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의 매혹 - 김선태 시평집
김선태 지음 / 문학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년 6개월 간의 부천 생활을 접고 세종으로 다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돌사고가 났다. 조금씩 나아지던 목 디스크가 사고 충격으로 악화되었고, 그런 연유로 긴 호흡의 독서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 세종국립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이 책을 발견했다. 목포대 국어국문 문예창작학부 교수이자 93년에 등단한 시인 김선태가 20년에 걸쳐 신문과 문예지에 썼던 시읽기에 관한 글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낯 익은 시인의 이름이 있다. 혁명가로 부조리한 이 세상을 불꽃처럼 살다 젊은 나이에 훌쩍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이다. 젊은 시절을 차디찬 뇌옥에 갇혀 지내면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별을 가슴에 품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 고독하고 지친 가운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써내려갔을지도 모를 시.

<별>

밤들어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그리워 못 잊어 홀로 잠 못 이뤄

불 밝혀 지새우는 것이 있따

사람들은 그것을 별이라 그런다

밤 깊어

가장 괴로울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별이 되어

어머니 어머니 부른다.

대학 시절의 어떤 날이 기억난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하늘> 이라는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를 술자리가 파할 무렵 누군가 가만가만 부르기 시작했다.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구절을 따라 부를 때 누가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이 전염되어 모두들 훌쩍거렸다.

박노해가 7년의 형을 살고 나와서 '노동'과 '진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하늘>의 박노해도, 이 시의 박노해도 삶과 운동이라는 여정에서 부정되고 변화하는 한 사람이다. 다만 <하늘>의 박노해는 우리를 울게 만들었지만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의 박노해는 그저 홀로 떨 뿐이다.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들

진보라는 이름 속에 도사린 낡아빠진 껍질들이

이 새로운 공동체 앞에서 투명하게 떨린다

물방울 튕기듯 웃는 민이 친구들과 손잡고 걸으며

불의에 저항하고 부정하다가

그만 낡은 것들을 닮아버린 오, 우리를

너희는 너그러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상쾌한 깨어짐으로 내가 막 떨린다

조승기도 별을 노래한다. 김남주의 별과 조승기의 별 모두 상처와 고독을 치유하는 묘한 힘이 있다.

<별>

별이 반짝이는 것은

별이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깜깜한 밤 한데로 나앉아

울고 있는 나를 우주 어디쯤에서

누가 바라보며 별이라 부른다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상처를

누가 바라보며 별이라 부른다

조성국 시인은 광주 염주마을 출신 시인이다. 염주 마을이면 쌍촌동 옆이니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와 가깝다. 이 시는 읽을 수록 슬몃 웃음이 난다. 조성국 시인의 시집은 꼭 사야겠다.

<웃음 부의>

잘 익은 복숭앗빛같이 뺨 붉던

새침데기 고 계집애

초등학교 때부터 마음속에 들어와선

한 번도 빠져나간 적이 없는

고 계집애, 아비가 돌아가셨다

위친계 모임에서나 잠깐 엿들은 풋정의 얼굴이 떠오르자

조문 가는 길이 설레었다

몇십 년만큼의 애틋함이 콱 밀려와서는

영좌의 고인에게 절 올리면서도

힐끗힐끗 곁눈질로 훔쳐보던

일테면 내 꿍꿍이속을 알아차렸다는 듯

외동딸이던 그녀 대신 상주가 되어

나와 맞절한 남편이 피식 웃었다

신행 왔던 그의 발바닥을 매달아서

유달리도 직싸게 두들겨 팼던 것이

잠시 기억나서 덩달아 나도 피식 웃고

또 그걸 본 여자, 호야등 켠 곡을 잠시 멈추더니

은근슬쩍 뺨이 한층 붉어져 부리나케 모습을 감추자

상청 차일 속 어디선가 화투패 돌리다 말고

누런 뻐드렁니 들어낸 듯

키들거리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참지 못하고 들려왔다

이시영의 짧은 시는 여러가지로 시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삶>

모진 겨울 넘기고 나왔구나

서울역 앞 몸에 좋은 약초 파는

할아버지

그 사이 공순하던 허리가 땅에 더

가까워지셨구나

나해철 시인은 나주 영산포 출신이다. 시 한편이 영산포의 역사를 담뿍 담아냈다.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 시인의 등단작이자 대표작.

<영산포 1>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향시리 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는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 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문인수 시인은 마흔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이다. 그의 시 <간통>은 이런 쪽의 특출한 감각이 발달해야만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수작이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따.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이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 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고성만의 <투계>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싸이나를 닭에게 먹이고 이를 사진 찍어 사진작품전에 출품했던 살인마의 이미지가 겹친다.

<투계>

맨드라미가

머리를 쭉 뻗었다가

푸드득 도약하여

칸나의 대가리를 찍는다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우수수 날리는 깃털

피가 튄다

야산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신발 흙 질컥거리며

환호성 지르는 사람들

마스카라 지워진 노을이

저녁 꽃을 줍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1086095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