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말을 다루는 사람이다.
말만 다루는가?
사람도 다룬다.
단지 독자가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술수가 대단한 사람들이다.
슬렁슬렁 이야기를 풀어가다 지루할만 하면 슬쩍 고삐를 죄는 강약과 완급의 조절은
작가만이 부릴 수 있는 특혜이자 심술이다.
말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작가도 읽는 사람도 쉴 틈은 없다.
땀은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야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의 마술사, 오쿠다 히데오의 책을 들었다.
날은 덥고 무거운 글은 싫으니 그의 글을 찾을 수밖에 없다.
코믹물로도 더위를 날려버릴 수 있음을 그가 보여주길 바라며 읽기 시작했다.
역시 가독성에 관한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웃음이 난다.
도리 없다. 웃을수 밖에.....

오쿠다 히데오, 이번엔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루기로 했나보다.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데 직급은 한결같이 과장이다.
평사원과 간부급의 중간 자리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집어보려는 계획인 듯하다.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돈나'다.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강하게 부각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마치 '우리에겐 마돈나가 필요해요'라는 듯이.

5편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첫편의 제목은 [마돈나]다.
주인공은 42세의 영업3과장인 오기노 하루히코다.
결혼 15년차로 변변한 연애도 못해보고 직장 동료인 노미코와 사내 결혼한 사내다.
사랑조차 못해본 자신의 처지가 딱해서인지 아니면 사랑에 대한 한풀이인지 부하 여직원을
자신도 모르게 좋아한다.
지금껏 3번이나 상상 연애를 했다.
물론 그 연애는 적당한 때에 깨졌다.
어느날 센다이 출신의 4년차인 구라타 도모미가 자신의 부서로 오게된다.
본인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로서는 제발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상형이 오고 말았다.
그때부터 철딱서니없는 상상연애가 속도를 내며 진행된다.
뿐만아니라 라이벌도 생겼다.
부하직원인 기타하라가 속도 모르고 덤벼든다.
둘의 암투는 극에 달하게 되고 마침내 육탄전까지 벌이게 된다.
다음날 아침 둘은 엉망인 얼굴로 회사에 온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셨는지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게되는 일이 생긴다.
훤칠한 키에 하얀 치아가 멋진 젊은 사원의 등장으로 그녀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알게된다.
씁쓸하지만 역시 내게는 마누라밖에.....
소심한 중년의 일탈이 재미있다.

[댄스]는 45세의 영업 4과장인 다나카 요시오가 주인공이다.
요시오는 현재 고2 아들과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대학도 가지 않고 댄서가 되겠다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한다.
세상이 어떤 곳인데, 저런 철없는 소리를 하다니.
요시오는 그 생각이 날 때 마다 기도 안차고 화가 난다.
집안 일만 이러면 견딜만한데 직장은 한 술 더뜬다.
직장은 직장대로 그를 구석으로 몰고 집안에서는 아내까지 가세해 아들 편을 든다.
그는 설 자리가 없다.
조직과 가정 어디서도 쉴 곳이 없는 40대 남자의 애환에 가슴이 짠해진다.

[총무는 마누라]는 출세코스를 달리고 있는 40세의 온조 히로시가 주인공이다.
간부가 되려면 현장에서 빠져 내근하는 것이 이 회사의 관례이다.
회사의 룰을 따라 히로시는 서무계 과장으로 가게 된다.
가보니 서무계 뿐 아니라 총무부까지 엉망진창이다.
능력제일주의자인 히로시는 내부의 문제를 규칙에 따라 처리하려 한다.
부서에 난리가 난다.
부하부터 시작해 전임과장, 직속 부장등 사내 연결된 온갖 사람들이 줄줄이 그를 만나러 온다.
결국은 백기를 들고 마는 히로시.
부정을 알고도 묵인하는 조직의 구태의연함과 암묵적 관행의 무서움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보스]는 여상사를 모시게 된 44세의 다지마 시게노리의 이야기다.
자신이 차기 부장이 될 줄 믿고 미리 축하까지 받았건만 조직은 중도채용자인 하마나 요코를
담당 부장으로 보낸다.
신임 부장 하마나 요코는 빈틈없고 합리적인 상사로 사내 여직원들의 우상이다.
그녀는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한치의 모자람도 없이 맡겨진 일을 딱부러지게 해낸다.
이른 출근과 정시 퇴근, 접대문화의 전향은 시게노리의 재밋거리를 다 빼앗아 간다.
시게노리는 호시탐탐 상사의 헛점을 노리지만 아무리 봐도 찾을 수 없다.
결국 원치는 않았지만 그도 그녀를 자신의 존경할만한 상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 조직 문화의 낙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우리는 어떤지, 일본보다 더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진다.

[파티오]는 토지개발회사의 과장인 45세의 스츠키 노부히사가 주인공이다.
회사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된 주상복합단지가
이야기의 주된 공간이다.
미래형 도시라며 그렇게 광고를 했건만 주말이 되면 이 곳은 유령의 도시로 변하게 된다.
그는 이 곳에서 멋진 노신사를 보게 된다.
파티오의 한적한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노신사.
그를 볼 때면 자꾸 시골에 홀로 계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세상사에 흥미를 잃은 듯하고 누나가 수시로 방문해 돌보고 있다.
아버지를 못 본지도 벌써 6개월이 됐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자꾸 미루고 있다.
아버지와는 변변한 대화도 나눠 본 적이 없다.

어느날 노신사에게 말을 걸지만 그는 경계를 하고 한동안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
노부히사는 타인과 거리를 두지 않은 자신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어느날 근방에서 노신사를 발견하게 된 노부히사는 그를 통해 아버지와의 거리도 좁히게 된다.
노인들은 누군가의 짐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사람의 손길만이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5편의 글은 다 재미있고 생동감 있었다.
그러나 저변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고달픈 삶을 사는 누군가의 자화상을 본인의 동의없이 본 느낌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되레 더 바빠졌고 일의 양도 더 늘었다.
휴가는 길어지고 휴식 시간도 늘어났지만 피곤의 강도는 더할 수 없이 커졌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은 이 초라한 시대에 바치는 후쿠다 히데오만의 영가이다.
또한 슬픔을 슬픔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시대에 먼저 본 사람이 느끼는 앤솔러지기도하다.
웃음으로 포장된 현대인의 구겨진 삶에 오쿠다 히데오가 주는 조그마한 습기가
과연 위로가 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준 습기로 구겨졌던 곳이 손바닥 만큼이라도 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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