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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빅터 - 17년 동안 바보로 살았던 멘사 회장의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레이먼드 조 지음, 박형동 그림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자아상은 어린 시절 부모의 말이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 또는 반복되거나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부정적 자아상을 깨트리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루 이틀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상은 행복으로 이끌지만 부정적 자아상은 행복을 불편하게 여긴다. 나 또한 그리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가 바라는 나 사이의 간극이 커서다. 지금은 덜하지만 20대 때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세워놓고 자책하기를 밥먹듯 했다. 자책과 좌절, 절망의 사이클 안에 살았고, 불사신처럼 다시 솟아나는 내 안의 생명력에 경이가 아닌 경악을 금치 못하곤 했다. 아직도 바라는 만큼 안되거나 글이 부끄러울 때 기다렸다는 듯 부정적 자아상은 나를 흔들어댄다. 그만큼 자아상의 뿌리는 깊고 질기다.
'바보 빅터'는 부정적인 얘기만을 들어온 아이들이 얼마나 그릇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자괴감에 젖어 살게 되는지를 긴 시간에 걸쳐 보여준다. 어른들의 편견어린 시선과 함부로 한 말, 무신경한 말들이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큰 그늘을 드리우는지 이 책엔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다. 한 명은 실제 아이큐가 172인데도 평소 말을 더듬고 어둔하다는 이유로 아이큐 72로 오인돼 바보로 오랜 시간을 살아야했던 빅터이고, 다른 한 명은 예쁜데도 불구하고 못난이라 불리는 바람에 자아상이 심하게 왜곡된 로라이다. 호아킴 데 포사다는 빅터의 실제 인물인 국제멘사협회 회장 빅터 세리브리아코프와 외모 콤플렉스로 힘겨운 삶을 살았던 트레이시의 이야기를 통해 거짓이 어떻게 사실을 오도하는지를 그려낸다.
삶의 어떤 순간도 지나고 보면 버릴 게 없다지만 이들의 과거는 너무나 딱하다. 인격 모독적인 발언은 예사고, 빅터는 아이들에게 저능아 취급과 함께 구타까지 당한다. 수시로 맞고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 속에서 빅터가 정상적인 삶을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일 것이다. 삶의 매순간이 이들에겐 버거웠다. 빅터와는 달리 로라는 속으로 꽁꽁 싸매두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는다. 그런데 늘 우울하고 신경이 예민해있으며 불안하다. 아버지는 한번도 격려해주지 않고 비아냥거리기만 하며, 동생마저도 부모의 말투를 따라서 누나를 아무렇지 않게 못난이라 부른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작가가 될 수 있는 행운이 와도 로라는 조그만 격랑조차 이겨낼 힘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란 때로 예기지 않은 선물도 예비해놓는다. 빅터에게는 그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 테일러 회장이, 로라에게는 문학담당선생님이었던 레이첼이 있다. 이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빅터와 로라에게 위로와 격려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하지만 생의 암초 또한 질세라 이들의 앞길에 장애물을 만들어 놓는다. 빅터는 테일러 회장이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게 돼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하고, 로라는 책을 내기위해 직장까지 관두었는데도 일이 어긋나 버려 실직자가 된다. 빅터는 다시 예전의 바보로, 로라 또한 매사에 소극적이고 불행이 더 편한 못난이로 돌아간다.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일 중 하나는 길이 열렸다 다시 닫힐 때이다. 빅터도, 로라도 그 때가 가장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들에게 우연이란 생의 선물이 다시 주어졌고 기회인지도 모른채 이 선물을 로라가 잡는다. 로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빅터에게도 자신이 받은 선물을 나눈다. 두렵고 떨리지만 사실을 확인하도록 격려하는 로라의 마음을 통해 빅터는 생의 전환점을 만든다. 빅터는 바보가 아닌 천재였으며, 로라 또한 그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로 인해 자신이 알아야 할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못난이라 불리게 된 것은 로라가 너무 예뻐 유괴사건을 겪었다고 생각한 부모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됐다는 것을 말이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스런 시간을 빅터와 로라는 겪었다. 그러나 둘은 누구도 아닌 자신들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다. 그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책을 덮으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딱하기만 하다. 하지만 빅터와 로라의 모습이 어찌 그들의 모습이기만 할까. 호아킴 데 포사다는 프롤로그 앞 안톤 체홉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믿는대로 된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쿵쿵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 생각 여하에 따라 내 미래가 달라진다니, 생각의 무서운 힘이 어느 쪽으로 작동할지는 내 자아상에 달려있다니, 왠지 모를 흥분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