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고개 숙인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못해 처연하다. 남자의 등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한 인간의 빈 구석을 무방비하게 드러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자청하거나 떠맡겨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동행으로 함께한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채는 남자의 자존심을 무장해제시키고, 사랑이란 말로 포박한다. 죽고 못살 것 같던 그녀도 이젠 예사스럽고 어린 자식이 주는 기쁨도 잠시 스쳐가는 환희일 뿐, 머리 크면 언제 봤냐는 듯 무덤덤하다. 아버지란 자리는 그렇게 덧없다.

 

박범신의 '소금'은 빼앗긴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생각케하는 책이었다. 평생을 혹사당하고도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한채 불쌍하게 살다 간 전(前) 세대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눈물나도록 서글펐다. 자식은 낳아놨고 먹여 살릴 길은 없었던 아버지들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다. 손톱이 빠지고 지문이 닳도록 일했건만 가난을 벗어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처절하게 만들었다. 부모의 고통을 지켜보는 아이는 늘 가슴이 미어졌고, 자식에게만큼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다짐은 때론 가정의 붕괴마저 초래했다.  

 

그렇게 윗세대는 자식을 키워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너무 빨리 잊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의 삶이 되고, 아버지의 삶이 결국 우리의 삶이 될거라는 것도 모른채 마치 남의 일인양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빨대와 깔대기를 꽂고도 무심했고, 당연하고 마땅한 일인양 요구했다. 아버지의 뒷거래로 근사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도 고마운 줄 몰랐고, 끝없이 요구만 했다. 그 돈을 모으기위해 아버지가 치뤄야할 밤이 얼마나 추할지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도 견디지 못할 압박감이 있으리라곤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한 염전의 소금 더미에 한 염부가 코를 박고 죽었다. 그날은 식구들의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서울에 유학보낸 아들의 졸업식 날이었다. 소금을 지천에 두고도 염부는 체내 소금이 모자라 죽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단 며칠만에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잊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아들은 운명에 이끌려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그럼에도 아내와 세 딸에게 최선을 다했다.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취급 받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결혼이 뜻하지 않았던 것처럼 막내딸의 생일날에 뜻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다.

 

죽은 염부의 아들이자 세 딸의 아버지였던 선명우는 당시 췌장암 말기였다. 딸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시우의 생일날 그에게 닥친 일은 평온했던 삶을 하루 아침에 뒤바꿔 놓았다. 운명은 인간에게 거역할 의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 한번도 결근한 적 없던 회사와, 청지기처럼 살아왔던 가정도 놓아버린 채 명우는 운명이 이끄는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주인마님처럼 남편을 부리고 경멸했던 혜란은 명우가 돌아오지 않자 자신을 놓아버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세상을 뜬다. 딸들은 그제서야 엄마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실감한다. 집은 엉망이 되었고 자매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십 년이 지나 시우가 아버지를 찾겠다며 강경땅을 밟는다. 시우는 화자인 나와 우연찮게 알게 된 사이다. 시인인 나는 선명우를 찾겠다 마음 먹고 이리저리 수소문 한다. 화자인 내가 선명우를 찾는 여정은 우리의 지난 시간을 아프게 만나게 했다. 어찌 그리 서럽게 살아야했는지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았다. 만일 내 아버지의 이야기였다면 내 가슴은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멈칫 서서 그를 뿌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본 아버지는 그사이 얼굴이 더 까매졌고 상반신이 수수깡처럼 마른 듯했다. 목이 메어서 그는 얼른 말을 보탰다. "여름방학이어서요, 아버지 혼자는 소금을 다 못 거두잖아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긴 했으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졌다. 제가 아버지를 도울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중략……

 

아버지의 쇳소리가 계속 고막을 찢었다.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기기 위해서,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작은형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저수조 방향으로 절룩절룩 도망쳤다. "아버지!" 그는 울었다. 대파 자루로 맞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뼈가 부러져도 참으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가가 번질거리는 것이 아버지의 눈물 때문이라는 걸 느꼈을 때, 그는 비로소 그곳에 돌아온 것이 죄라는 걸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는 짓이라는 걸.

