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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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만들어내는 자리는 무겁다. 휘황찬란한 광채와 세련됨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그들의 변주는 문명의 변덕스러움을 기막히게 드러내며 우울함을 자아낸다. 인간을 위한 그 자리에 한 부류의 인간은 희생양이 되지만 그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듯 취급된다. 그러므로 문명의 냉혹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적다. 본질을 안다손 치더라도 문명의 혜택을 맛보았다면, 수혜자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입을 다물게 된다. 이제 극소수만이 남는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난다 해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들은 불청객이기 때문이다.

그 불청객에 대한 이야기를 노작가 황석영이 들려준다. 이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굳이 들려주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밀려난 난민들의 이야기는 대강 윤곽이 그려진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진실은 도망갈 틈을 주지않고 구석으로 몰것이므로 애시당초 줄행랑을 치는 것이 상책이지 싶다. 황석영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날선 칼보다도 예리할 것이다. 들어야만 한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노작가의 글은 이제 전같지 않다. 목에 핏대도 서지 않았으며 서슬 푸른 소리도 있지 않다. 세월의 갖은 풍상을 견뎌낸 오래된 나무 같이, 황석영은 주목하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모를 조심스러움으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시간의 채찍과 아픔의 시간을 견딘 자의 낮춘 소리에 지나가던 행인마저도 귀를 귀울일 태세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할아버지의 전래 동화다.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예전의 서울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새롭게 복원된다. 저잣거리의 뛰어난 무사였건만 한창 나이에 이방인으로 세계를 떠돌아야만 했던 할아버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많은 장소 중 쓰레기섬을 택했을까? 쓰레기섬에서 건져갈 만한 것이 그의 표현대로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쓰레기섬 난지도. 난꽃과 영지 버섯이 자랐던 섬이며, 섬의 모양이 물에 떠있는 오리와 비슷해 오리섬, 압도로도 불렸던 섬이다. 꽃이 만개한 섬의 모습이 하도 예뻐 사람들은 꽃섬으로도 불렀다. 그런데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면서부터 난지도는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섬이 되고 말았다. 난지도에 대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은 쓰레기 매립장이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 그 섬은 있으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섬이 되고 말았다. 

 

'낮익은 세상'은 그 쓰레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16살처럼 보이는 14살짜리 소년 딱부리다. 딱부리의 아버지는 삼청대에 끌려가 돌아올 기약도 없고 홀로 남게된 젊은 엄마는 생계를 위해 난지도행을 선택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아수라가 구역 책임자로 있는 곳에 딱부리와 엄마는 정착하게 되고,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모자는 삶을 꾸려간다. 자연스레 아수라는 엄마와 같이 살게 되고 그의 아들 땜통은 딱부리의 동생이 된다.

'낯익은 세상'은 글의 구성이 단순하며 평이한 서술로 쉽게 읽힌다. 작가의 표현대로 감동을 위한 장치를 넣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잔잔하고 덤덤하다. 만약 감동에도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면 그건 순간적 감정의 고양일 뿐이다. 작가는 그런 치졸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고 우리 또한 그런 방식에 감동을 받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덧없고 하찮을망정 잠깐의 순간마저도 이제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무디어졌고 무관심해졌으며 약아졌다.

'낯익은 세상'에는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요소들이 몇 몇 있다. 우선 '낯익은' 이란 3음절은 낯익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반의적으로 쓰이고 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이라는 듯 매일 같이 벌어지는 싸움질과 술판, 도박과 밀약등이 낯익다면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루도 조용하지 않은 날들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환멸과 위악만을 배울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낯익으면 안되는 이 세상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려준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쓰레기'는 '낯익은'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중심 제재다. '쓰레기'는 근대 도시의 욕망과 산업화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며,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뒤안길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재다. '쓰레기'는 쓰레기 같은 세상과 그에 빌붙어 사는 인간들을 조명하는 망원경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갖가지 형태의 삶의 모습은 감추고 싶을 뿐이다. 도시의 위정자들에게 그들은 실제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며 감춰도 명분이 서는 그런 대상에 불과하다.

'쓰레기'는 말만 들어도 시큼한 냄새와 더불어 고개를 돌리게 하는 단어다. 그러나 나는 쓰레기장 난지도에서 서러웠으나 아름다웠던 지난 날을 보았고, 덧붙여 누추한 현실을 보았으며, 멋지게 위장된 미래를 보았다. 위용이 너무도 당당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고 영구할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무너지고마는 미래 말이다. 그러나 미래가 어떨지언정 또 언제 다가올지언정 나는 쓰레기 더미 위의 삶에서 희망을 읽는다. 그뿐 아니라 비루한 현실의 자리에서 절망의 노래가 희망의 노래로 바뀌는 변곡점 또한 발견한다.

 

자기 남편도 기다리지 못해 다른 남자의 동거녀가 되었던 딱부리의 엄마가 교도소에 들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동거남의 자식을 괄시하지 않은 데서 희망의 싹을 보았다. 게다가 웬간한 어른보다도 영악한 딱부리가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금붙이를 만물상 할아버지에게 주는 모습을 보고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특히 딱부리가 땜통을 가슴으로 품어주는 이야기를 보면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낮고 질퍽한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보는 것은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우리의 희망은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안락을 통한 향유에 있지 않다. 그 희망은 때론 보잘 것 없고 하찮으며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마음 자리에서만 나온다.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가장 믿을 수 없는 그 마음 자리를 나는, 실날 같은 희망으로 붙잡으려 한다. 때론 뒤통수를 맞더라도 그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이 책이 내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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