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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파르티잔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시를 읽으며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 한 번이 서정춘의 '30년 전'을 읽고서였다. 왠지 모를 서러움이 가슴을 훒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2연 4행에 불과한 시였지만 이 짧은 시가 전하는 울림은 꽤 오래갔다.
'30년 전'
- 1959년 겨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세상에 못 볼 것이 자식 배곯는 모습이란다. 먹고 살 길을 찾아 먼 길 떠나는 어린 자식에게, 다시 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곳에서 배불리 먹고 잘 살라는 애비의 당부가 어찌 이리 덤덤하면서도 절절할 수 있을까? 그 애잔함과 서글픔에 목이 매일 정도다. 이 시를 읽은 후부터 서정춘의 시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가 시 짓기에 인색하다는 신경림의 글까지 읽은 터라, 기회가 되면 그의 시집을 꼭 사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두번 째 작으로 2001년 출간되었다. 11 년이나 지났으니 구간도 보통 구간이 아닌 셈이다. 그래선지 올 초 이 책을 샀을 때, 마치 고서점에서 희귀본을 산 듯한 느낌이 들었다. 1부 '꿈, 안풍동 詩'에 19편, 2부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에 14편의 시가 담겨있다. 시도 몇 편 없지만 시 자체도 여전히 짧았다. 그러나 짧은 시에 담긴 의미와 그만의 정서는 여전하면서도 확연히 외연이 넓어진 느낌이다.
낙차 落差
-해우소에서
마음놓고 듣네
나 똥 떨어지는 소리
대웅전 뒤뜰에 동백나무 똥꽃 떨어지는 소리
노스님 주장자가 텅텅 바닥을 치는 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소리
어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똥 얘기, 똥 얘기를 들으니 해방감마저 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산사의 해우소에서 내 똥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근심을 푼다는 곳에서, 모든 것이 다 떨어지고 난 후 아무도 없는 듯한 적요를 느끼고 싶다. 가장 원초적이고 고독한 행위 속에서 그 누구도 아닌 나와 조우하고 나를 위로하며, 비워짐 속에 채워지는 기쁨을 만나고 싶다. 살포시 얹혀졌을 재를 향해 떨어지는 똥 떵어리의 퐁당 소리는 얼마나 명랑하랴.
봉선화
-1950년대
너는 가낭뱅이 울아비의 작은 딸
나의 배고팠던 누님이 아이보개 떠나면서 보고 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무슨 설움이 그리도 많을까? 마치 '30년 전'의 연작시 같다. 한 입이라도 덜어야 살 수 있기에 집을 떠나야만 했던 배고픈 누이의 모습이, 목에 가시처럼 박힌 소년의 애절한 노래다. 누이가 울면서 떠났던 길에 피어있던 봉선화, 소년은 봉선화를 보며 이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울 밑에서 선 봉선화야, 내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또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30년 전'의 애비가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면, 소년은 꺼이꺼이 울며 누나를 소리쳐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색을 달리하는 여러 시들이 있지만, 나는 못 먹고 못 살던 때의 슬프고도 애절한 정서를 가진 서정춘의 시가 특별히 더 좋다. 요즘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상황들이 불과 반 세기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을 그가 몸으로 증언하기 때문이요, 그런 슬픔들이 켜켜이 쌓인 터 위에 우리의 풍요가 들어섰음을 상기케 하기 때문이다. 언제고 한번 기회가 된다면 서정춘 시인을 모시고, 서 시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차려진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가치 앞에서 어떻게 시를 붙들고 지켜왔는지 그 얘기를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이 얘기로 서두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제 얼굴이 험상궂지요잉. 이게 다 그때 하도 고생을 해서 그렇당께."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