pp 173~175

 

아버지를 돕기 위해 100리가 넘는 길을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가 걸어갔다. 그럼에도 명우는 아버지에게 맞아야했다. 자식들을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빼내려는 아버지의 집념은 무서웠고, 그 사랑은 질겼다. 매를 맞고 간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않았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물 한모금 먹지 못한 채 먼 길을 달려갔고, 아이를 확인하자마자 되돌아 나왔다. 아버지에겐 단 일 분도 쉴 새가 없었다. 그러나 한없이 불쌍한 아버지를 슬프게 쳐다보면 안되었다. 그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 자식들이 살 수만 있다면 자기 하나 희생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아버지의 사랑은 그 깊이만큼 처절했고, 이보다 더 장엄한 생의 서사도 없었다.  

 

거칠고 악착같이 살아야만 살 수 있었던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아니, 시공간과 삶의 양태만 다를 뿐 이 시대 모든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가족을 위한다며 열심히 살았지만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그들에겐 이제 늘어진 어깨와 슬픈 눈만 남았다. 오로지 앞만 보았지 두루 볼수 있는 여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삶에 미숙했기에 그렇게 살아야 잘사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작가 박범신은 소금에도 달고, 시고, 쓰고, 짠맛이 있다고 했다. 소금으로 비유된 아버지의 맛이 각집마다 조금씩 달랐을 터다. 그러나 자신을 녹여야했다는 아픔은 공통이었다. 이 책은 박범신이 그런 초라한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우리에게 건내는 충고다. 아버지가 외로운데 내가 외롭지 않을 순 없으니 말이다. 좋건 싫건 이미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으랏차차 뚱보 클럽 - 2013년 제19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83
전현정 지음, 박정섭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들이라고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다. 아이들도 안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이다. 그래서아이들 앞에서는 입조심을 해야 한다. 잘못된 말을 가려내고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아이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던지는 한마디가 아이들의 자의식에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입조심을 넘어 입단속까지라도 해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함부로 말하는 어른들이 우리 사회엔 참 많다. '아이의 자의식'이란 '환경의 산물'이란 말과 이음동의어다. 아이가 어떤 환경속에서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따라 자의식이 결정된다. 그런데 요즘과 같은 몸 담론의 시대에 성형민국, 성형공화국이라 불리는 이 곳에서 평균의 테두리를 벗어난 아이가 건강한 자의식을 갖기란 좀체 쉬울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이런 사회 풍조에 당당히 '스톱'을 외치는 책이 출현했다. 제목도 유쾌하다. '으랏차차 뚱보클럽'이다. 우와, 159cm의 키에 79kg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남학생 고은찬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은찬이의 별명은 십인분, 힘은 장사다. 은찬이네 식구들은 모두 한 몸매 한다. 엄마는 비만 전문 모델이고, 외할머니는 동네의 패셔니스타다. 다같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의 주목은 당연한 일이다. 격투기 선수였던 아빠는 은찬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은퇴 경기를 하다 세상을 떠나셨다. 냉면을 먹으러 가자던 아빠와의 약속이 물거품이 된 후 은찬이는 더이상 냉면을 먹지 않는다.

 

 

 

요새 엄마는 은찬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며 난리다.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속상하긴 해도 은찬이는 자신의 몸이 부끄럽지 않은데, 엄마는 뚱보로 살면 큰일이라며 비만교실에 다시 다니란다. 엄마의 잔소리에 은찬이는 역도부에 들어간다. 그러면 살도 안빼도 되고, 무시무시한 체육관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역도가 힘좋고, 똥꼬에 잔뜩 힘만 준다고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아, 쉽지 않다. 게다가 며칠 전 본의 아니게 짝인 예슬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할머니는 요즘 당뇨 합병증 때문인지 자주 넘어지시고, 설탕과 소금도 구별하지 못한다. 엄마는 아무래도 일이 줄어든 모양이다. 얼굴빛이 안좋다.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야겠다. 그래야 상금으로 할머니 수술을 시켜드리지.

