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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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3개월을 부천에서 지냈다. 처음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하지만 머무는 기간이 점점 길어졌고, 돌아갈 시기는 유예 되었다. 인사 발령에서 몇 차례 시련을 겪으니 나도 모르게 위축 되었다. 그리고 어디가 생활의 근거지인지 헤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발령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곳에서 뿌리 내리고 이제 막 잎으로 영양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는 식물을 푹 파내서 옮겨 심는 것처럼 진행 되었다.

돌아와서는 어쩐지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고 싶어졌다. 독서대에 펼쳐 놓고 입으로 조그맣게 소리내면서 읽은 뒤 마음에 들면 몇 번 더 읽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넘어갔다.

<삼학년> 은 기형도의 시가 언뜻 떠오른다. 상장을 접어서 물에다 띄우고 나무를 보면서 팝콘을 떠올리는 시였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첫눈> 이라는 시에서도 기형도가 연상된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물의 베개>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과 같은 서정적인 흐름이 좋다.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아이를 앞세운 아버지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장마>도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나와있지 않다.

얼굴 새까맣게 늙은 사람들이 우리의 낯을 살폈다

아이의 어머니는 풀린 하체를 끌었고

유독 의연해 보이는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라 했다

불어난 골짝 물을 따라갔던 아이는

뭔가를 움켜쥐려던 손동작으로 굳어 있었다

학교 수업 종종 빠지던 아이

불기둥 지난 몸에서 쇠붙이가 나왔다

야단을 쳐도 잘똑잘똑 농사일 거든다고

논두렁 밭두렁을 따랐다던 아이,

부러진 다리를 이었던 쇳조각이었다

미루나무가 있던 관촌 어디 강둑으로

아이가 안겨 가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돌아왔다

모아진 고사리 푼돈 전해줄 요량으로

이튿날 저녁참에 마을 이웃에게 전화를 넣었다

일 치러주느라 고생한 사람들 불러

건하게 술을 낸 아이의 아버지,

농약을 들고 논으로 안 가고 아이를 따라간 뒤였다

진창으로 쳐대는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연을 읽고 아이의 아버지가 유독 의연했던 것은 이미 아이를 따라 나설 결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섬뜩함, 그리고 퍼붓는 비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2부에서는 간간히 사랑 이야기나 나온다. <되새>라는 시를 몇 차례 읽었다.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되새에 관한 시인데 마지막 연이 역시 섬뜩하다.

잘 닦여진 운명처럼

투명유리창이 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라는 시도 좋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어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시인 박성우가 그려내는 시골은 다소 미화되어 있다. 여전히 공동체의 정이 남아 생의 에너지가 흘러 넘치고 있다. 농촌의 질곡이라든가, 비극도 물론 다소간 언급되나 매우 막연하게 그려진다. 사랑에 관한 시들은 이미 아픔의 시기가 지났는지 '나'도 '그녀'도 인연이 아니었다는 인식 하에 그려진다. 아마도 <코뚜레> 라는 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울처녀한테 장가 들어 치유되었을지도.

어쨌든 시는 잘 모르겠다. 그저 몇 번이고 좋은 시는 중얼거리고, 이해 안 되거나 감흥이 없는 시는 그냥 넘길 뿐이다. 우리 인생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취사선택 하기 어렵지만 시집에 실린 시만큼은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것이 다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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