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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 ㅣ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평점 :
우리나라와 거리도 가깝고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 보이지 않는 질서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 움직이기에 타국인이 보기엔 때로 숨 막힐 것처럼 답답한데, 그래서인지 역으로 개성 강한 사람들이 꽤 있다. 우리 정서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엉뚱하고 기발한 사람들은 좀 더 극대화된 모습으로 소설에도 등장한다. 예전에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으며 별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때문에 적잖이 웃었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도 꽤 황당하고 특이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나는, 그의 책보다 그의 이름을 따 제정한 상의 수상작으로 먼저 알게 됐다. 2회 수상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은 이 책의 가치를 되짚어 생각할 만큼 잘 쓰여진 책이었다. '침묵'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이 안될 만큼 묵직하고 진지한 책이었고, '선생님의 가방'은 30여년이란 나이차가 나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을 담담하고도 깔끔하고 그려낸 수작이었다. 일본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 기리노 나쓰오등이 이 상을 받았다 한다. 그래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내심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일본 작가의 책까지 찾아가며 읽게 되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운좋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1920년대에 쓰여진 책이라 공감이 될런지도 의문이었고, 탐미주의 문학의 상징이란 말도 부담스러웠는데 책을 펴보니 괜한 우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의 D. H. 로렌스로 불렸다는 말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미친 사랑'은 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독특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일본사람도 아니고 탐미주의에 별 관심도 없으니 이 책이 가진 문학적 성취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지 소설이 꼭 감동적인 이야기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와이 조지란 남자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나오미와의 동거 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스물여덟 살의 전기회사의 기사인 가와이 조지는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결혼 적령기의 남자다. 직장에서는 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평판이 좋으며 키는 작지만 자칭 미남이다. 그런 조지가 카페의 여급으로 있던 나오미를 만난 건 나오미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조지는 나오미를 데려와 잘 돌봐주고 싶었고, 자신의 바람만큼 자라준다면 아내로 삼을 계획도 있었다. 아이였던 나오미가 여자가 돼가면서 조지는 나오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준다. 몇 년이 채 못돼 모아놓은 돈은 나오미의 뒷바라지에 다 들어가 버리고, 시골에 있는 노모에게 돈까지 부쳐달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조지를 우습게 여긴 나오미는 조지 몰래 남자들을 만나고 다니다 조지에게 들키고 만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일삼는 나오미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지는 나오미를 쫓아내고, 나오미는 기다렸다는 듯 집을 나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산다. 그러면서도 나오미는 조지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는 쥐락펴락하고, 결국 조지의 애걸로 다시 집에 들어온다. 이제는 조지는 남편으로서의 어떤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채 이용만 당하면서도 과분하다 생각하며 산다는 이야기다.
참 독특한 책이었다. 이런 별다른 시각은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소녀를 데려다 잘 먹이고 입힌 후 아내를 삼는다는 발상이 나로선 이해가 안갔지만, 소설이니 가능하지 싶다. 작가의 실제 삶도 매우 특별했다고 하는데, 연재 당시 변혁적인 여성상으로 일대 반향을 일으켰다 한다. 쾌락과 굴종, 일탈과 방종의 성애 이야기였지만 가볍고 지나치지 않아 읽을 수 있었다. 고전의 반열에까지 이르렀다는 데 까지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다른 문화의 유입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변화를 이방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흥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