 

그러나 첫 출전에 1등은 무리였나보다. 3등에 머물고 말았다. 엄마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역도를 내켜하지 않았던 엄마였는데 오히려 은찬이를 위로해주신다. 한동안 일이 줄어 힘들어하던 엄마는 이제 비만 전문 모델 대신 빅 사이즈 몰 모델이 되어 종횡무진 활약하신다. 할머니는 구청에서 나온 지원금으로 수술을 받으셨다. 오늘 엄마가 외식을 하자신다. 은찬이는 냉면을 시켰다. 그것도 사리를 다섯 개나 더 얹어서 말이다. 운동으로 잠시 빠졌던 살은 원상복귀했다. 그래도 뚱보 은찬이는 이대로, 충분히 행복하기만 하다.

 

어쩌면 우리들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채, 아이들을 자본과 소비의 논리로 대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나 타고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 사회의 천박한 기준에 맞추려하는 건 슬픈 일이다. 아이들의 내면엔 관심이 없고 보여지는 것에만 주목하는건 아이들을 괴롭히는 짓이 된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서 사랑스럽고, 너라서 예쁘고 제라서 귀여운 건데, 우리들은 아이들을 자꾸 비교하고 나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사회적 관성에 우리는 이미 물들어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려 노력할때 우리는 이 시대의 저급한 문화를 조금씩 바꾸는 대단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월의 달리기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아픔들이 있다. 벌써 30년이 지났는데도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다 아물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은 남겨진 자들에게는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함께 했던 사람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충격과 부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한단 말인가. 게다가 죽은이들은 한때 폭도라고 불렸다. 명예 회복이 된다 한들 죽은자가 다시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남은 자들은 그 잔인한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그들의 운명을 가른 5월은 처음부터 암울했을까? 

 

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동화작가 김해원이 책을 썼다. 그 깊은 상처를 어떻게 동화로 다루려는지 놀랍기도 하고 조금 우려도 된다. 5.18은 아직도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소재니 말이다. 게다가 누군가의 고통이 담긴 글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힘이 든다. 나는 쓸데 없을지도 모르는 걱정을 하느라 책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책 표지에 있는 요 녀석들은 장난기 있는 얼굴로 행복하게 달린다. 앞의 녀석이 진지한 건 아마 일등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일테다. 제목 그대로 오월을 달리는 아이들이다. 푸른 하늘을 뒤로 신나게 달리는 아이들에게선 어떤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은 더 푸르고 발걸음은 더 가벼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 뒤에 떠있는 그림들은 이 행복한 시간이 결코 길 수 없음을 비춘다. 아이야, 친구를 이기겠다고 경쟁하는 마음조차도 일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걸 넌 그 땐 몰랐겠지? 5월을 달리는 아이들에게 1980년의 봄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명수는 사평국민학교 육상부의 단 하나뿐인 선수다. 지금 명수는, 내년에 있을 전국소년체전 선발대회에 나와 있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명수는 첫 출전에 전남 대표 선수로 뽑혔다. 졸지에 다크호스가 된 명수는 하늘을 날 것 같다. 명수가 전남 대표가 됐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신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때문에 늘 가슴앓이를 하셨던 할머니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다. 명수의 아버지는 시장통에서 시계수리를 하고 있다.

