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사라졌다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가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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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친구가사라졌다 #가네시로가즈키 #좀비시리즈 #문예춘추사

아!
이 얼마 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이름인가!
가네시로 가즈키라니!
가네시로 가즈키라니!

<GO>, <플라이, 대디, 플라이>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꽤 이름을 날렸고
한국에서 리메이크 영화로 제작될 정도였으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동사가 과거형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낯설게 느껴질 이름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약 20여 년 전,
내가 대학생 때 유명했던 작가이기 때문이다.

오래 잊고 살았던 이름인데
어느 날 피드를 내리다가 한 게시물이 갑자기 내 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내 젊은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이름.
신나는 마음으로 서평단을 신청했고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부유하듯 살고 있는 대학생 미나가타다.
고등학교 때 꽤 유명세를 치른 화려한 전적의 그는 대학교에서는 존재가 흐릿하다.
하루는 학교 식당에서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유키라는 학생에게 부탁을 받는다.
사라진 친구를 찾아달라는.
미나가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애써 유키의 부탁을 무시하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마음이 켕겨 결국 의뢰를 수락한다.
실종자의 이름은 기타자와 유토.
유키는 유토와 고등학교 동급생이었고
대학 입학 후에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유토가 사라졌고 미나가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라진 친구의 행방을 쫓게 된다.
고등학생 때와 달리 유토가 많이 변했다는데
대체 이 녀석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닐 걸까?
흔적을 찾는 동안 다양한 인물들을 맞닥뜨리게 되고
각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다.

어릴 적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전작들처럼
지금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던 부분.

100p
"자네가 어떤 길을 택하건 난 응원할 거야.
다만 중요한 결정할 때는 생활에 대해서는 잊어.
내가 그때 아무 불평 없이 광고 브랜드 맥주를 마신 것은 생활을 위해서였어.
자신의 생활을 위해, 스태프의 생활을 위해.
생활은 이상이나 신념을 단숨에 지워 버리는 마법의 말이야.
내가 언제부터 연기자로서의 자유를 내던지고 생활에 목을 매게 되었는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지만, 지금은 완전히 생활의 노예야.
그러므로 나처럼 되지 마.
절대로."

크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좋았던 묘사 부분.

24p
람보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은행잎 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6p
결국 하늘이 은행잎 색에서 포도색으로 바뀌기까지 두 시간 동안, 나는 윌에게 47번 죽임을 당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도 자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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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용광로 스피리투스 청소년문학 6
성준 지음 / 스피리투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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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안녕용광로 #성준작가 #스피리투스 #공명

어느 날부터 거리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여기, 용광로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곳과는 조금 다른 곳이다.

54p
"어떤 사람이 작은 일탈만 저질러도 그것이 타고난 범죄적 성향을 보여주는 신호라면,
사회는 예비 범죄자인 그를 강력하게 응징하고 영원히 격리해야 합니다!"

56p
"용광로에 가게 될 어느 아이의 불행감이 100만큼 증가한다 해도,
그 아이 덕에 사회 전체 구성원이 느낄 만족감은 수천만 배가 넘을 것이오.
한 명을 일정 기간 호되게 혼쭐내서 사회가 안전해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소.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만족하는 정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택해야 하오.
사회 전체의 전체적 행복은 불가능하지만,
사회 전체의 최대 만족은 가능하다 이 말이오."

57p
현장의 목표는 명확했다.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용광로는 아이들을 녹여 '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일정 기간 사회와 떨어진 채 사고와 언어를 교정하다 보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구체적 대안은 없었다.
왜냐하면 비행 '우려' 청소년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느닷없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청소년들을 격리하는 용광로가 탄생했다.
이곳의 절대 규칙은 아래와 같다.

싸움과 욕, 불평이 금지된 곳.
매일 오전과 오후에 돌탑을 쌓아 올려야 하는 곳.
저녁 7시 이후로는 말이 금지되고 다른 구역 아이들과의 소통도 허가되지 않는 곳.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말만 하며 하루 할당된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 곳.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숨은 규칙들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니 다들 알아서 몸을 사려야만 한다.
언젠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10p
해가 뜨면 용광로는 열기로 가득해진다.
돌덩이도 열을 받아 뜨거워지고, 아이들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태양은 녀석들에게 벌을 주듯 열기를 쏘아 댄다.
6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7월과 8월의 태양은 더 뜨거울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혹독하게 추울 것이다.
추운 날에는 돌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물론 더운 날에는 그것보다 더 무겁다.

