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직 인터뷰어로 『그녀에게 말하다』의 김혜리

<씨네 21>의 기자 김혜리는 내게 떨리는 그대다. 김혜리가 부르는 설레임은 인터뷰이에 대한 그녀의 한시적이고도 온전한 짝사랑처럼 내게도 그렇다. 인터뷰이를 대하는 정중하고도 진지한 자세, 주도면밀한 준비, 섬세하고도 결이 다른 그녀의 언어 감각은 독자인 내게 큰 만족을 선사한다.

조심스럽지만 용감하고, 따뜻하지만 간혹 무미한 그녀의 글은 피상과 안일을 거부하며 조용히 도발한다. 그녀의 글은 또한 인터뷰이와 읽는 이를 매혹하며 긴장케 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터뷰이가 속한 직업적 환경에 대한 식견에서 비롯된다.

​김혜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터뷰이의 가장 열성적인 팬마저도 몰랐던 면모를 발견하려 애를 쓴다. 그 부분이 다른 인터뷰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책의 앞날개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인터뷰어로서의 붙임성과 순발력은 좋지 않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인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자평한다. 새로운 약속 장소로 향할 때마다 팔뚝에 잔소름이 돋을 만큼 긴장하면서도, 언젠가 한번쯤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 한 페이지에 남몰래 적어 넣고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김혜리를 그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의 특징은 전체를 아우르면서 부분에도 구체적 특별성을 띈 독특함에 있다. 그녀는 인터뷰이를 전문(前文)으로 소개한 다음 Q&A로 문답을 정리하는데, 도입부의 글은 따로 떼어 그 부분만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독창적이며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십 수 년 전, <댕기>라는 잡지에서 만화가 김진이 어두운 고교 시절을 회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증오도 향수도 풍화된 그 문장에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김진과 그녀의 만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일부러 위안하려고 애쓰지 않음으로써 위로했고, 꽃 속같이 천진한 영혼들이 기어코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가혹한 성장담을 통해 살아갈 기운을 주었다." 만화가 김진 77쪽

​"언제인가부터 나는 소심한 사람들의 괴력을 눈치채게 되었다. 대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들썩들썩 움직이는 동안 소심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세상을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질 도리밖에 없는 초식동물처럼 그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계절이 언제쯤 변하는지 민첩하고 정확하게 읽어낸다. " PD 김병욱 115쪽

소설가 정이현은 추천사에서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인터뷰집이라고 감히 말한다"고 했다. 동감이다. 이 책은 2008년도에 나왔다. 햇수로 15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산뜻한 느낌을 전한다. 모든 좋은 것들은 늘 젊다.

2. 김혜리의 두 번째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
제목이 이렇게 매혹적이어도 되나 싶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기억의 총합'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 책은 이 말의 방증이다.



"한국 문학의 사려 깊은 연인ㅡ 문학평론가 신형철

예술은 인어공주의 숙명을 지녔다. 예술은 돌려 말해야 한다. 욕망과 사랑을 대놓고 발설하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태생이 벙어리 냉가슴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통역하고 위무하기 위해 비평가가 존재한다...최근 읽은 문학비평 에세이 가운데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커튼>과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이 그러했다. 그들의 글이 유혹적인 까닭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식의 극찬을 감각적 비유를 동원해 나열해서가 아니다. 명쾌한 동시에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왜 좋은지와 어떻게 좋은지를 두루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요구에 이들은 화답한다.

신형철이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고 썼을 때 나는 그가 명쾌하다고 생각했고,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가리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연립주택 같다"고 직유했을 때 소설의 온도를 감각할 수 있었다."

김혜리는 인터뷰를 통해 타인의 내면 세계를 가져오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인터뷰이의 모호하거나 파편화된 생각들이 답변을 통해 형태를 갖춰 배열되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인터뷰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고 내밀한 진실의 영역까지 도달하게 된다.

김혜리는 그밖에도 적잖은 책들을 출간했는데 나는 그녀의 전문 분야인 영화에 관한 책보다 인터뷰집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녀가 봉인해 놓은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의 속삭임을 듣고 싶고, 두고두고 읽어도 물리지 않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이다. 세상엔 내로라 하는 인터뷰어들이 있고 그들의 글 또한 나를 끌어당기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게 최고의 인터뷰어는 김혜리이다.

3. 뻔한 것의 지겨움과 새로움 『열정과 결핍』의 이나리

김혜리를 한껏 흠모하지만 내가 김혜리보다 먼저 만난 인터뷰어는 이나리이다.
2003년 출간된 그녀의 데뷔작 『열정과 결핍』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읽게 됐는데, 사람들은 가고 시대적 상황도 달라졌지만 시간의 변화를 뛰어넘는 글의 생명력은 어이없을만큼 대단했다.

이 책에는 지금은 지상에 없는 고 이윤기 선생과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낸 타고난 글장이 황석영, 당시에는 불타는 중년으로 불렸던 자유인 조영남과 초미의 관심사를 불러일으켰던 미래에셋의 박현주, 교과서적 삶을 살았던 국회의원 조순형과, 영원한 천재 고 이어령 교수, 좌충우돌 최고의 논객 진중권과 낯가리는 페르소나 설경구, 통기타 세대의 향수인 이장희와 JYP의 박진영, 시사 만화가 박재동과 가슴을 휘젓는 소리꾼 장사익과의 만남이 이나리표 글로 깔끔하게 버무러져 소개돼 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람을 인터뷰 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양 쪽 다 뻔한 말이 오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나리는 같은 말이 반복될 식상함과 지루함을 예상하고도 뛰어들었는데,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콤플렉스, 상처와 위선 때로 위악까지 복원해 그들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나리는 인터뷰가 단순히 말과 말이 아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고 부딪침이며 기싸움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보여줄 듯하면서 결코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던 문학청년 황석영과의 치열한 전쟁, 첫 단추였던 고 이윤기와의 긴장된 만남,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정직함이 아직도 있는 듯한 선비 조순형, 갈데 없는 충청도 사람 장사익과의 만남을 그녀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책을 읽다 보면 냉정과 열정, 속도와 밀도처럼 공존하기 힘든 속성들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제어되며, 세상과의 불화와 화해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덧) 김혜리의 인터뷰와 비교하며 읽으면 말랑하고 쫄깃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완성도 높아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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