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발렌타인 그리고 홀리
고솜이 지음 / 돌풍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시간차를 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을을 아련하게 한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은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고 간절하다.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우려 애쓰는 그들의 사랑은 존재의 부정을 전제로 하기에 더욱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흔적조차 남지 않기를 원했던 바람은 어쩌면 슬픈 사랑이 남긴 초라한 훈장일지 모른다.

 

 

이 이야기는 1989년을 사는 홀리로부터 시작한다. 홀리는 나이트 클럽에서 재즈를 부르는 무명의 여가수다. 낡은 연립의 방 한칸을 얻어 사는 그녀에게 식구는 아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다. 아가에겐 아직 이름이 없다.

 

여기는 뉴욕. 또 다른 화자 이진은 유명 소설가로, 그는 현재 2009년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20년 전 헤어졌던 연인 홀리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은 다른 누구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지만 환상처럼 흐릿하고 바람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이 홀리와 함께 한 시간이 실제였는지조차 때론 의심스럽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잔상은 커져만 간다.

 

60번가를 걷고 있는 이진에게 젊은 청년이 말을 붙인다. 자연스럽고 호감가는 미소에 언뜻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다. 오로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 왔다는 젊은 청년의 이름은 우주다. 그토록 잊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이 한꺼번에 비집고 나오려 한다. 더 이상 눌러지지 않을까 두렵다. 물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세대 연립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누군가 발을 헛디뎠는지 계단을 뒹구는 소리가 엄청나다. 심하게 다친 듯한 4층 할머니의 모습은 참혹하기만 하다. 눈물을 흘리는 홀리 곁에 4층의 그 남자가 서있다. 할머니를 입원시키고 한숨을 돌리는 그들의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 이제 사랑이 시작되려나 보다. 무명의 여가수와 신인 작가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들의 불안한 미래만큼이나 큰 강도로 몰아친다. 그러나 그 사랑이 길어지지 않을 것을 홀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을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간직한 아픔만큼 평범한 사랑은 홀리에게 허락될 수 없었다. '낯선 사람과 춤을'의 여주인공 루스, 'You call it love'의 여주인공 발렌타인, 그리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여주인공인 홀리는 모두 사랑에 각별한 의미를 둔 여주인공들이다. 홀리는 영화속의 그녀들처럼 때론 부질없는 사랑과 때론 꿈결같은 사랑, 때론 모든 자신의 전부를 건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싶다. 맡겼을 때 남겨지는 것이 결국 이별임을 알면서도 그럴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모든 걸 걸었다.

 

긴 세월의 간극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정하고는 작가 고솜이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던 듯 하다. 그녀가 선택한 사랑은 할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불안정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고솜이는 찰나적 사랑까지도 범주에 넣고는 당신은 사랑을 무엇이라 정의하냐고 묻고 있다. 그녀의 물음은 아직 다 말하지 않은 내게 무척 도발적인 질문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그리는 사랑은 그렇기에 내게 더 애잔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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