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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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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을 살해한 부모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버지는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세네명의 범인을 찾아 한 명 한 명씩 살해한다. 마지막 범인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예상하고 도망친다. 아버지와 범인은 눈이 덮힌 산에서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다. 성폭행 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범인을 살해한 부모. 만약 이 아버지가 스스로 죽지 않아 살인죄로 법정에 섰다면, 그저 ‘사람 셋을 죽인 살인마’로 설명이 가능할까? 이러한 사례는 ‘감정’과 ‘이성’이라는 분류가 얼마나 허상인지, 또 법이라는 체제가 감정이 배제된 이성으로서만 세워져야한다는 견해에 대해 혼란을 준다.

 

<혐오와 수치심>을 쓴 마사 너스바움(Martha Nurssbaum)이 책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서문 <감정도 분명 사고를 담고 있다>에서 너스바움은 감정과 이성이라는 이분법이 틀렸다고 말한다. 감정은 이성이라는, 사고하는 체제 위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도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떠한 침해가 포악한지, 어떤 상실이 인간에게 큰 슬픔을 주는지, 인간이 지닌 어떤 취약성이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고유된 인식이 없다면, 왜 우리가 법에서 특정한 형태의 위해와 손상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즉 여러 가지 면에서 위해와 손상을 입기 쉬운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법을 필요로 한다. (22p)

 

감정이라는 것은 사고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아버지가 살인마임에도 우리가 동정심을 품는 이유는, 아버지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사고 위에서 생겨난 감정인 것처럼 말이다. 감정이라는 것을 이성과 반대 항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정이 사고 위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결국 감정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에 종종 소개되는 ‘싸이코패스’ 환자가 그렇듯 말이다. 혹은 자신이 저런 감정을 가진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다. 루소는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하층 계급에 대해 동정심을 결여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은 자신을 삶의 영고성쇠에 놓인 “인간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라고 말했다.(101p)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사고를 한다면 감정은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감정을 법에 끌어들이기를 망설이면 안된다고 말한다.

 

법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모든 것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법이론가들이 동정심, 분개 또는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에 대한 호소를 검토할 때 매우 자주 듣게 되는 ‘감정 대 이성’이라는 강력하면서도 잘못된 대조를 사용해서 이러한 주장을 기각해서는 안된다. 만약 모든 감정이 복잡한 평가적 인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러한 요소를 한 묶음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143p)

 

법에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어떤 감정을 타당하다고 보느냐다. 너스바움은 질문해야 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같은 감정이 이성적인 사람에게 생기냐, 안생기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분노와 두려움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가가 문제(135p)라고 말한다. 즉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사람이 휘둘리지 않아야 할 감정이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너사바움에게 그 감정은 혐오와 수치심이다.

 

우선 너사바움은 혐오가 본능적이고 진화적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심리학자 로진과 앵기알, 밀러를 통해 소개한다. 이들의 혐오는 위험과 다르다. 책에 나온 예를 따르자면, 살균된 바퀴벌레가루가 여전히 혐오스럽다는 사실은 혐오대상에서 위험이 제거되더라도 여전히 혐오가 남아있다는 말이다. 이들에 따르면 혐오는 이질적인 것이며 혐오로 인해 자신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사고를 수반한다. 이절적인 것이란 말은 그것이 인간답지 않은 것, 혹은 자신이 가진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 분비물 중에서 눈물만이 혐오를 유발하지 않는 이유는, 추정컨대 눈물이 유일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우리가 동물과 같은 존재하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반면 배설물, 콧물, 정액, 다른 동물적 신체 분비물은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여겨진다.(...)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는 동물성을 간직한 동물의 분비물을 섭취하면, 우리 자신이 동물의 지위로 격하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170p)

 

너스바움은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분개와 혐오를 구분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성적인 사람의 반응으로 분개에 휩쓸리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혐오에 휩쓸리는 것은 타당치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개는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평가이지만 혐오는 위험성이 없더라도 그 대상이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을까하는 ‘신비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혐오의 배경이 되는 인간이 갖는 순수함에 대한 환상은 건설적이지 않다(199p)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집단이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오물처럼 취급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200p) 너사바움은 동성애혐오와 여성혐오가 이런 혐오의 특성을 잘보여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특정집단을 겨냥해 투영되는 혐오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은 여성의 몸이다. 여성은 출산을 하기 때문에 동물적 삶의 연속성, 몸의 유한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남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정액이 남성에게 혐오를 유발한다면, 남성들은 여성의 몸 안에 있는 혐오물질로 인해 여성들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8p)

 

동성애혐오도 이와 마찬가지다.

 

혐오를 일으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동성애자에 대한 남성의 사고이고, 그 속에는 항문으로 침투될 수 있다는 상상이 스며 있다. 남성의 몸 안에서 정액과 배설물이 함께 혼합된다는 생각은 상상 가능한 가장 혐오스러운 사고 중 하나다. 남성에게 침투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끈적임, 분비, 죽음을 막아주는 신성한 경계가 된다.(211p)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해 유독 심하게 나타나는 혐오 외에도 너사바움은 여러 가지 혐오와 얽힌 판례와 사례를 소개한다. 수많은 혐오들은 그 대상을 ‘이질적인 것’으로 명명한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러한 특성들이 자신 안에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면 우리도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경고와 함께 자기 자신을 유심히 감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308p) 너사바움은 “우리는 우리가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308p)고 말한다. 그렇기에 혐오는 법에 끌어들일 수 있는 타당한 감정이 될 수 없다.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된다.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겨 있는 인간 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된다. (314p)

    

다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혐오보다 발빠르게 법적 영역에 침투했다. 아주 쉬운 예로, 성폭행범의 신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은 시민의 안전을 위한 당위도 있지만 범인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행위다. 혐오가 법적인 영역에 들어오는 것보다 어쩌면 타당한 이유다. 범인은 수치심을 느낄만큼의 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은 보편적이다. 대표적으로 공동체주의 정치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도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공유된 도덕적 가치를 표현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 추천(321p)하고 있다. 이렇듯 수치심이 법적 영역에 들어오기에 타당한 감정이냐는 문제는 혐오의 문제보다 복잡하다.

 

너사바움은 수치심을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338p)이라고 정의한다. 수치심은 보통 생애 초기인 유아기의 경험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뱃속에 있었을 때 완벽한 상태만을 느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와 누군가가 돌봐줘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느끼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오래된 정신분석에 따른다. 그렇기에 혐오보다 문화를 뛰어넘는 유사성을 보인다. 수치심이 혐오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가지는 이유는 에치오니가 지적했듯 수치심이 혐오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건설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너사바움은 한국에서도 <긍정의 배신>으로 유명한 작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가 주는 감정을 예로 든다.

 

이 책에서 에렌라이히는 자격증 없이 직업을 구하는 여성 행세를 하면서 경험한 바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로 빈곤층에 충분한 주거와 고용 선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의 주요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견론짓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이 이문제 대해 충분히 최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책감은 필요한 만큼 더는 발전하지 못한다. 적절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386p)

 

지금껏 자신의 삶에 대해 지적을 받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결국 건설적인 자아를 만들고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스바움이 말하는 이 매력적인 수치심과 에치오니가 범죄자를 낙인찍을 때 사용했던 수치심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치심이 어디에서부터 오느냐’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된 동기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391p)는 것이다. 에치오니와 같이 사회가 주는, 곧 법이 시민에게 수치심을 주는 방식은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법의 영역에서 혐오와 수치심은 이성적인 인간이 느낄 타당한 감정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혐오를 부르고 법으로 수치심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사바움은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누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고자 할 때,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보인다. (624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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