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조금 추운 극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3
김승일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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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항상 조금 추운 극장>은 연인과 헤어진 후 극장에 간 이야기다. 극장 스크린에는 좀비로 분장한, 또는 분장했다고 믿고 싶은 옛 연인이 스쳐 지나가고, 그녀가 고양이였더라면 어땠을까 가정하고,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지 여전히 궁금하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심사들이 도시적인 언어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죄다 산문시인 이 시집의 작품들은 재치와 유머가 넘친다. 나름대로 세련된 맛도 있다. 하지만 그의 시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을 성 싶지는 않다. 삶이든, 사랑이든, 인생이든, 그 무엇이든 체로 여러번 거르고 거른 뒤 다듬고 손을 보아 시어로 녹여낸 흔적이랄까, 고뇌랄까, 그런 것들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시 작법에 관한 그의 재기발랄한 시들도 거북하다. 마치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 비법을 까발리면서, '봐라, 내가 이렇게까지 진실하다' 라는 아이러니한 표정을 짓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거야 말로 기술이고, 시는 그런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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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매혹 - 김선태 시평집
김선태 지음 / 문학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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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6개월 간의 부천 생활을 접고 세종으로 다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돌사고가 났다. 조금씩 나아지던 목 디스크가 사고 충격으로 악화되었고, 그런 연유로 긴 호흡의 독서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 세종국립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이 책을 발견했다. 목포대 국어국문 문예창작학부 교수이자 93년에 등단한 시인 김선태가 20년에 걸쳐 신문과 문예지에 썼던 시읽기에 관한 글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낯 익은 시인의 이름이 있다. 혁명가로 부조리한 이 세상을 불꽃처럼 살다 젊은 나이에 훌쩍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이다. 젊은 시절을 차디찬 뇌옥에 갇혀 지내면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별을 가슴에 품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 고독하고 지친 가운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써내려갔을지도 모를 시.

<별>

밤들어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그리워 못 잊어 홀로 잠 못 이뤄

불 밝혀 지새우는 것이 있따

사람들은 그것을 별이라 그런다

밤 깊어

가장 괴로울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별이 되어

어머니 어머니 부른다.

대학 시절의 어떤 날이 기억난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하늘> 이라는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를 술자리가 파할 무렵 누군가 가만가만 부르기 시작했다.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구절을 따라 부를 때 누가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이 전염되어 모두들 훌쩍거렸다.

박노해가 7년의 형을 살고 나와서 '노동'과 '진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하늘>의 박노해도, 이 시의 박노해도 삶과 운동이라는 여정에서 부정되고 변화하는 한 사람이다. 다만 <하늘>의 박노해는 우리를 울게 만들었지만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의 박노해는 그저 홀로 떨 뿐이다.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들

진보라는 이름 속에 도사린 낡아빠진 껍질들이

이 새로운 공동체 앞에서 투명하게 떨린다

물방울 튕기듯 웃는 민이 친구들과 손잡고 걸으며

불의에 저항하고 부정하다가

그만 낡은 것들을 닮아버린 오, 우리를

너희는 너그러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상쾌한 깨어짐으로 내가 막 떨린다

조승기도 별을 노래한다. 김남주의 별과 조승기의 별 모두 상처와 고독을 치유하는 묘한 힘이 있다.

<별>

별이 반짝이는 것은

별이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깜깜한 밤 한데로 나앉아

울고 있는 나를 우주 어디쯤에서

누가 바라보며 별이라 부른다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상처를

누가 바라보며 별이라 부른다

조성국 시인은 광주 염주마을 출신 시인이다. 염주 마을이면 쌍촌동 옆이니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와 가깝다. 이 시는 읽을 수록 슬몃 웃음이 난다. 조성국 시인의 시집은 꼭 사야겠다.

