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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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돌보지 않는 길가의 꽃들이 내 어릴 적에는 제법 많았다. 그런 꽃 중의 하나가 채송화였다. 채송화는 예쁜 꽃이라기 보다는 작고 초라한 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에서 떨어져 있는 동네의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오가는 길에 군데군데 채송화가 피어 있었다. 그 동네는 집마다 담 밑에 채송화를 심었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 작고 낮게 핀 꽃이 안돼 보였다. 그러나 초라함과는 별도로 앙증맞게 피어있는 그 느낌이 괜시리 좋아 학원 가는 길에 가만히 주저앉아 채송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지루한 길 위의 내게 채송화는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내게 채송화는 작고 초라한 것들의 대명사다. 그런데 너무도 하찮아서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그 짠함이 어떤 빼어난 것보다 마음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함이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경험은 자연의 소박함 속에서만 맛볼 수 있다. 얼마 전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 2편'을 통해 그런 시인을 만났다. 이미 고전이 된 시를 위주로 선정했던 1편과 달리, 2편은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시인을 찾아 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시인들 가운데는 친숙한 사람도 있고 처음 알게 된 시인도 있었다. 김지하 시인을 시작으로 정희성, 김종길, 도종환, 조태일, 강은교, 고은, 이성부, 이해인,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등 23명의 시인이 신경림의 초대를 받았다.

 

이 시선집을 통해 서정춘 시인을 만나게 됐다. 신경림은 서정춘을 '균열이 심한 물사발 혹은 마디 굵은 대' 같다고 표현하며 그와의 첫 만남을 소개했다. 1970년대 초 신경림이 한 출판사에서 임시직으로 교정일을 하고 있을 때, 서정춘 또한 출판사와 인쇄소를 오가며 임시일용직으로 잔일을 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구부정한 그를 보고 신경림은 시인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는데, 두 달여의 일을 마치고 갖게 된 회식자리에서 사장이 서정춘을 시인으로 소개했단다. 그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자리의 일을 서정춘은 30년간 성심 성의껏 다하고 그 출판사에서 정년 퇴직했단다.

 

 

신경림은 그가 시집을 냈을 때 해설을 써주기도 하면서 그와의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왔단다. 나는 처음 그의 시를 보고 단박에 좋아져 버렸다. 특히 그의 '30년 전'이란 시를 봤을 때는 울컥 울음이 솟아올랐다.

30년 전,

-1959년 가을-

 

어리고 ,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균열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신경림은 그를 절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시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의 평가와 스스로의 인색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무섭게 다구치며 걸어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섭도록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이미 초라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그 상황에 쓸려가지 않고 꿋꿋이 시의 길을 걸어온 그를 통해 소박한 야생화의 아름다움과 자생력을 보는 듯 했다.

 

이어서 만난 시인은 김용택이었다. 예전 김용택의 글에서 그가 스무 살 이전까지 제대로 된 책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나가는 책 장사에게서 책을 받아 그 때부터 책을 읽고 시를 썼다는 고백같은 글이었다. 이런 사실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고무됐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글도 잘 쓸 수 있구나 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

 

하루 종일 산만 보다 왔습니다

하루 종일 물만 보다 왔습니다

환하게 열리는 산

환하게 열리는 물

하루 종일 물만 보고 왔습니다

하루 종일 산만 보다가 왔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서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

.

중략

.

.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위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 을. 하. 면......

 

김용택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풀어놓은 시들이다. 신경림은 '하루'를 향해 김용택의 게으르고 느린 미가 고스란히 담긴 시라 평하며 그의 삿됨 없음을 칭찬했다. '그 여자네 집'은 그의 삿됨 없음이 가장 잘 드러난 시이다. 아마 김용택은 그 여자를 짝사랑 한 것 같다. 눌러도 눌러지지 않고 끄려해도 꺼지지 않는 마음이 고스란히 읽혀진다. 얼마나 애타고 보고팠을지 너무도 명징히 그려진다. 밖에 나갔다 돌아와 그녀가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불이 지펴지는 그 마음이 서럽고 애잔하다. 참으로 뚝배기 같은 사랑이다. 어떤 채색도 하지 않은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로 쓰여질 수 있었다. 지난 날의 애틋했던 사랑은 아직도 그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일회용 사랑이 넘실대는 이 시대에 태워도 태워도 남아있는 사랑의 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김용택의 시가 투박하고 정직한 시였다면 이선관의 시는 소박하고 정겹다. 신경림은 그를 가리켜 '시를 가지고 세상의 불구를 바로 잡는 시인'이라 했다. 발음과 동작이 불편하다는 표현으로 보아 뇌성마비를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열린 마음과 선량한 눈, 그리고 얼굴 표정으로 자신의 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여보야

이불 같이 덮자

춥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맑고 고운 시다. '여보'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린 아이가 썼다해도 믿겨질 정도다. 시인의 마음이 이 같을 것 같다. 한국에서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예전에 장애자 관련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아를 둔 엄마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과 아픔을 나는 3년이나 지켜 보았다. 모른 척해도 되련만 굳이 티를 내어, 안그래도 힘든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시인의 시는 부모의 따뜻한 배려와 보호속에서 자란 어린 아이처럼 상처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어머니 7

 

저 녀석들의 엄마가 제 울타리에서 뛰쳐나간 지가

어언 3년째가 됩니다

그 동안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두 아이에게

엄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정이 많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가루비누를 만지는 파출부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스승이 되어야 하고

서투른 주방장이 되어야 하고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침저녁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들 곁을 떠난 그 여자를 향해

씨발 X 씨발 X 하면서

미운 감정이 가실 줄 모랐지만

.

.

후략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버린 아내를 향해 쓴 시다. 그는 아내를 향해 육두문자를 쓴다. 그런데 뒤에 가서는 건강한 아이들을 낳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고백을 한다. 아내를 미워했지만 충분히 이해한다는 느낌이 시 안에 배어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폭이 넓다. '어머니 7'의 전문을 읽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찾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 이선관 시인이 2005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시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는 모임을 갖고 있다는 기사도 보게 됐다. 살아있는 자들이 시인을 향해 돌려드리는 향연이다.

 

시는 생을 향한 노래며, 사랑의 편지며, 내밀한 자기 고백이다. 그 시에 시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얹어 신경림은 시인들의 세계를 풀어놓았다. 좋은 시를 향한 끝없는 열정과 자신만의 시를 위해 일생을 매달린 시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세 시인은 기억에 남았다. 작고 하찮기에 누군가의 관심을 오랜 동안 끌지 못했고, 그랬기에 아픔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감히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을 시어에 옮겼을 때 그 말들은 살아서 각자의 울림으로 소박한 꽃을 피웠다. 더러는 정직함으로, 더러는 애잔함으로, 더러는 따뜻함으로.

 

그 옛날 공부하러 간다며 가방을 들고 타박타박 길을 걷던 나를 채송화는 한결 같은 소박함으로 반겨주었다. 주변에 다른 꽃들도 분명 있었을텐데 내 기억에 남아있는 꽃은 오로지 채송화 뿐이다. 챙겨주는 사람 없이도 채송화는 오무린 입을 스스로 벌렸고, 그 작은 꽃잎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도 그 작은 잎의 하나가 되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소박한 생으로 꽃을 피우고 싶다. 그 시절의 채송화처럼.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weebal2004/15964109

사진 출처: 오 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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