11p
"잠깐만 쉬자. 달콤합니다."
튤립이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손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그때 토탈이 다시 아이들 머리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아이들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씩 웃어 보였다.
토탈은 재빨리 그 표정을 촬영하고 사라졌다.
"오늘 우리 웃는 표정, 총 몇 분 지었지?
할당량 채우려면 더 노력해야 해.
아무튼 조금 쉬자."

36p
용광로에서는 하루 일정량 이상의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만약 아이들이 서로를 긍정적인 별명으로 부른다면 그 할당량을 채우기 쉬워진다.
(중략)
견디기 힘든 아이들은 서로를 꽃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40p
"왜 쌓는데?"
동바의 질문에 튤립의 말문이 턱 막혔다.
여태껏 그 부분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탑을 쌓아야 하는가.
이 의미 없는 노동을 왜 매일매일 지겹도록 힘겹게 해야 하는가.

41p
"그래서 넌 이리로 오게 된 거야. 치료받으러.
우리는 영혼을 치료받는 환자들이니까.
부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말을 낳고, 부정적인 말이 갈등과 범죄로 이어진다는 거지.
우린 죄수가 아니라 일종의 환자야.
돌탑을 왜 쌓느냐고? 아무도 시킨 적 없어.
그냥 하는 거야. 가만히 있자니 나쁜 생각이 떠올라서.
그럼 집에 못 가잖아.
그래서 예전에 어떤 아이가 시작한 일이고, 다들 그걸 따라 하는 거야.
좋은 전통은 이어가야지."

이야기는 카라와 튤립으로 시작되어
그들 조에 새로 투입된 동바를 중심으로
같은 동굴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는 다른 조 흑장미, 들꽃, 미나리와
미스터리를 품은 할머니 등의 다양한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뒤섞인다.

과연 아이들이 언젠가는 이 노동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달아갈 수 있을지,
대체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어떻게 흘러갈지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페이지는 술술 잘 넘어갔다.

아이들의 끝없는 노동 현장을 보고 있으니 군함도를 포함해
일제강점기에 강제 노역으로 고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순화 교육의 명목으로 반인륜적 불법 기구였던 삼청교육대도 생각났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의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건 옳은가? 하는 질문에도 생각이 닿았다.

역동적인 표지 디자인과 이야기가 잘 어우러지고
꽃 이름을 사용하는 아이들 때문인지
챕터별 표지에 꽃 그림이 들어가 있는 부분도 좋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사고해야 할까?
무거운 질문이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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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데아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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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서울이데아 #이우 #장편소설

7p
그저 고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뿐
고향에 대한 향수도, 추억도 없었기에

하지만 고향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낯설고 두려운 이 세상으로부터
영영 버림받은 이방인이 될 것 같았기에

여기 한 청년이 있다.
이름은 준서.

다섯 살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이후에는 모로코로 이민을 가 자랐다.
극성적인 엄마의 영향으로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유명 대학을 입학했어야 하던 그는
갑자기 모국인 한국의 대학을 간다는 일탈을 시도한다.

항상 자신이 어느 한 쪽과 어느 한 쪽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인 것만 같아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한국에 가면, 그렇게만 하면 고향에 정착하여 자기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25p
"파리에서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마치 유목민처럼 자고 일어나면 어딘가로 떠나야만 할 것 같았어요.
언제든지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래요, 저는 아직 정착하지 못했어요.
파리에서도, 이곳 리바트에서도...."

26p
"저는 그저 부유물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공허하게 떠다니는 거죠.
저는요... 살면서 어느 한 곳도 마음 편히 속했던 세계가 없었어요.
그건 마치 마음의 고향이 없는 기분이에요.
제 고향은 도대체 어디인 거죠?"
(중략)
"그럼 네가 생각하는 고향은 뭐니?"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요.
또 언제든 돌아가고 싶고,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요."

7 비밀의 정원
75p
"어느 나라 사람 같았는데요?"
(중략)
"한국과 유럽 사이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 같았어요."

12 다문화 주의자
128p
"이방인들? 이방인이 무슨 뜻이야?"
"본질적으로 그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야."
129p
"아무튼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는 이방인들이 있어.
나처럼 외국인도 있고, 너처럼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국적도 한국인인데 피부색이 한국인과 다른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과 외국인의 피가 반반 섞인 사람도 있어."
131p
"그렇다면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는 어떤 집단인 걸까."
(중략)
"센터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근본적인 정체성을 공유할 사람들이 없다는 거야.
소속감이 없는 거지.
근본적인 정체성과 소속감이 없다는 공통점이 우리를 엮어 주는 거야.
한국에 우리를 위한 타운은 없어."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한국 생활.
하지만 준서는 계속 삐걱거린다.