<웃음 부의>

잘 익은 복숭앗빛같이 뺨 붉던

새침데기 고 계집애

초등학교 때부터 마음속에 들어와선

한 번도 빠져나간 적이 없는

고 계집애, 아비가 돌아가셨다

위친계 모임에서나 잠깐 엿들은 풋정의 얼굴이 떠오르자

조문 가는 길이 설레었다

몇십 년만큼의 애틋함이 콱 밀려와서는

영좌의 고인에게 절 올리면서도

힐끗힐끗 곁눈질로 훔쳐보던

일테면 내 꿍꿍이속을 알아차렸다는 듯

외동딸이던 그녀 대신 상주가 되어

나와 맞절한 남편이 피식 웃었다

신행 왔던 그의 발바닥을 매달아서

유달리도 직싸게 두들겨 팼던 것이

잠시 기억나서 덩달아 나도 피식 웃고

또 그걸 본 여자, 호야등 켠 곡을 잠시 멈추더니

은근슬쩍 뺨이 한층 붉어져 부리나케 모습을 감추자

상청 차일 속 어디선가 화투패 돌리다 말고

누런 뻐드렁니 들어낸 듯

키들거리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참지 못하고 들려왔다

이시영의 짧은 시는 여러가지로 시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삶>

모진 겨울 넘기고 나왔구나

서울역 앞 몸에 좋은 약초 파는

할아버지

그 사이 공순하던 허리가 땅에 더

가까워지셨구나

나해철 시인은 나주 영산포 출신이다. 시 한편이 영산포의 역사를 담뿍 담아냈다.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 시인의 등단작이자 대표작.

<영산포 1>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향시리 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는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 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문인수 시인은 마흔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이다. 그의 시 <간통>은 이런 쪽의 특출한 감각이 발달해야만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수작이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따.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이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 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고성만의 <투계>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싸이나를 닭에게 먹이고 이를 사진 찍어 사진작품전에 출품했던 살인마의 이미지가 겹친다.

<투계>

맨드라미가

머리를 쭉 뻗었다가

푸드득 도약하여

칸나의 대가리를 찍는다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우수수 날리는 깃털

피가 튄다

야산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신발 흙 질컥거리며

환호성 지르는 사람들

마스카라 지워진 노을이

저녁 꽃을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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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 한국추리문학선 3
윤자영 지음 / 책과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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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당승표는 인터넷 카페 '추리문학연구소' 운영자이자 한국추리문학연구회 부회장인데, 어느 날 자극적인 제목의 메일을 한 통 받는다. 내용은 '추리소설은 문학이 아닌 잡기에 불과하다 라는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실전형 추리 퀴즈 게임을 개최한다, 총상금 5천만원의 이 게임은 3단계 중 이미 1, 2단계가 마무리된 시점인데 당승표를 마지막 단계 참가자로 초대하고자 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당승표는 꽤나 유리한 조건에 흥미가 당겼으므로 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당승표는 S대학 청룡강당이라는 장소에서 29세의 프리랜서 기자 심혜인, 30년 경력의 퇴직 경찰 나승만, 뛰어난 지능의 대학생 황윤종, 43세의 음울한 택시기사 김우태, 그리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백종명과 함께 3단계를 진행한다.

주최측 공승천 박사와 진행자 안현이 살인 현장을 제현하거나 범죄를 은폐한 트릭을 제시하면 참가자가 해법을 내놓는 방식으로 게임은 진행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공승천 박사가 테트로도톡신이 담긴 커피를 마시고 사망하고 다른 참가자도 메탄올로 바꿔치기 된 술을 마셔 사망하거나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범인은 과거 자신이 쓴 추리소설이 혹평을 받자 이에 앙심을 품고 자신이 소설에서 트릭으로 사용했던 크렉산을 미리 당승표에게 주입한 뒤 송곳으로 찔러 심사위원이었던 그마저 죽이려 한다다. 하지만 당승표 살인은 미수에 그치고 이 사건은 언론에 '정선 폐교 살인사건'으로 보도되어 세간을 큰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이상이 1부 내용인데 소설에서 범죄 트릭으로 사용된 방법은 습관성 자해 습관이 있는 여고생에게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크렉산을 몰래 주입한다거나, 미맹과 PTC 용액을 이용한 살인 방법, 특수 물질을 바른 뒤 이를 볼 수 있는 안경을 착용하여 독이 든 커피잔을 피해가는 방법 등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시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방법이었는데, 퀴즈 참가자가 제시한 해법은 개 사육장에서 살점을 없앤 뒤 대북전단 살포 풍선에 유골을 담아 북으로 보내버리는 방법이었다.

