Doris Kilias이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Fritz Erpenbeck과 외할머니 Hedda Zinner 역시 작가라고 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34189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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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153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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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의 시를 읽노라면 삼차원의 풍경이 이차원의 평면으로 포착되어 박제되는 느낌을 받는다. 시어는 건조하고, 사변적이다.

<길> 전문을 적어본다.

누란으로 가는 길은 둘이다

陽關을 통해 가는 길과

玉門關을 통해 가는 길

모두 모래들이 모여들어 밤까지 반짝이는 길이다

저기 푸른 하늘 안쪽 어딘가 많이 곪았

는지 흰 고름이 동그랗게 하늘 한구석에

몽오리가 진다 나무 위의 새 한 마리 집에

가지 못하고 밤새도록 부리로 콕 콕 쪼고

있다 밤새 쪼다가 미쳤는지 저기 푸른 하

늘 많이 곪은 안쪽으로 아예 들어간다

밤새 나뭇가지 끝에 앉았던 새 한 마리

새벽 하늘로 날아갔다

누란이 시인이 다다라야 할 곳이라면,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양관과 옥문관이 통한다. 양관과 옥문관이라. 이름이 절묘하다. 어쨌든 거기로 가는 길은 모래들이 모여들어 반짝이는 길이란다.

시집에서 '모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또 있다. <나와 모래>라는 시다. 거기서 바다는 하나이고 모래는 헤아릴 길 없어 사랑, 절망, 죽음, 공포, 허위, 모순, 자유, 반동, 혁명, 폭력, 사기, 공갈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무엇이 될 수 있다. 그 모래는 번번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밤새도록 부리로 콕 콕 쪼던 새가 해를 가린 구름 쪽으로 날아갔다. 콕 콕 쪼다가(본질을 구하다), 아예 들어가버린다. 쪼는 행위에서 몸을 던져 하나가 된다.

시집의 뒷면에 <조주록>의 인용문이 있다.

(1)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 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만물은 변화 발전하는 운동 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조주의 집 3>

뜰 앞의 잣나무는 멀리 있는 산보다

집에서는 훨씬 높다

그 높이의 층층 사이의 허공을

빈틈없이 하늘이 찾아들어 잎이며

가지의 푸른 배경이 되어 있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너무 깊고 넓어

거미가 줄을 치고 허공을

얽어맨 곳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머리 가까운 높이에서 가지

두 개가 부러져 누렇게

말라가면서 눈부시다

이 집에 사는 사내는 몇 년 전에

지나다니기가 불편하다고 잣나무

밑부분의 가지를 서너 개 잘라버렸다

그 자리에는 가지 대신 투명한

공기가 가득 뻗어 있다

............그리고

지상에 태양만 나타나면

뜰 앞의 잣나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가 책상 위의 趙州錄을

그늘로 가둔다

가지 대신 투명한 공기가 가득 뻗어 있다... 오규원의 시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없다. 없음은 있음을 대신하는 또 다른 무엇이다. 또한 오규원은 관념적이다. 그의 세계는 커튼 하나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나 그것은 극단적인 관념론이 아니다. 왜냐면 오규원에게 있다와 없다의 구분은 존재와 비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안의 光度

를 가져가버린다 액자 속에 담아놓은 세계의 그림도 명

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

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

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

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

을 내 앞으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

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마리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

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물과 길 2>를 읽노라면 순간을 포착해 있음과 없음을 지면에 포착해 놓았다.