 

요즘 명수는 정태만 보면 속이 상한다. 명수가 이 분 오십 초에 들어오면 정태는 이 분 사십구 초에 들어오고, 명수가 이 분 사십팔 초에 들어오면 정태는 이 분 사십칠 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명수는 정태에게 항상 일 초를 뒤진다. 그 일 초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명수의 마음은 줄곧 편치 않다. 숙소엔 명수외에 열 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합숙하고 있다. 좀전 아버지가 친구들과 같이 먹으라며 딸기를 사오셨다. 아버지는 요새 학생들의 데모로 거리가 시끄럽다며 절대 시내로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 그때만 해도 명수는 몰랐다. 이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아침부터 대문을 기웃거리던 진규가 오늘 시내구경을 시켜준단다. 박코치의 매서운 눈을 무슨 수로 피할 수 있다는 말인지 명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규는 자신만만하고, 진규의 꼼수 덕에 명수와 정태, 성일이는 숙소인 사동여인숙을 벗어난다. 화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은 햇빛을 찾아 광주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원엔 장사치는 찾아볼 수 없고 긴장한 얼굴을 한 사람들만 줄지어 서있다. 대학생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최루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언제 와 있었을까, 군인들이 곤봉으로 대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한다.

 

 

박코치는 때국물과 눈물로 꾀죄죄해진 아이들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분간 훈련은 숙소에서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양동시장 신발 가게 아저씨가 명수를 찾아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명수는 아버지가 모셔져 있다는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은 사람들의 통곡으로 가득하고 명수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버지의 장례를 어서 치뤄야한다. 그런데 나주 집에 연락할 길이 없다. 명수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길을 나선다. 집으로 가는 길에 명수는 정태에게 '자신이 한번도 명수를 미워해 본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정태는 명수에게 함께 달리자는 말을 한다.

 

그 후 명수가 다시 합숙소로 돌아갔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두 남자가 하는 말을 통해 유추해 볼 뿐이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소년 가장이 되어야 했을 어린 명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넉넉하지는 못했을 망정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았던 명수네 식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집에서 살고 있을까? 불편한 다리로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애썼던 명수 아버지의 어처구니 없고 기막힌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노외에는 마땅한 말이 없음에도 나는 감히 희망이란 말을 꺼내본다.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명수를 배웅해준 정태와 진규, 또 박코치와 미스터 박, 그리고 시장통의 신발가게 아저씨에게서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명수가 희망을 놓아버린다면 이유없이 죽어야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 되고 말터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생명으로 충만했던 5월에 일어난 참혹한 죽음은 이제 수 많은 명수의 삶으로 다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명수가 다시 달리기를 하는 날 5월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약 개발의 비밀을 알고 싶니? : 약학 주니어 대학 5
김선 지음, 이경석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인생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니 말이다. 우리가 먼저 산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아이에게 선택권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진지하게 고민한 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실패를 한다해도 누군가에게 책임전가를 하지 않게 되고,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아이들이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맛보고 진로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의 저자 김선은 약학 전공자로 실제 약국에서 약사로 근무도 했고, 보건복지부 의약품 정책과에서 의약품 안전 관리 업무를 맡기도 했단다. 실무 경험이 많아서인지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잘 잡아 글을 편안하고 재미있게 이끌어간다.

 

거리만 나가도 약국이 몇 미터 지나지 않아 하나씩 있고,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기능성 식품이라 불리는 영양제를 먹고 있지만 약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의외로 적다. 약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양 철썩같이 믿으며 과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약을 먹을 때 알아야 할 기본적인 사항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항을 비롯, 우리에게 잘 못 알려진 내용들과 인류의 목숨을 구한 약의 발견과 역사, 약학에 대한 궁금증을 3부로 나눠 풀어준다.