2부는 '백화점 재벌 2세 갑질 사건'이다. 재벌 2세 조이석이 백화점 VVIP 주차장에서 주차관리요원 이채석에게 폭행을 가하고, 이 동영상이 SNS에 퍼지자 브로커가 이채석에게 붙어 합의금을 뜯어낼 수 있다고 속살거린다. 이채석은 이 기회에 팔자를 고쳐보자 생각하여 브로커 말에 순순히 응하고, 언론 역시 갑질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어 합의는 이채석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마지막 합의 직전 1부의 '정선 폐교 살인사건'이 언론에 터지면서 사건은 조이석 쪽에 유리하게 흘러간다. 마지막 반전을 노린 이채석이 조이석의 마약 흡입 장면을 들이대며 협박하자 분을 못 참은 조이석이 이채석을 살해하고 시체는 '정선 폐교 살인사건'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대북전단에 실려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거물급 정치인 우태경 의원이 재벌 조광근 회장에게 소개해준 구요동 단장과 그의 아들 구민기라는 묘한 브로커가 개입되어 있었다.

마지막 3부는 '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 이다. 갖가지 이유로 빚을 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남녀 6명을 강화도 교동의 밀실에 모아 놓고 금괴 1kg씩을 나눠준 뒤 생존게임을 강요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이 사건으로 더 큰 사건을 덮으려는 구요동과 구민기,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당승표의 이야기이다.

올해 여름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부천 시내를 하릴 없이 걸어다녔는데 이 책은 '부천우편집중국 - 오정구청 - 원종역 - 수주도서관' 코스를 걸으며 들은 책이다. 구성이 하도 복잡해서 오디오북으로 듣다보면 헤깔렸는데 책으로 읽어보니 조금 정리가 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들이 액자형태로 숨어 있고, 각기 다른 독립적인 사건들이 나중에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가 다소 매끄럽지 않아 난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칠고 엽기적인 이야기들이 과학적인 요소들과 결합하여 수수께끼 풀이를 보완하고 사회파적 요소도 일부 녹아있어 나름 흥미진진하게 듣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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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장의 참극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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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장(名琅莊)은 메이지(1867~1912)의 권신 후루다테 다넨도(=후루다테 구라노스케)가 후지산 남쪽에 지은 저택이다. 그는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이 저택을 짓고 암살을 막기 위해 집안 곳곳에 미로와 탈출구를 설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인가부터 명랑장을 미로장(迷路莊)이라고 불렀다.

후루다테 다넨도가 메이지 45년 천수를 누리고 영면한 뒤 2대 가즌도 백작이 명랑장의 주인이 된다. 그는 선대에 비해 평범한 인물이었고, 이런 저런 사업에 실패한 탓에 쇼와 2년 금융공황 시기 파산하고 만다. 선대가 물려준 재산 대부분을 상실하고 겨우 명랑장만 건진 그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즌도 백작의 첫째 부인은 다쓴도라는 외아들을 남겨두고 일찍이 세상을 떴다. 후처로 맞아들인 가나코는 55세의 가즌도 백작에 비해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28세였다. 화족의 딸로 빼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집안이 몰락해 후처로 들어온 그녀에게서 7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자 가즌도 백작은 차츰 그녀가 자신을 차갑게 대하고 경멸한다는 망상에 빠지고 만다.

한편, 별장에는 오가타 시즈마라는 일꾼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코의 소개로 들어온 청년이었다. 가즌도는 오가타 시즈마와 가나코가 불륜 관계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쇼와 5년 가을 10월 20일, 명랑장 안뜰 정자에서 엄청난 분노에 찬 외침과 비명이 들려왔다. 하인들이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가나코 부인과 가즌도 백작이 칼에 찔려 무시무시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다. 또 현장에는 어깻죽지에서 잘라낸 듯한 왼팔이 있었는데 왼팔에 붙어있는 작업복 한쪽 소매로 보아 오가타 시즈마의 한쪽 팔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자에서 오가타 시즈마와 가나코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가즌도 백작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뛰어들어 단칼에 가나코를 베어 죽이고 오가타 시즈마의 한쪽 팔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도를 떨어뜨리거나 빼앗겨 거꾸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오가타 시즈마의 핏자국은 명랑장 뒤쪽 절벽 기슭의 동굴까지 이어졌으나 끝내 그의 시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명랑장은 이후 3대인 후루다테 다쓴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하지만 다쓴도는 명랑장을 건사할 형편이 되지 못해 신흥 재벌 시노자키 신고에게 소유권을 넘기는데, 엽기적인 것은 미모의 아내 시즈코 마저 넘겨주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명랑장을 인수받은 신고는 저택을 활용해 호텔로 개조하고 운영하는데 어느 날 외팔이 남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명랑장을 떠돌자 신고는 사건을 긴다이치 고스케에게 의뢰하는데, 역시나 그나 명랑장에 도착한 직후 후루다테 다쓴도, 다쓴도 생모의 동생인 덴보 구니타케, 여종업원 다마코 등이 차례로 죽어 나간다.