집에서의 흡연 문제로 이웃 및 집주인과 트러블이 생기고
좋아하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따라 피시방에 가지만
사용법도, 게임 조작법도 몰라 간첩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한국 사람들을 흉내 내며 잘 모방하다 보면,
멋진 캠퍼스 생활도 즐기고 친구도 잔뜩 사귀고
꿈에 그리던 한국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버리진 않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처음의 낯섦 때문이라 여겼던 휘청임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부푼 가슴으로 시작한 학과 생활에서도 동기들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우연한 기회로 가까이 지내게 된 대만인 여자친구 은혜와의 감정도 상황에 따라 요동친다.
노력하면 할수록 실타래가 엉키기만 하는 상황.
그리고 어떤 감정은 자꾸 준서를 불편하게 자극한다.

13 함께 하고 싶은 것
137~138p
"참, 준서야. 너 대안학교라고 알아?"
(중략)
"어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대안학교라는 곳을 다닌대.
보통 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을 가는 친구들도 많다고 하고.
결국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대안학교로 모이는 거지."
"나약한 집단 같아."
(중략)
"다문화는 학교생활조차 자신들만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잖아.
아이는 엄마 품을 떠나기 전까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어."
(중략)
"응. 나는 약자가 되지 않을 거야.
한국인들과 친구가 되고,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거야."

준서의 한국 생활은 어떻게 흘러갈지,
과연 그가 꿈꾸던 한국인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지만
뒷이야기는 직접 책에서 확인하는 게 좋으니 여기서 다 밝히지는 않겠다.

나도 이방인의 삶을 안다.
국내로 치자면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을,
국외로 치자면 짧게나마 유학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전자는 타 지방 사람에 대한 은근한 서울 사람들의 배척을 느꼈던 과거가 있고
후자는 거대한 다수 안에서 소수가 되니 자연적으로 놓이는 약자의 입장에 대한 설움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준서의 말이 생생하게 다가와 고개를 자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자주 연이 닿는 이우 작가님.
데뷔작인 <레지스탕스>를 시작으로, 얼마 전에는 <야생의 사고>를,
이번에는 <서울 이데아>로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책을 읽으면 <레지스탕스> 생각이 많이 났는데
나중에 작가의 말을 보니 같은 시기가 집필되었음을 알았다.
왠지 흐뭇했던 발견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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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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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버지니아울프 #누가제인오스틴을두려워하랴 #인문에세이 #아티초크

좋은 서평은 무엇일까?
서평단 활동을 거듭하면서 자주 하게 된 고민이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책을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어도
이 책의 장점을 타인에게 제대로 설명한 언어가 내겐 없기 때문이다.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어떤 날, 이 책을 만났다.
우리에겐 <자기만의 방>으로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가 에세이와 시가 수록된 작품이다.
이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데
내 고민에 나침반이 되어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느끼고 페이지를 펼쳤다.

서평은 예비 독자에게 정보 전달과 추천의 목적을 가진다면
비평은 이미 작품을 읽은 독자나 연구가에게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심층 분석하는 목적을 가진다.
때문에 비평은 서평보다 이론적 근거나 학술적 논리가 탄탄하다.

79p
19세기 거장들에게 비평은 '작품을 파헤치는 칼'이라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또 다른 문학적 형식'이었다.

이 대목을 염두에 두고
아래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오스틴에 대해 풀어낸 이야기를 보면 흥미롭다.

29~31p
하지만 더 분명한 사실은, 열다섯 살의 제인이
그저 가족을 웃기기 위해 혹은 집안에서만 소비될 글을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모두를 위해, 자신의 시대를 위해,
또 우리 시대를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제인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작가'였다.
그녀의 문장에는 리듬이 있고 형태가 있으며, 절제된 힘이 있다.
<사랑과 우정>에서
"그 여자는 착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했어요.
그런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었어요"와 같
은 대목은
독자를 잠시 웃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남을 문장이다.
활기차고, 경쾌하고, 유쾌하며,
때로는 자유로움이 허무맹랑할 정도다.
<사랑과 우정>은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 속에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다른 어떤 요소와도 섞이지 않는 또렷한 울림이 있다.
바로 웃음소리다.
열다섯 살의 제인은 거실 한구석에서 세상을 향해 웃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태어날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람 옆에 있던 요정 하나가 갓 태어난 그녀를 데리고 세상을 한 바퀴 날아다녔음이 틀림없다.
요람에 다시 누웠을 때 그녀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을 뿐 아니라 이미 자신의 왕국을 선택해 놓았다.
그녀는 그 영토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탐하지 않기로 요정에게 약속했다.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명확히 정했기에, 열다섯
살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거의 없었고 자신에 대한 환상은 더욱 없었다.
그녀가 쓰는 것은 무엇이든 쓰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고, 모든 면이 검토되어 있으며, 목사관이 아니라 우주라는 좌표 속에 자리매김되어 있다. 제인 오스틴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에 속내
를 알기 힘든 사람이다. <사랑과 우정>에서 그레빌 부인이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보면 저자인 제인 오스틴이 목사의
딸로서 그레빌 부인에게 무안당했던 일에 대한 분노의 흔
적이 전혀 없다. 그녀의 시선은 늘 본질을 향하고, 우리는
인간 본성의 지도 위에서 그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약속
을 지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인 오스틴은 자신이 정한 문학적 왕국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면 감정이 넘치는 나이임
에도 부끄러움 때문에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았고, 순간적인
연민에 휩쓸려 풍자를 지우거나, 감상에 도취되어 인물 묘
사를 흐리멍덩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제인 오스틴이라면 이 대목을 읽고 얼마나 뿌듯했을까!

