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장동건과 고소영이 풋풋했던 시절, 함께 출연했던 '연풍연가'라는 영화가 있다. 제주도의 황홀한 풍광을 배경으로, 인물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배우가 그리는 사랑 이야기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서정적 분위기와 감미로운 정경에 지금보다 젊었던 나는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도도한 이미지를 벗어버린 고소영은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청순하고 여린 가이드로, 장동건은 슬픔을 간직한 관광객으로 나와 자연스런 연기를 선보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서로에게 끌렸던 두 사람은 그 감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삶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생의 단면을 그림같은 풍광에 담아 보여준 이 영화는 그렇기에 더 쓸쓸했으며 무척이나 고왔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기억은 영화와 관련된 어떤 것을 볼 때도 잔상으로 남아 영향을 미쳤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은 전부터 이 영화의 제목이 주는 느낌과 비슷해 관심이 가던 책이었다. 灣景이란 제목은 볼 때마다 알 수없는 아련함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해질 무렵의 경치라는 뜻의 만경은 이 책에 대해서도 그런 내 감정을 투사하게 했다.

 

'동경만경'은 부두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 료스케와 전문직 여성 '료코'가 만남 사이트에서 만나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는데까지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도회지의 일상과 그 안에서 사는 현대 남녀의 모습이 덤덤하고도 세밀하게 그려진다. 료스케는 료코를 공항에서 만나고 난 후 다시 만남이 이어지지 않자 은근히 상심해 있다. 비록 한 번 뿐인 만남이었지만 료코는 그의 기억 창고속에남아 있다. 메일을 보내도 연락이 없자, 그녀의 근무처에도 가보지만 그런 여성은 없다. 회신이 오지 않으면 다시는 만날 길이 없다.

 

그러던 차, 옆집에 사는 직장 동료 오스기의 여자친구인 유코가 소개해준 마리를 만나 자신의 집에서 밤을 함께 한다. 료스케는 마리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뒤틀린 감정이었고, 료코는 잊혀진 게 아니었다. 마리조차도 이내 료코의 존재를 감지해낸다. 료쿄에게 다시 메일을 보내본다. 료쿄에게 답신이 왔다. 료스케는 료코를 만나고는 마리를 정리한다.

어느 날 유명 작가인 아오야마 호타루가 항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부두를 찾아온다. 얼떨결에 료스케는 그녀의 일행을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된다. 오스기의 여자친구 유코는 아오야마 호타루의 열혈 팬이다. 료스케의 이야기는 각색돼 대중지에 실리고, 료스케가 자신의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었던 사람과 졸업후 함께 살았다는 사실까지 글에 실린다. 자신과 선생님의 관계를 의심하던 사람들 앞에서 순수한 사랑을 증명코자 가슴에 불을 붙였던 이야기까지도.

 

료코는 아직도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기회를 놓쳐버린게 가장 큰 이유다. 료스케의 집에 들른 료코 앞에 마리가 나타나 본명조차 밝히지 않는 이유를 힐문하며 항변한다. 미오에게 료스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미오는 육체 이상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료스케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커갔을 뿐이지 그와 더 나은 관계로 가고자 하는 생각도 딱히 갖지 않는다. 그녀와 하루밤을 함께 했던 직장 상사도 그가 좋아서였기 보다는 그의 쓸쓸함이 못견디게 측은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그의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했던 해프닝일 뿐이었다. 육체관계에만 몰두하는 미오에게 사랑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포스트 하루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본 문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한 요시다 슈이치는, 일반 작가와는 다른 색깔로 자신만의 세계와 정서를 보여준다. 도회지에 사는 이 시대의 남녀를 그릴 때 그는, 차라리 서로의 육체를 탐닉케 할지언정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특이한 관계로 설정해 나타낸다. 적나라한 육체적 반응은 있지만 감정으로까지 그 이상 진전되지 않는 관계의 상정은 현대적 공간에서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몸에 탐닉하는 역설적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은 육체의 확인을 통해 마음을 열어도 된다는 확신이 섰을 때야 비로서 마음을 여는 단계로 들어간다. 사랑, 참 어렵다.

 

동경만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사랑의 여러 양태는 사랑이 희미해지는 세상일수록 더 다가가야 한다는 이율배반적 역설을 담고 있다. 결국 돌아갔지만 료스케와 미오는 사랑을 찾았고 그 사랑에 자신들을 싣기로 마음 먹는다. 섬세하고도 담담한 감정묘사를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요시다 슈이치는 던지고 있다. 나는 '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을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했고, 그 시작을 용기라는 이름으로 불러본다. 이제는 당신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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