 

 

이 책의 장점은 구체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사물의 양면이 있음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편리하고 유익한 점이 있으면 그만큼 위험하고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음을 저자는 약을 통해 차분히 전해주고 있다. 약의 효능만이 강조되고 부작용은 두루뭉실 간과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실제 사례를 통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특히 이 책은 모든 약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분명히 전달하는데 단순히 약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약과 관련된 사회상까지도 전달하려는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좋은 책은 지식 전달에 머물지 않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추동할 때 아이들은 발전한다. 이 책은 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회상을 이야기했고 세상을 거론했다. 약의 역사는 곧 세상의 역사였고, 그 세상은 우리로 묶여져야 함을 나직히 말한다. 아이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을 만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명할 수 없으리만큼 서정적이고 애상적이면서도 지긋이 들여다보는 듯한 관조적인 자세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정서를 아름답게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다. 그녀가 그리는 삶의 풍경들은 차분하고 나긋하며 사랑스럽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 잔잔하면서도 가슴 따뜻해지는 기쁨과 묘한 설레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요시모토 바나나를 다 나타낼 순 없다. 깊숙한 상처와 아픔을 향해 다가서는 그녀의 태도는 전사와 같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의도적이라 느껴질만큼 죽음을 비롯한 생의 질곡들을 작품 안에 밀어넣는다. 그녀는 죽음이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매번 그려낸다. 또한 생의 질곡들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인양 서술한다. 폭풍처럼 다가와 무섭도록 흔들지만 그녀가 그리는 생의 고통들은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녀가 그리는 삶의 고통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그리는 삶의 어려움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겪는 성장통이다. 그런 점에서 '사우스포인트의 연인'도 요시모토 바나나가 그리는 삶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화자인 나, 테트라는 아빠의 사업실패로 엄마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유일한 친구이자 첫사랑인 다마히코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한채 헤어지는 게 아쉬워 테트라는 몇 자 적어 다마히코네 우편함에 넣어둔다. 앞날에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테트라의 막연한 예감은 들어맞았고, 엄마는 아빠와의 결혼 생활을 마감해 버린다. 그때 테트라는 12살에 불과했다.

 

군마에 잘 정착한 엄마와는 달리, 사업 실패와 이혼의 충격으로 아빠는 술에 절어 살다 몇 년 후 세상을 뜬다. 자유분방한 엄마 밑에서 테트라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엄마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때마다 다마히코와의 만남은 테트라를 지탱케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다마히코가 하와이로 떠나게 되면서 테트라는 소식을 끊어버린다. 그후 테트라는 퀼트 아티스트가 되어 활동하고, 어느날 슈퍼마켓의 음악 코너에서 어릴 때 다마히코에게 썼던 편지 내용을 가사로 한 노래를 듣게 된다.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이 전개될 때가 있다. 테트라의 인생이 그랬다. 우쿠렐레의 선율을 타고 나직히 전해지는 느낌은 다마히코를 떠올리게 했다. 무서우리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다마히코와의 추억에 테트라는 하와이로 떠난다. 다마히코는 일년 전 세상을 떠난 동생을 대신해 동생의 삶을 살고 있고, 다마히코의 어머니 마오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테트라는 당분간 하와이에 남아 다마히코와 마오의 빈 구석을 채워주기로 마음먹는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단순한 재회가 아닌 또다른 만남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하와이의 남국의 정서와 그녀 특유의 정서로 멋지게 버무린다. 사우스포인트는 휴양지로서의 하와이가 아니라 특별한 만남과 치유의 장소로 아름답게 그려지며,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같은 생의 양 극단을 한 장소에서 만나게 한 후 자연스레 이어가도록 이끈다. 윗 세대 하치와 마오의 사랑은 이제 그들의 아들인 다마히코와 연인 테트라로 계속되어 사우스포인트를 감싼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시야는 '사우스포인트의 연인'에서 확장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한 세대 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품으며 두 세대가 결코 별개가 될 수 없음을 그린다. 삶의 내진이나 고통도 생의 일부이기에 지나치거나 경감될 수 없음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보여준다. 사랑에 대한 환상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감싸는 일관된 주제다. 그 주제의 자연스런 소화와 안착은 여기 사우스포인트에서 조화롭게 이뤄진다. 사랑이 단지 감정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숙명적 만남임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우스포인트의 연인'에서 신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