돌밭에서도 나무들은 구불거리며 하늘로

가는 길을 가지 위에 얹어두었다

어떤 가지도 그러나 물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멈춘다

나무들이 멈춘 그곳에서 집을 짓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때마다

하늘은 새의 배경이 되었다 어떤 새는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날아올랐지만

거기서부터는 새가 없는

하늘이 시작되었다

오규원의 시들은 사변적이고 난해하다. 실험적인 시어들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들... 해설에서 황현산은 미셸 푸코가 마샬의 사진집에 붙였던 말을 인용한다.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따질 나위도 없이, 이 말은 사진을 거론할 재주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이야기가 그것을 변질시키거나, 사진이 말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별 필요가 없는 존재이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33620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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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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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향신사에서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자리 잡은 나오이 레이토는 경도 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이모 치후네와 함께 그럭저럭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강도 상해 사건이 발생한다. 유력한 용의자는 구메다 고사쿠라는 인물로, 월향신사에 비치된 여고생의 시집 <헤이 녹나무>를 돈도 내지 않고 슬쩍 하는 등 한심한 짓을 저지르며 직업도 없이 어머니에게 의지해 생활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 모리베 도시히코의 집에 부당한 거래로 빼앗긴 재규어 마스크를 가지러 갔을 뿐 상해나 절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라도 하듯 우편함에 레터팩이 도착하는 데, 거기엔 102만엔의 현찰과 '구메다 고사쿠는 관계 없다'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편, 뇌종양으로 잠이 들면 기억을 잃는 모토야가 레이토와 친해진다. 레이토는 모토야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싶었기에 <헤이 녹나무>의 작가인 하야카와 유키나를 소개시켜 준다. 둘은 <소년과 녹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함께 작업하며 삶의 의미와 행복에 대해 고민하고, 모토야의 부모 역시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 녹나무를 통해 수념한 추억의 매실찹쌀떡 재현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과 녹나무>가 완성되자 레이토는 치후네에게 낭독회에서 그림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한다.

부천우편집중국-부천IC-샤브올데이-도쿄하나-꿈빛도서관-원미경찰서-심곡천을 거쳐 다시 부천우편집중국으로 돌아오면 얼추 8km 정도가 된다. 올해 여름 초입에 이 코스를 걸어다니면서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녹나무의 파수꾼> 후속편으로 전편의 인기에 기대 만들어진 속편인데 적당량 판매되면 그만이라는 느낌으로 스토리는 빈약하고 짜임새도 느슨하다.

상해절도범은 여고생 하야카와 유키나다. 모리베 도시히코의 음험한 제안에 집까지 따라갔다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모토야는 행복한 기억들을 녹나무에 예념했다가 죽기 직전 그 기억을 수념하면서 행복을 맛본다. 치후네는 끝내 인지장애가 치매로 발전해 요양원으로 간다.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예전과 같은 박력이나 밀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새로이 국내 출간되는 작품들도 사실 대표작에 비해 인기가 떨어져 번역되지 않았던 초기 작품들이 대다수다. 전성기를 지난 장르작가의 작품은 어딘지 김빠진 콜라맛이 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27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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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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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3개월을 부천에서 지냈다. 처음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하지만 머무는 기간이 점점 길어졌고, 돌아갈 시기는 유예 되었다. 인사 발령에서 몇 차례 시련을 겪으니 나도 모르게 위축 되었다. 그리고 어디가 생활의 근거지인지 헤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발령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곳에서 뿌리 내리고 이제 막 잎으로 영양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는 식물을 푹 파내서 옮겨 심는 것처럼 진행 되었다.

돌아와서는 어쩐지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고 싶어졌다. 독서대에 펼쳐 놓고 입으로 조그맣게 소리내면서 읽은 뒤 마음에 들면 몇 번 더 읽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넘어갔다.

<삼학년> 은 기형도의 시가 언뜻 떠오른다. 상장을 접어서 물에다 띄우고 나무를 보면서 팝콘을 떠올리는 시였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첫눈> 이라는 시에서도 기형도가 연상된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물의 베개>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과 같은 서정적인 흐름이 좋다.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아이를 앞세운 아버지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장마>도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나와있지 않다.

얼굴 새까맣게 늙은 사람들이 우리의 낯을 살폈다

아이의 어머니는 풀린 하체를 끌었고

유독 의연해 보이는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라 했다

불어난 골짝 물을 따라갔던 아이는

뭔가를 움켜쥐려던 손동작으로 굳어 있었다

학교 수업 종종 빠지던 아이

불기둥 지난 몸에서 쇠붙이가 나왔다

야단을 쳐도 잘똑잘똑 농사일 거든다고

논두렁 밭두렁을 따랐다던 아이,

부러진 다리를 이었던 쇳조각이었다

미루나무가 있던 관촌 어디 강둑으로

아이가 안겨 가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돌아왔다

모아진 고사리 푼돈 전해줄 요량으로

이튿날 저녁참에 마을 이웃에게 전화를 넣었다

일 치러주느라 고생한 사람들 불러

건하게 술을 낸 아이의 아버지,

농약을 들고 논으로 안 가고 아이를 따라간 뒤였다

진창으로 쳐대는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연을 읽고 아이의 아버지가 유독 의연했던 것은 이미 아이를 따라 나설 결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섬뜩함, 그리고 퍼붓는 비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2부에서는 간간히 사랑 이야기나 나온다. <되새>라는 시를 몇 차례 읽었다.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되새에 관한 시인데 마지막 연이 역시 섬뜩하다.