명장장의 종업원이자 혼혈의 전쟁고아인 다혈질의 하야미 조지, 가나코의 친동생이자 시즈코의 과거 연인인 야나기마치 요시에 등 새로운 인물이 떠오르지만 정작 이렇다할 혐의점을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명랑장 지하의 미로는 점차 붕괴해 간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외팔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시나 괴기스러운 분위기 연출에는 일가견이 있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답게 명랑장이라는 저택을 둘러싼 기괴한 사건들로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상태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긴다이치 고스케가 등장하는 작품이 으레 그렇듯 죽을 사람이 모두 죽어 나가야 범인이 밝혀지는데, 수수께끼 풀이를 모두 끝나면 초반부의 피가 식을 듯한 긴장감에 비하면 너무나 형편없는 결말부에 실망하고 만다.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평가는 높게 주기 어렵지만 메이지 시대의 망령과 유령이 쇼와 시대에서 결착되고 마무리되는 전개는 나쁘지 않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미스터리 버전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보면 어떨지.

끝간데 모를 미로와 장치들이 시간이 흐르자 끝내 붕괴되어 쥐떼가 들끓고 그 쥐떼가 사람을 갉아 먹는 엽기적인 장면, 몰락한 화족들의 허세만 남은 모습과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벗어 던지는 모습들, 전쟁고아인 혼혈아 하야미 조지의 되바라진 성격 등을 통해 요코미조 세이시는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모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기괴한 이야기 속에 담아 피력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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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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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의회 의원 도도 야스유키와 전직 배우 도도 에리코 부부가 불 탄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도도 야스유키의 목에 끈 모양 흔적이 있었고, 도도 에리코 역시 욕실에 목 메달린 상태였으므로 처음에는 자살사건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감식 결과 도도 에리코의 목에서 발견된 삭조흔이 두 종류로 드러남에 따라, 누군가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어설프게 자살로 위장하려 했음이 밝혀진다. 경시청은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도의원 부부 살해 및 방화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얼마 뒤 익병의 범인이 도도 야스유키가 평소 이용하던 태블릿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협박 편지를 보내온다. 그는 도도 부부의 추악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거액의 돈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자 금액을 낮춰 재차 협상해 온다. 경찰은 도도 부부의 딸 내외와 협의한 뒤 3천만엔을 범인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하고, 인출책 체포를 시점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기로 한다.

한편, 주인공인 수사1과 고다이 쓰토무 순사부장은 관할 경찰서 야마오 요스케 경부보와 짝을 이뤄 범인을 추적한다. 고다이 쓰토무는 도도 에리코(본명 후카미즈 에리코, 예명 후타바 에리코)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야마오 요스케 경부보가 도도 에리코와 동창이었고, 도도 야스유키는 그들을 가르친 교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도도 에리코가 학창시절 사귀었던 나가마 가즈히코가 야마오 요스케와 친구였다는 사실, 나가마가 졸업한 뒤 석연찮은 이유로 자살했다는 사실 등을 알게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야마오의 태도였다. 그는 자신이 도도 에리코와 동창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될 내용도 일부 비밀에 붙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좌에서 돈이 인출된다. 경찰은 니시다 간타라는 인출책을 긴급 체포하여 취조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출을 의뢰한 사람이 야마오 요스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긴장한 수사본부는 즉시 야마오 요스케를 임의동행으로 연행하여 취조를 시작하는데 의외로 야마오 요스케는 큰 저항 없이 자신이 협박범이라고 순순히 시인한다. 하지만 경찰은 그의 진술 외 어떠한 물증도 없어 검사가 과연 기소를 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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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대로 정치가 집안이었던 도도 야스유키는 교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인을 꿈꾸는 야심 만만한 젊은이였다.

