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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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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é chanté. chanter라는 프랑스어는 노래한다는 동사다. 영화를 노래한다는 뜻이겠다. 철학자 강신주와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진행한 <씨네토크>를 책으로 엮어낼 때는 <씨네 샹떼>로 바뀐 것이다. 그저 영화에 대해 말한다기보다는, 철학자와 영화평론가의 두 시선이 만나 어떠한 시너지를 만들어 냈기에 함께 노래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이 책은 영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철학자와 평론가가 부른 이중주로 볼 수 있다.

 

노래는 영화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보통 이렇게 두 유명인(?)이 영화를 고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영화선정의 기준은 자신의 인생영화같이 취향이 드러나는 영화를 고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을 죽 읽어보니 영화선정은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주도적으로 한 것같다. 종종 강신주 철학자가 혼자서는 보지 못했을 영화를 소개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영화선정의 기준은 영화사를 훓을 수 있는 의의를 가진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죽 읽으면, 영화사에 대한 교양수업을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라는 장르가 태동됐던 19세기 후반의 뤼미에르 형제의 영상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까지 다루게된다.

    

 

 

▲<씨네샹떼>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부터 시작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시기까지 영화사 전반을 꿰뚫는다. (알라딘 책소개 페이지 갈무리)

 

이 영화사라는 이중주를 부르며 철학자와 영화평론가는 의견을 같이하며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 해석을 달리하며 갈등의 멜로디를 부르기도 한다.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 버스터 키튼과 같은 초창기 영화작업에 대한 부분을 다룬 1부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이고, 거의 설명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중주가 빛나는 구간은 아니다. 하지만 책 전반에 나오는 개념인 조르조 아감벤의 몸짓’(gesture), ‘어트랙션 시네마등의 설명은 앞으로의 노래를 듣기 위한 필수 준비운동이다.

 

아무래도 흥미로운 부분은 철학자와 영화평론가가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영화를 다룰 때다.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나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동경이야기>의 엔딩신을 두고 강신주 철학자는 이 영화의 보수성을 이야기한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식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남자 주인공이 며느리에게 시계를 주는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말로는 어서 다른 곳에 시집을 가라고 하며 시계를 준다. 이 장면을 두고 철학자와 영화비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를 다룬 <씨네 샹떼>의 페이지. (알라딘 책소개 페이지 갈무리)

 

강신주 철학자: 이것은 노리코에게 1945년 이전의 시제, 자신과 죽은 아내가 머물러 있는 시제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무의식적 명령이다. (...)노리코! 제발 시아버지가 준 시계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요! -292p

 

이상용 영화비평가: 그렇게만 볼 수 없는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진정한 행복을 드러내는 장면은 인물들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함께 걸어가는 동행 장면입니다. (...)따라서 그 시계도 평행적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 생각하면 시아버지와 노리코, 그리고 막내딸이 같은 시간, 같은 시대를 공유할 수 있겠다, 함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암시인 겁니다. -282p

 

또 두 이야기꾼이 다른 해석을 보이는 영화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다. 주인공 알리와 에미가 다시 화해하는 엔딩을 두고 이상용 평론가는 에미의 사랑이 진실된 것이라고, 강신주 철학자는 그렇지 않다며 대립된 의견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석에 대한 불협화음(?)이 나는 경우 외에도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경우도 있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말할 때나, 우디앨런의 <애니홀>에 대한 평가다. 이상용 영화평론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뉴엘의 영화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강신주 철학자가 한 마디 한다.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이상용 선생님이 부르주아가 되신 거예요.” 책을 읽으며 마치 강신주 철학자 라디오를 듣는 것마냥 음성지원이 돼서 웃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뉘앙스로 이야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신주 철학자 특유의 쏘아붙이는 말투는 여전한 것 같다.

 

 

 

 ▲우디앨런 <애니홀>의 한 장면.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 갈무리)

 

우디앨런에 대해서도 강신주 철학자는 거부감을 보인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영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앨런의 작품은 보고 나서도 인상적이라 할 만한 영상을 꼭 집어내기가 어려워요. 몇 달 지나면 남는 영상은 없고, 그 끊임없이 조잘대는 수다만 남을 것 같거든요. 이 영화가 수입되던 1977년 우리나라에 우디 앨런의 팬인 생겼다는 게 한편으로는 고깝기도 해요. 제 눈에 우디 앨런은 강남좌파같이 보이거든요. (강신주) -615p

 

하지만 이상용 영화평론가의 생각은 달라보인다. 직접적으로 반론하지는 않지만 우디 앨런의 영화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빤하게 보이는 남녀의 사연은 사이사이에 다른 것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확력을 얻는다. 가령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기도 하고, 두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자막이나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상황을 표현하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현실의 리얼리즘을 끌어들인 우디 앨런의 실험이 이루어 낸 결과다. (이상용) -635p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이 책을 보면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재미다. 영화사적 교양 더불어 영화와 연결된 인문학적 개념을 배우는 것, 또 한가지 영화두고 다양한 해석을 보며 자신의 취향이 어떤 해석과 가까운지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씨네샹떼라는 노래는 불협임에도 화음이 맞는 이중주인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우고 의식하지는 않지만, 타인이 규칙을 위반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라는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다. 우리는 걷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보행법이라는 것을 배울 일이 있다면, 우리 다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이다. 190

위기가 없다면 사랑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 가정이 원활히 돌아갈 때가 아니라 남편이 실직해서 가정이 위기에 빠질 때, 아내는 자신이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많이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또 우리는 건강과 미모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또 우리는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려고 분주한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 병과 노화, 아이의 성적 하락 등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야 할 상황을 대면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당연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허위에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자각할 위험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415

실수와 고장: 모던타임즈의 주인공은 실수하는 인간이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실수를 연발하지만 기계는 실수 하지 않는다. 대신 기계는 고장이 난다. 인간은 실수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그래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지 않겠어?"처럼, 시행착오를 거쳐 만회한다. 끊임없는 실수라는 건 인간의 존재 증명이다. 실수를 함으로써 인생은 다채로워지고 인가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한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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