잘 닦여진 운명처럼

투명유리창이 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라는 시도 좋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어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시인 박성우가 그려내는 시골은 다소 미화되어 있다. 여전히 공동체의 정이 남아 생의 에너지가 흘러 넘치고 있다. 농촌의 질곡이라든가, 비극도 물론 다소간 언급되나 매우 막연하게 그려진다. 사랑에 관한 시들은 이미 아픔의 시기가 지났는지 '나'도 '그녀'도 인연이 아니었다는 인식 하에 그려진다. 아마도 <코뚜레> 라는 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울처녀한테 장가 들어 치유되었을지도.

어쨌든 시는 잘 모르겠다. 그저 몇 번이고 좋은 시는 중얼거리고, 이해 안 되거나 감흥이 없는 시는 그냥 넘길 뿐이다. 우리 인생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취사선택 하기 어렵지만 시집에 실린 시만큼은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것이 다행일 뿐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2374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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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주유소
유애숙 지음 / 문이당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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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애숙은 1951년 경북 영천 출신으로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명문 아파트>로 등단하였으며, <장미 주유소>는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등단작 <명문 아파트>는 동문시장에서 짝퉁을 만들어 파는 용자와 그녀의 가게에 단골로 드나드는 신여사 이야기다. 용자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신분 상승에 걸맞는 주거지로 명문 아파트를 낙점하고 낙원 부동산을 찾아간다. 신여사 같은 교양있는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었으므로 용자는 기대가 컸다. 부동산 정 여사는 새댁이 투신 자살해 잘 팔리지 않는 43평형 아파트를 용자에게 속이고 중개한다. 얼마 뒤 사실을 알아챈 용자가 난리를 치자 정 여사는 전 주인에게서 받은 사례금을 이사비용으로 내놓고 용자를 달랜다. 용자가 다시 이사하는 날 에덴 약국에 들렀다 그곳에서 단골이자 H농대 책임자 남편을 둔 신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여사는 바삐 가게를 빠져나가버린다. 그리고 약사가 하는 말을 듣고 용자는 놀라 자빠지고 만다. 신여사는 고관의 사모님이 아니라 분식집 주인이고 남편도 농대는 커녕 화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명문' 아파트는 사람이 자살해 나가는 오명이 있고, '낙원' 부동산은 사연 있는 집을 사기로 중개하며, '에덴' 약국은 온갖 말들이 모여드는 장소다. 용자는 돈을 만들기 위해 '짝퉁'을 만들어 팔고, H농대는 화원이고 정신 작업도 말짱 헛소리다. 욕망은 들끓지만 그 외양은 온통 헛것에 불과한 현대 사회를 조롱하는 작품이다.

<노루잠에 개꿈>도 유쾌해서 마음에 든다. 영국이 차린 동물병원을 중심으로 코믹한 콩트들이 그려지는 단편인데,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심부름센터의 덜 떨어진 행태와, 유고 정부가 발행한 고액권 5천 5백 5십억 디나르를 둘러싼 호언들이 한바탕 해프닝을 일으킨다. 고액권은 사실 한 세트에 2만 2천원에 불과한 기념품이었다.

이 밖에 병원의 향정신성의약품을 훔쳐내 고통을 덜어보려는 외과 레지던트 이훈재와 그런 훈재에게 호감을 느끼는 병리실 오세정의 풋사랑을 그린 <기대는 숨결>,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이별 클리닉이라는 사이트를 드나들며 지난 연애를 반추하는 <이별 클리닉>, 남편을 교수 자리까지 올려 놓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뒤늦게 알아차린 중년 여성과 섹스 중독증으로 고통받는 유섭의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주는 <장미 주유소>, 젊은 혈기에 치고 받고 폭언을 내뱉던 부부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과 화해하는 내용의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2년 3개월간 근무하던 정든 곳을 떠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원래 근무했던 곳으로 복귀일 수도 있는데, 부천을 떠나는 마음이 헛헛하기만 하다. 사람이, 장소가, 그리고 이곳의 정서가 무척 그리울 것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1152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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