책에는 이런 대목들이 그득하다.
내가 원작에 대한 독서 경험이 없어
울프의 글을 깊이 공감하기가 어려웠던 점이 아쉬우니
책에 나온 작품들을 독파하며
야금야금 다시 읽고 꼭꼭 씹어 소화하고 싶다.

또 하나 전쟁에 대한 대목 중
19세기 작가들에게는 그 영향이 전혀 없었다는 대목에서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이없는 전쟁 속에서
고스란히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과
전쟁을 벌여놓고 아무 영향 없이 이 밤을 보낼 이들을 떠올리며 입이 썼다는 이야기를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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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철학적 하루 - 마음을 뒤흔드는 동물 우화 21편
두리안 스케가와 지음, 미조카미 이쿠코 그림, 홍성민 옮김 / 공명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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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동물의철학적하루 #두리안스케가와 #공명 #우화

아주 오랜만에 만난 단어가 낯설게 느껴져
사전을 켰다.

우화 :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네이버 사전

아, 그랬지.
이런 단어였지.
첫 단추를 잘 꿰고 페이지를 넘긴다.

알록달록한 동물들의 판화 작품이 책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릴 때 보던 그림 동화책이 생각나는 경험.

초입에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이 있다.
나는 순식간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14p
한국어판 서문 중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 없나요?
판단 가족에게 끌리는 사람은,
지금의 혹독한 경쟁 사회에 지쳐버린 것일 수 있습니다.
사호의 상식과 관습은 자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무 피곤하죠.

동물들은 저마다 생활이 있고 모습도 다르지만,
지구라는 별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마음속 풍경을 보다 선명하게 만듭니다.
고속도로와 빌딩, 그 안에서 주식 그래프만 들여다보는 사람보다
아마존강 유역에 사는 화려한 색깔의 새와
태평양을 건너는 혹등고래 가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 더 풍요롭습니다.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잘 몰랐던 동물들의 습성이나 특징에 대한 부분이 글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것도 좋았고
곰의 시력 같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시야로 동물들을 바라본 문장들도 좋았다.

<곰 소년과 시선>
20p
곰은 시력이 좋을까, 나쁠까.
사실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곰은 아직 한 번도 시력 검사를 한 적이 없으니까.
어딘가 용감한 안과 의사가 시력검사표 앞에서 서서
한쪽 눈을 올챙이 모양의 국자로 가린 곰에게
"다음 글자는 읽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보지 않는 한 모를 일이다.

27p
아, 뛰지 마!
곰 소년은 속으로 외쳤다.
곰의 눈은 움직이는 것에 빨려 든다.
그리고 온몸으로 뒤쫓아가기 때문이다.
뛰지 마! 뛰지 마!

하지만 단순히 동물들에 대한 내용뿐만이 아니라
우화라는 카테고리가 가지는 철학적 물음도 잘 담겨 있어
몇몇 부분은 너무 묵직해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힘이 꽤 들기도 했다.

<두더지의 한계상황>
73p

다시 생각해 보면 흙을 파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 재미도 없다.
흙을 파면서 웃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계속 흙을 팠다.
재미없다고 하면, 진짜 재미없는 인생이랄까.
이것이 두더지생(生)이었다.
게다가 두더지인 이상 앞으로도 계속 흙을 팔 것이다.
(중략)
시시한 짓을 하는 나는 시시한 두더지일까.
만일 시시하지 않은 두더지라면 사는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사랑하는 키키 키린 배우님이 출연한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원작 작가분이라
이야기 곳곳에 영화 속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맛이 책 속에서 느껴져 반가웠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같이 읽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작은 힘을 보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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