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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고개 숙인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못해 처연하다. 남자의 등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한 인간의 빈 구석을 무방비하게 드러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자청하거나 떠맡겨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동행으로 함께한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채는 남자의 자존심을 무장해제시키고, 사랑이란 말로 포박한다. 죽고 못살 것 같던 그녀도 이젠 예사스럽고 어린 자식이 주는 기쁨도 잠시 스쳐가는 환희일 뿐, 머리 크면 언제 봤냐는 듯 무덤덤하다. 아버지란 자리는 그렇게 덧없다.
박범신의 '소금'은 빼앗긴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생각케하는 책이었다. 평생을 혹사당하고도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한채 불쌍하게 살다 간 전(前) 세대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눈물나도록 서글펐다. 자식은 낳아놨고 먹여 살릴 길은 없었던 아버지들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다. 손톱이 빠지고 지문이 닳도록 일했건만 가난을 벗어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처절하게 만들었다. 부모의 고통을 지켜보는 아이는 늘 가슴이 미어졌고, 자식에게만큼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다짐은 때론 가정의 붕괴마저 초래했다.
그렇게 윗세대는 자식을 키워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너무 빨리 잊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의 삶이 되고, 아버지의 삶이 결국 우리의 삶이 될거라는 것도 모른채 마치 남의 일인양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빨대와 깔대기를 꽂고도 무심했고, 당연하고 마땅한 일인양 요구했다. 아버지의 뒷거래로 근사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도 고마운 줄 몰랐고, 끝없이 요구만 했다. 그 돈을 모으기위해 아버지가 치뤄야할 밤이 얼마나 추할지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도 견디지 못할 압박감이 있으리라곤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한 염전의 소금 더미에 한 염부가 코를 박고 죽었다. 그날은 식구들의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서울에 유학보낸 아들의 졸업식 날이었다. 소금을 지천에 두고도 염부는 체내 소금이 모자라 죽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단 며칠만에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잊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아들은 운명에 이끌려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그럼에도 아내와 세 딸에게 최선을 다했다.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취급 받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결혼이 뜻하지 않았던 것처럼 막내딸의 생일날에 뜻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다.
죽은 염부의 아들이자 세 딸의 아버지였던 선명우는 당시 췌장암 말기였다. 딸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시우의 생일날 그에게 닥친 일은 평온했던 삶을 하루 아침에 뒤바꿔 놓았다. 운명은 인간에게 거역할 의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 한번도 결근한 적 없던 회사와, 청지기처럼 살아왔던 가정도 놓아버린 채 명우는 운명이 이끄는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주인마님처럼 남편을 부리고 경멸했던 혜란은 명우가 돌아오지 않자 자신을 놓아버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세상을 뜬다. 딸들은 그제서야 엄마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실감한다. 집은 엉망이 되었고 자매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십 년이 지나 시우가 아버지를 찾겠다며 강경땅을 밟는다. 시우는 화자인 나와 우연찮게 알게 된 사이다. 시인인 나는 선명우를 찾겠다 마음 먹고 이리저리 수소문 한다. 화자인 내가 선명우를 찾는 여정은 우리의 지난 시간을 아프게 만나게 했다. 어찌 그리 서럽게 살아야했는지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았다. 만일 내 아버지의 이야기였다면 내 가슴은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멈칫 서서 그를 뿌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본 아버지는 그사이 얼굴이 더 까매졌고 상반신이 수수깡처럼 마른 듯했다. 목이 메어서 그는 얼른 말을 보탰다. "여름방학이어서요, 아버지 혼자는 소금을 다 못 거두잖아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긴 했으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졌다. 제가 아버지를 도울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중략……
아버지의 쇳소리가 계속 고막을 찢었다.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기기 위해서,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작은형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저수조 방향으로 절룩절룩 도망쳤다. "아버지!" 그는 울었다. 대파 자루로 맞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뼈가 부러져도 참으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가가 번질거리는 것이 아버지의 눈물 때문이라는 걸 느꼈을 때, 그는 비로소 그곳에 돌아온 것이 죄라는 걸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는 짓이라는 걸.
pp 173~175
아버지를 돕기 위해 100리가 넘는 길을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가 걸어갔다. 그럼에도 명우는 아버지에게 맞아야했다. 자식들을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빼내려는 아버지의 집념은 무서웠고, 그 사랑은 질겼다. 매를 맞고 간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않았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물 한모금 먹지 못한 채 먼 길을 달려갔고, 아이를 확인하자마자 되돌아 나왔다. 아버지에겐 단 일 분도 쉴 새가 없었다. 그러나 한없이 불쌍한 아버지를 슬프게 쳐다보면 안되었다. 그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 자식들이 살 수만 있다면 자기 하나 희생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아버지의 사랑은 그 깊이만큼 처절했고, 이보다 더 장엄한 생의 서사도 없었다.
거칠고 악착같이 살아야만 살 수 있었던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아니, 시공간과 삶의 양태만 다를 뿐 이 시대 모든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가족을 위한다며 열심히 살았지만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그들에겐 이제 늘어진 어깨와 슬픈 눈만 남았다. 오로지 앞만 보았지 두루 볼수 있는 여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삶에 미숙했기에 그렇게 살아야 잘사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작가 박범신은 소금에도 달고, 시고, 쓰고, 짠맛이 있다고 했다. 소금으로 비유된 아버지의 맛이 각집마다 조금씩 달랐을 터다. 그러나 자신을 녹여야했다는 아픔은 공통이었다. 이 책은 박범신이 그런 초라한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우리에게 건내는 충고다. 아버지가 외로운데 내가 외롭지 않을 순 없으니 말이다. 좋건 싫건 이미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