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의 사랑
뱅자맹 콩스탕 (지음) | 김석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내게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아돌프의 사랑> 본문 144페이지
사랑의 크기와 양은 자로 잰듯이 정확한 크기를 잴 수 없고 저울의 수평을 맞추듯 똑같은 무게로 주고 받을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어느 한 쪽은 더 많이 사랑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은 덜 사랑하는 쪽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대부분 지게 되는 약자가 되는 것도 보기 어렵지 않다.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일부가 되기도 하지만 어느 쪽도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돌프의 사랑>을 읽으며 작년과 재작년에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안나 카레니나>가 연상되었다. 가슴앓이하는 연정의 결말이 '모두가 행복하였다'로 끝나면 좋으련만 남편과 두 아이를 가진 유부녀(사실은 첩이지만) 엘레노르에겐 그런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 불리는 모성애마저 저버리고 열살 연하의 아돌프를 따라나선 그녀의 과감한 행보에 차마 그 사랑을 응원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아돌프의 사랑>은 우연히 수중에 들어온 아돌프의 수기가 타인에 의해 책으로 출간되는 액자 구성의 소설이다. 나이 많은 P백작의 첩이라는 신분이 엘레노르를 사교계의 아웃사이더로 만들던 차에 그녀의 미모와 조신함에 끌린 아돌프의 적극적인 구애가 엘레노르로 하여금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고 싶은 탈출의 욕망도 한몫하지 않았으려나.
다른 사람의 아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금기가 품고 있는 사랑을 더 안타깝게 더 절절하게 더 애틋하게 느껴지도록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이루었음에도 막상 둘이 함께하게 되자 계속되는 불화를 보인것처럼 아돌프와 엘레노르도 자신의 희생과 인내를 서로의 탓을 하며 다툼과 원망으로 불행한 날들을 보낸다. 속된 말로 "너 없이는 못 살아"가 "너 때문에 못 살아"가 된 것이다.
아돌프의 속마음과 다른 행동, 우유부단함이 이 연인의 불행에 힘을 더 보탠 것 같다. 엘레노르의 사랑을 얻은 뒤에 그녀의 사랑을 부담스런 멍에로 여기고 그녀를 떠날 마음을 먹었음에도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별을 미룸으로써 자신을 희생한다고 여기는 아돌프. 휴우...
십년의 정절과 백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 백작과 함께 하는 세월동안 보여주었던 용기와 헌신 등을 뒤로하고 선택한 사랑이 엘레노르에게 준 것은 배신이었다. 인생의 전부라 할 만한 것들을 버리고 선택한 사랑의 배신은 그녀에게 죽음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변심과 변심을 예감하는 불안, 불안의 실체를 확인하고 난 뒤의 절망. 차마 응원할 수 없는 사랑이긴 해도 그 사랑의 변심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돌프는 엘레노르를 진짜 사랑하긴 했을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과 소유욕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단 한순간이라도 진실되게 느껴보기는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유언처럼 남긴 약속마저도 호기심에 지키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어쩌면 엘레노르의 아픔은 그녀가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있지는 않았을까?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자신의 이기심이 타인을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지 현대인들의 비뚤어진 사랑도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