그는 제자 후카미즈 에리코와 육체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카미즈 에리코는 도도 야스유키를 동경했기에 그에게 추문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마음에 위장 애인을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나가마 가즈히코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의 애정 행각은 우연히 야마오 요스케에게 발각되고 만다. 후카미즈 에리코는 야마오 요스케에게

침묵해줄 것을 요구했고, 졸업 후 그 댓가로 자신의 육체를 하루 동안 제공한다.

한편, 야마오는 친구 나가마에게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가 연인 관계이며 나가마는 위장 애인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리코에 대한 미련을 끊고 대학입시에 열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나가마는 폭주하여 도도 야스유키를 등산 나이프로 상처입힌 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겁을 집어먹고 절망하여 자살하고 만다.

이 사건 이후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도 이별하고, 시간이 흐른 뒤 후카미즈 에리코는 자신이 야마오 요스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몰래 출산한 에리코는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긴 채 배우로 데뷔한다. 이때 맡긴 아이가 이마니시 미사키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에리코는 데뷔 후 다시 도도 야스유키와 만나 사귀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딸인 이마니시 미사키가 안타까워 보육원에 보러 다녔고, 성년이 된 뒤에는 백화점 VIP 담당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뒤 실적을 올려주었다. 또한 손녀 마나미의 교육에 관해 상담하는 등 사뭇 자상한 어머니 역할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눈치챈 도도 야스유키가 제자이자 경찰인 야마오 요스케에게 아내의 행적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야마오 요스케는 조사 과정에서 이마니시 미사키가 사실은 자신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도도 야스유키에게는 이마니시 마사키는 도도 야스유키와 에리코가 헤어지기 직전 가진 관계에서 생긴 아이이며, 에리코는 헤어진 뒤 도도 야스유키의 장래를 위해 몰래 출산했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이로써 도도 야스유키 역시 이마니시 미사키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하고 만다.

도도 에리코와 이마니시 미사키의 모녀 관계는 끝내 잘 풀리지 않는다. 손녀 마나미가 마약 판매에 손을 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도도 에리코는 평온한 시기에는 이마니시 미사키에게 엄마로써 자애로운 모습으로 대했지만, 막상 마나미 문제가 드러나자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봐 야멸찬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비난했다. 이에 격분한 이마니시 미사키가 자신의 친모인 도도 에리코를 목졸라 살해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도도 야스유키는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한) 이마니시 미사키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스스로 자살한 뒤 타살인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야마오는 자신이 범인인 것처럼 꾸민 뒤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흐지부지 되도록 만들기 위해 가공의 범인 역할을 자인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40년 기념작으로 <백조와 박쥐>에 이어 고다이 쓰토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고다이 쓰토무는 냉철하고 강인한 이미지의 가가 교이치로나 논리적인 사고로 퍼즐을 풀어나가는 유카와 마나부와 달리 평범한 이미지에 어쩐지 지쳐보이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명탐정은 아니지만 구두 밑창을 닳아뜨리며 범인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는 <점과 선>의 주인공 미하라 가이치 경사를 떠오르게 하는 면도 있다.

<가공범>에서 공감되지 않는 부분은 바로 도도 에리코와 야마오의 관계이다. 야마오의 입을 막기 위해 도도 에리코가 졸업한 뒤에 몸을 허락한다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 관계에서 아이가 생기고 몰래 낳아 보육원에 맡긴다는 설정 역시 도도 에리코의 야멸차고 계획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매우 억지스럽다.

또한 정치인으로 잔뼈가 굵은 데다가 공권력을 남용하는데도 능란한 도도 야스유키가 유독 자신의 딸로 짐작되는 이마니시 미사키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자 별다른 대책을 고민하지도 않고 주저 없이 자살해버리는 장면은 아무리 또다른 자녀의 정치권 진입을 목전에 둔 시점임을 감안해도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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